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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요나

요나서 2장 강해, 요나의 회개 "다시 주의 성전을 바라보겠다"

by Message.K 2021. 10.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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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성경 요나 2장 강해설교로, 설교제목은 '다시 주의 성전을 바라보겠다'인데요. 이 요나 2장은 '요나의 회개'를 다루는 내용입니다. 너무나 유명한 요나의 이야기를 통해 영적인 성찰과 도움이 있기를 소원하는 마음으로 포스팅합니다. 

 

 

Prologue... 포기하지 마

  존재를 잃어버리면 가슴을 잃는 것이다.
 가슴을 잃어버리면 자신을 잃는 것이다.
 자신을 잃어버리면 세상을 잃는 것이다.
 세상을 잃어버리면 인생을 잃는 것이다.
  
『인생은 실패할 때 끝나는 것이 아니라 포기할 때 끝나는 것이다.』

 우리의 삶에 있어서도 우리는 삶을 포기하고 을 때가 온다. '어떻게 이러한 절망이 나에게, 어떻게 이러한 고통이 나에게 임할 수 있단 말인가'라는 질문을 던지며 머리를 조아릴 때, 머리를 싸매고 씨름씨름 앓을 때가 있다. 그때 우리는 ‘에라, 모르겠다! 포기해 버리자!’라며 자포자기의 지경에 이를 수 있다. 그러나 그때에도 우리는 포기치 말아야 한다.

 

 

 

 

 

가룟 유다와 데마

 우리는 성경에 등장하는 무수한 인물들이 자신의 삶과 신앙과 인생을 포기하고 역사의 뒤안길로 물러났던 인물들을 많이 알고 있다. 예수를 은을 받고 팔아 넘긴 가룟 유다는 자신이 사랑하는, 적어도 3년 동안 정을 붙이며 동고동락했던 스승을 배반하여 죽이게 했다는 자책과 죄책 속에서 자신의 생명을 포기하고 나무에 목을 매달았다. 그는 자신을 포기해 버린 것이다.

 

 또한 빌레몬서에서는 바울과 함께 나의 동역자라고 불리웠던 데마(몬 1:24)는 디모데후서에서는 이 세상을 사랑하여 나를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갔다(딤후 4:10)고 말하고 있다. 데마는 그리스도를 따라 살아가는 삶이 너무나 힘겹고 고통스러웠기에 그는 결국 그리스도를 포기하고 세상으로 가 버린 것이다. 이처럼 우리의 생이 벼랑 위에 선 아슬아슬한 위기에 처해있을 때 우리는 쉽게 포기해 버리고 싶은 유혹을 받는다. 그때에도 우리는 포기치 말아야 한다.

 

  오늘 우리가 보고자 하는 요나의 이야기도 그런 맥락에서 살펴보고자 한다.

 

 

 

큰 물고기와 요나

아밋대의 아들 요나, 하나님의 선지자 요나는 하나님의 소명을 저버리고 선교지 니느웨가 아닌 다시스로 도망하는 길에서 풍랑을 만난다. 그 바다위에서 대작하는 그 폭풍우로 인해 이리저리 뒤척이다 깨달음을 얻은 요나는 선원들에게 ‘나를 들어 바다에 던지라’라고 말했고 그렇게 하였을 때 바다의 뛰노는 것은 그치고, 곧 잠잠하였고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큰 물고기는 요나를 삼키운바 되었다.

 

  1:17 여호와께서 이미 큰 물고기를 예비하사 요나를 삼키게 하셨으므로 요나가 삼일 삼야를 물고기 배에 있으니라

 

 본문에서 요나를 삼킨 짐승에 대하여 “큰 물고기”라고 한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고래는 몸집이 클지라도 목구멍이 작아서 사람을 삼키기에 적합한 짐승이 아니라는 지적이 있어 왔다. 오히려 이것을 상어 종류라고 보는 것이 옳다는 지적이 많다. 사람을 삼킬 수 있는 물고기가 있느냐에 대해서 학자들은 만약 이 요나서 2장의 물고기가 거대한 백상어나 향유고래(catodon macrocephalus)였다면 사람뿐 아니라 말만 한 짐승도 삼킬 수 있었을 것이라고 추측한다. 1912년 플로리다의 나이트키에서 잡혀서 워싱턴의 스미스소니안 연구소에 전시되어 있는 고래는 길이가 135미터, 입 넓이가 95센티미터, 무게가 13.5톤인데 잡힐 당시 고래의 위 속에는 무게가 약 680킬로그램이나 되는 검은 물고기가 있었다고 한다.

 

 

 

 

   훨씬 중요한 문제는 선지자가 어떻게 물고기 뱃속에서 사흘간이나 살아 있을까 하는 점이다. 그러나 때때로 유사한 일들이 예증됨으로써 요나의 역사성이 입증되고 있다. 예를 들면 1758년 지중해에서 한 선원이 배 밖으로 떨어져 상어에게 삼키웠는데 상어가 대포를 맞고 그를 다시 토해내었다. 그는 아무 곳도 다친 데가 없었다. 또 어떤 인디언은 상어에게 삼킨 바 되었는데 그 상어를 잡아서 배를 갈랐는데 곧 죽기는 했지만 그 사람은 아직 살아 있었다. 아마도 선지자는 큰 물고기의 위가 아니라 후두부에 있는 작은 공간으로 들어갔을 것이다. 그곳은 물이 잘 빠지고 공기가 잘 통하는 유일한 장소였을 것이다. 만약에 위에 있었다면 질식사했을 것이다.

 

 

 

 

포기하고 싶은 요나

자신도 죽은 줄만 알았으나 하나님은 물고기를 예비하셨다. 하나님의 관심은 요나를 심판하는 것이 아니라 니느웨 백성에게 회개의 기회를 주시는 것이었다. 물고기의 뱃속에서의 생존은 지극히 고통스러운 것이었을 것이다. 풍랑이 이는 바다 위의 배에 있을 때와는 비교가 안 되는 더 큰 고난을 물고기 뱃속에서 경험하게 되었다. 예전의 텔레비전 프로그램 중에 ‘삶의 체험현장’의 혹독한 체험과는 비교가 될 수 없는 경험이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요나에게 있어 그것은 곧 생사를 내 건 경험이었기 때문이다. 생선의 피냄새, 코를 찌르는 퀴퀴한 냄새, 어두컴컴한 조명, 몸에 쩍쩍 달라붙는 느끼한 내음, 비린내, 바닷물의 찌든 등의 여러 가지 생각하기도 싫은 순간이었지만 그에게는 지금 그러한 상황보다도 더 큰 깨달음 속에서 행동을 취하고 있다. 그가 만약 물고기 내부에 관광 삼아, 여행삼아 갔다면 그 물고기 뱃속에서 나는 악취와 냄새와 분위기와 인상에 신경을 썼을 것이다. 그러나 요나는 물고기 뱃속을 관광삼아, 투어로 간 것이 아니었다. 그는 다시스로 가는 배에 뱃삯을 주고 올랐을 때부터 벌어진 모든 사건사건들의 결과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그가 비록 배 위에 있을 때는 ‘나를 들어 바다에 던지라’라고 아주 멋있는 용기와 확신에 찬 행동을 보였지만 지금이 물고기 뱃속에서의 상황은 여러모로 절망하고 낙망하기 딱 알맞은 곳이라 생각한다.

 

 

 성경을 여러 번 읽고 설교와 동화로 많이 들었던 독자의 입장에서 우리는 요나의 이야기를 다 알고 있다. 그가 어떻게 하나님을 거역하여 도망하다가, 어떻게 다시 하나님을 만나, 어떻게 다시 하나님의 사역을 감당하는지 요나서 4장-시편이나 창세기와는 비교가 안 되는 너무나 짧은 장, 그것도 네 장 밖에 안 된다-만 잠시 읽어 보면 다 알 수 있다. 마치 심청전에 나오는 인당수에 몸을 던진 심청의 생애를 한국 사람이라면 다 알고 있는 것처럼 우리는 그의 이야기, 레퍼토리를 다 알고 있다. 그러기에 우리는 이렇게 생각하기 쉽다. 요나는 미리 하나님께서, 요즘 같으면 ‘구명보트나 잠수정이 나타나 그를 구해 줄 거야’라는 식으로 ‘미리 요나를 천사나 어떤 다른 도구로 통해서 구해주실 것이다’라는 그러한 예상과 추측으로 자신을 바다에 던졌다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우리가 우리의 생을 살아갈 때에 내일 일을 알 수 없듯이 말이다.-물론 내일은 누구를 만나 어떤 사업을 계획하겠다는 정도의 인간적인 스케줄과 시간표는 잡을 수 있을지 모르나 우리의 생명이 언제 끊어질지 알 수 없단 말이다. 어떤 선교사는 선교지로 가서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는 선교사역을 할 원대한 꿈과 비전을 갖고 비행기를 타고 출발하는 비행에서 비행기폭발로 죽어버렸던 사건도 있지 않는가?-그 구약시대의 요나에게도 바다에 몸을 던지면 미래에 기약이 없는 것이다. 생명의 기약이 없는 것이다. 물고기의 밥이 될 수 도 있을 것이고, 아니면 바닷물에서 익사할 수도 있을 것이고 아니면 거대한 파도에 휩쓸려 바위에 부딪혀 죽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한 모든 생의 절망적인 종말을 생각지 않을 수 없는 지경에서 오늘 요나는 자신의 삶을 포기하고 자신의 상황과 환경을 체념한 채 쉽게 삶과 인생을 포기하고 자살하는 사람들처럼 자살을 꿈꿀 수도 있었을 것이다. 아니 실제로 자살을 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비록 큰 물고기 뱃속에서 숨을 쉬면서 생명의 끈이 끊어지진 않았지만 알 수 없는, 기약이 없는 자신의 죽음과 비참한 몰골로 인해 허우적댈 수 도 있을 것이다.

 

 

포기하지 않은 요나

 그러나 요나는 다시 한번 하나님께 나가는, 자신을 포기치 않는 작태를 보여준다.

 

V.1 요나가 물고기 뱃속에서 하나님 여호와께 기도하여

 그는 기도로 하나님께 나아가고 있다. 이 한 사람, 요나는 자신의 진정한 쉼터는 하나님임을 체험적으로 감지하자 잃어버린 그의 능력을 회복한다. 그것은 유일한 대안이자 탈출구이며 사역자의 탄원과 신원함이다. 요나는 기도하고 있다. 그것밖에 없다. 더 이상 도망치려야 도망칠 구석도 공간도 없다. 하나님은 자신의 사람을 이렇게 코너로 몰아서라도 자신의 명령에, 소명에 순종하시기를, 자신의 의지를 관철시키시는 철두철미하신 분이시다.

 

 

요나가 불순종했을 때 그는 무엇을 하였는가?

1:5 그러나 요나는 배 밑층에 내려가서 누워 깊이 잠이 든지라... 험한 폭풍우 가운데서 잠을 자고 있던 요나가 어떻게 바뀌었는가? 기도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이처럼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그렇게까지라도 해서 우리가 당하는 환난과 고난을 통하여 오직 자기 자신과 세상에게로 가 있는 시선을 하나님 자신에게로 돌리기를 원하신다. 이런 측면에서는 요나는 회복되고 있다.

 

  V.4 내가 말하기를 내가 주의 목전에서 쫓겨났을지라도 다시 주의 성전을 바라보겠다 하였나이다.

 

 

 

 

요나의 기도

 언제나 회복의 역사는 기도로부터 시작된다. 부흥의 역사는 언제나 기도로부터, 하나님께 탄원하며 나아감으로써 시작된다. 이제껏 자기가 잘못 살아온 과거의 삶에 대한 단순한 성찰이나 자각과 반성이 아니라 지난날 하나님 앞에서 바로 살지 못한 삶의 어리석음과 자신의 죄성, 타락한 본성에 대한 깊은 자책과 탄성이 하나님밖에는 더 의지할 분이 없다는 것을 심각하게 받아들이는 것이다. 자신의 상황이 어떠한 비탄의 강을 건너거나 통탄의 늪을 지나고 있다고 할지라도 그가 다시 한번 하나님을 바라본다는 것은 그에게 희망적이다. 아니 희망이다. 소망인 것이다. 주위를 둘러싼 환경이나 자신이 가진 문제의 절박함이 마치 시험 마칠 시간은 다 되었는데 아직도 풀지 못 한 문제가 산적해 있는 수험생처럼 그러하다 할지라도 하나님을 바라보는 자에게 안식과 화평과 쉼을 가질 수 있는 여유가 있다는 것이다. 오늘 우리 눈에 들어온 이 한 사람, 한 컷을 보라. 요나는 주위의 모든 것을 차단시키고 오직 하나님께로 눈을 돌리고 있다. 기도하고 있다.

 

 

 만약 요나가 기도하지 않았다면 그는 ‘키(생명의 길이)를 한 자도 더 할 수 없는 염려함’이 그를 짓눌러서 생명을 구하기가 어려웠을지도 모른다. 우리가 ‘이생의 염려와 재리와 일락’(눅 8:14)에 집중하면 집중할수록 키를 한 자도 더 할 수 없는 염려와 근심이 우릴 둘러쌀 것이고, 우리가 하나님께 집중하면 집중할수록 키를 한 자 아니 열 자, 백 자라도 더 할 수 있는 하나님의 능력이 우릴 포위할 것이다.

 

 

 

 

요나의 하나님

 그렇다면, 그분이 누구신가?

요나서는 온 세상의 주인 되시며 만물을 자유자재로 통치하시며 명령하시는 하나님을 그려주고 있다.

 

 폭풍우로 바다를 뒤집어엎으시거나(1장)

큰 물고기가 사람을 삼키게 하셔서 삼 일 후에 다시 바다 한가운데도 아닌 육지에 토하게 하시거나(2장)

 

-생각해 보라! 어찌 물고기가 사람을 잡아먹으면 잡아먹었지 삼킬 수 있단 말인가? 또한 어떻게 시기적절하게 그 넓고 넓은 바다를 놔두고 하필이면 육지에다 오바이트를 할 수 있단 말인가?

 

더 나아가

(4장) 햇볕의 따가움을 피할 수 있도록 요나의 머리 위에 박넝쿨로 그늘을 주신 것이나

요나의 열악하고도 추악한 내면을 보여주시기 위해 벌레를 준비하셔서 박넝쿨을 씹게 하신 일, 이 모든 것-폭풍우, 물고기, 박 넝쿨, 벌레-을 주관하시는 우리의 하나님의 위대함을 보라!

 

 

 

 

무관심한 현대인

  그러나 문제는 현대인들이 이런 하나님에 대해 별 관심이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어떻게 인생을 이끌어 가시는지, 어떻게 우주를 창조하시고 다스리시는지에 대해 무관심하다는 것이다.

 

 성경책을 읽는 것에, 그것이 어떻게 생겨 먹었는지 관심이 없다는 것이다. 그래, 그것은 분명히 <하나의 긴 책>이다. 현대인들은 읽고 생각하는 것보다 눈으로 보고 느끼는 것을 좋아한다. 그것은 바로 현대인들이 ‘읽기’보다는 ‘시청하기’를 좋아한다는 뜻이다.

 

 또한 설교자의 말을 듣는 것에 별 관심이 없다는 것이다. 그래, 그것은 분명 <하나의 긴 연설>이다. 현대인들은 듣기를 싫어한다. 듣고 생각하기를 싫어한다. 한 사람이 이렇게 정장을 입고-더군다나 제 같은 경우에는 웬만한 사람들보다 나이가 아래인데 이런 연소한 사람이- 짧게는 30분에서 길게는 1시간에서 2시간 가까이 되는 그 일방적이고도 독단적인 연설을 앉아서 듣는 것을 극도로 혐오하며 싫어한다. 집에서 텔레비전 시청할 때처럼 눕거나 어디에 기대거나 그런 자세도 아니고 오로지 딱딱한 나무의자, 그것도 등받이가 시원챦은 의자에 앉아서 시간을 죽이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또한 다른 경우와는 다르게 설교할 때는 손을 들어 질문을 할 수 도 없다는 것이다. 설교자의 발음이 서툴거나 설교의 내용에 반대의견을 내고 싶어도 결코 질문할 수 있는 기회를 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기에 누가 설교 듣기를 좋아하겠는가? 누가 그 길고도 장황한 연설을 불편하게 듣고자 하겠는가? 그것은 바로 현대인들이 듣고 생각하거나 듣고 깨닫는 것보다 눈으로 보고 즐기는 것을 좋아하기 때문이다. 또한 현대인들은 변화하기를 싫어한다. 예배당에 겨우 와서 앉아 있으면 앞에 서 있는 저 같은 설교자들이 자꾸 변화되어야 한다느니 변해야 한다느니 하는 소리로 은근 슬쩍 비위를 건드린다는 것이다. 나만의 세계에서 겨우 탈출하여 교회당으로 겨우 발걸음을 옮겼는데 또 듣기 거북한 소릴 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또 심기를 불편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쿠션이 좋은 소파도 아닌 차가운 의자에 앉아 있는 것도 그러한데 마음까지 뒤숭숭하게 만들어 놓는다는 것이다. 이러한 것은 현대인들이 현 상태에서 안주하기를 좋아하고 변화되기를 극도로 싫어하기 때문이다.

 

 

 

 

 

요나, 현대인들의 자화상

이러한 모든 현대인들의 심적 정황과 풍경이 오늘 우리가 보는 한 인물, 요나에게 모두 다 함축되어 있다. 그가 어떠한 상황의 결말로 여기에 와 있는가? 그는 하나님의 명령에 반기를 들었던 인물이다.

 

‘하나님, 그 말씀은 내가 보기에 너무나 얼토당토 하지 않습니다. 그 명령을 철회시키십시오!’

 

라고하고 하나님께서 그 명령을 거두지 않자 소명을 뿌리치고 “여호와의 낯을 피하여” 줄행랑을 친 인물이 바로 요나였다. _말씀이 없이도 살아갈 수 있겠다고 호언장담하던 요나, 말씀을 듣기를 싫어했던 요나,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해 변화되기를 거부했던 요나_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아닌 다른 나라 사람들, 이교도들, 이방인들에게 관심을 가지는 것이 못 마땅했던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에 토를 달고서 도망치다가 지금은 매 맞은 꼴이 된 요나, 좀 더 거칠게 표현하자면, 까불다가 얻어터진 요나...

그래서 Stek은 요나가

 

“이방인들에게 하나님의 축복을 가져다주는 사명을 잘 이행하지 못한 이스라엘을 대표한다”

 

고 말했다. 그래서 요나야말로 우리 시대의 자화상, 우리나라 크리스천들의 자화상이 다.

이동원 목사님은

 

‘거짓된 평화 속에서 잠들었던 교회’를 요나가 대변해주고 있다

 

고 말했다. 그렇다. 거짓된 평화 속에서 잠들었던 나 자신과 교회와 가정과 나라를 하나님께서 깨워주신다.

 

 

 

 

 

요나의 '내가 받는 고난'

그렇다면 무엇을 통해서 깨워주시는가?

 

V.2'내가 받는 고난‘을 인하여 여호와께 불러 아뢰었삽더니

<내가 받는 고난>, <내가 지금 당면하고 있는 고난>을 통해서 일깨워주신다.

 

 오늘날 취업대란으로 수많은 젊은이들이 생존경쟁의 대열에서 힘겨워하고 있다. 대학 들어가면 모든 것이 자유로울 줄 알았는데 곧 있으면 남자는 군대를 가야 하고 여자는 남자보다 조금 더 일찍 취업준비를 해야 한다. 예전에 우리가 다닐 때의 대학은 ‘낭만과 로맨스의 전형’이었고, 그 이전 80년대는 ‘진리의 상아탑, 아카데미’를 연상케 했지만 오늘날의 대학은 이러한 것들과는 거리가 먼 지 오래다. 돈 되는 일이라면 몸을 팔아서라도, 자신의 정조와 자신의 젊음을 바치는 시대가 되었다. 시대가 정말 예수 믿기 힘든 시대가 되었다. 이러한 시대 가운데 우리의 가정과 교회와 학교와 민족... 모든 상황들 이 여러분을 힘들게 하진 않는가?

 

 

학점과 이성친구, 아르바이트, 취미생활, 인터넷, 스마트폰, 주식, 가상코인, 교통카드, 텔레비전, 넷플릭스, 게임, 취업, 토익, 토플, 자격증, 운전면허, 국가고시, 시험들, 부모님, 형제, 자매, 교회, 믿음으로 산다는 것, 돈...

 

  이 모든 것들은 여러분이 처한 상황 가운데 부딪히는 모든 문제들이다. 이것들 가운데 여러분은 남들이 알지 못하는 아픔과 고난이 분명히 있을 것이다.

 

 그 고난은 마치 요나가 당하고 있는, 스올의 뱃속(V.2)_ 물고기의 뱃속, 죽음의 어떤 곳, 사형선고를 받은 자들의 고통의 자리-같은 것일 수 도 있다.

그 고난은 마치 깊음 속 바다 가운데 던지진 기분(V.3)과 같을 것이다. 때론, “내가 받는 고난이 큰 물이 나를 둘러싼 것 같은(V.3), 파도와 큰 물결이 다 내 위에 넘친 것 같은(V.3),-여러분, 물에 빠져 죽을 뻔한 경험이나 기억을 되살려 보라! 얼마나 절박한 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헤어날 수 없는 요나의 상황과 똑같아”라고 말할지도 모르겠다.

 그 고난은 마치 물이 나를 두름이 영혼까지(V.5)-얼마나 탁월한 표현인가? 물이 자기를 위협하는 느낌이 얼마나 큰 지를 상상해 보라!-하는 것 같을 것이다.

 

 

또한 그 고난은 깊음이 나를 에워싸는 것이 마치 바다 풀이 내 머리를 감싼(V.5)-물고기 뱃속에서 느껴지는 요나의 엄청난 고난을 갸름해 보라. 바다의 심연에 있는 바다 풀이 자기의 머리를 휘감았다는 말이다. 아, 생각만 해도 오싹하다- 것 같을지도 모른다.

 

 

 

 내가 당하는 그 고난은 마치 산의 뿌리까지 내려가는(V.6)-산의 뿌리가 어디에 있는가? 그것은 바로 산과 땅의 접촉점 이하로 내려간다- 느낌일지도 모른다. 또한 땅이 그 빗장으로 나를 오래도록 얽어매고 막아서는(V.6)-상상력을 총동원해 보라! 땅이 빗장이 되어 나를 열어주지 않는다. 빛을 보게 해주지 않는다. 이 깊은 절망적인 기분을 헤아려 보라!- 기분일지 도 모른다. 또한 내 영혼이 내 속에서 피곤할 때(V.7)일는지도 모른다.

 

 

 이 엄청나고 거대한 고난, 우리가 당면하고 있는 모든 고난은 꼭 ‘죄’ 때문에 오는 것만은 아니다. 그러나 어떤 고난은 ‘죄’ 때문에 온다. ‘죄’ 때문에 여러분의 마음의 문을 두드리고, ‘죄’ 때문에 여러분의 가정의 현관문을 노크하기도 하고, ‘죄’ 때문에 교회의 입구로부터 들어오기도 하고, ‘죄’ 때문에 나라의 국경을 넘어오기도 한다.

 그러한 모든, 총체적인 고난 앞에서 도피한다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이 아님을 요나의 도피행각을 통해 보았다.

 

 

요나의 회개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요나가 어떻게 하고 있는지 주목해 보라!

 

 V.2 내가 받는 고난을 인하여 여호와께 불러 아뢰었삽더니...

 V.4 내가 주의 목전에서 쫓겨났을지라도 다시 주의 성전(여기서는 ‘하나님이 친히 임재해 계신 곳’을 가리킨다. 따라서 죽음 이후의 세계, 사망, 무덤 등을 뜻하는 “스올”의 뱃속과는 반대되는 개념이다.)을 바라보겠다 하였나이다

 V.7 내 영혼이 내 속에서 피곤할 때에 내가 여호와를 생각하였삽더니 (내 기도가 주게 이르러 싸 오며 주의 성전에 미쳤나이다)

 

 

 

 

 

주의 파도와 큰 물결

여기서 우리가 주의 깊게 보아야 할 것이 또 하나 있는데 그것은 바로

 

V.3에 나오는 ‘주의 파도와 큰 물결’이다.

주님의 파도와 물결이라는 것이다. 이 환난과 고통과 고난의 배후에는 주님이 계신다는 것이다. 요나가 당하는 그 극심한 환경의 이면에는 하나님의 손길과 입김이 묻어 있다는 것이다. 이처럼 우리의 상황과 환경의 저편에는 하나님의 보이지 않는 인도하심과 보호하심의 날개가 퍼득이고 있다는 것을 ‘믿음의 눈’으로 보아야 한다. 이 모든 삼라만상을 움직이시며 하루에도 얼마나 많은 머리카락이 빠지고 다시 자라고 하는데도 그 머리카락의 개수까지도 세세하게 세시는 그 섬세하신 하나님의 기운이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그러할 때에 우리는 우리가 머물고 처한 환경이 비탄의 구덩이가 아니라 ‘주의 파도와 큰 물결로 인한 흔들림’ 임을 깨닫게 될 뿐만 아니라 ‘내가 주의 목전에서 쫓겨났을지라도_내가 주님에게 또다시 실망의 고배를 마셔 드리게 하고, 주님을 십자가에 또 다시 못 박히게 하고, 하나님의 가슴에 분노와 진노의 화살을 쏘아댔다고 할지라도_다시 주의 성전을 바라보겠다’는 결단의 깃발이 서게 된다는 것이다.

 

 

 

 

사공들만 못한 요나

 우리가 이제껏 주목하고 바라본 요나의 영상은 회복을 갈망하는 것이었다. 부흥을 사모하는 그의 모습이었다. 그러나 그가 이런 영적 부흥과 갱신이 있기까지의 과정들을 들여다본다면 다시 한번 혀를 내두를지도 모르겠다.

 

 

 요나는 풍랑이 일어났을 때 잠을 잤을 뿐만 아니라 선원들이 그에게 그들과 함께 기도하자고 요청했을 때 그때조차도 그는 기도하지 않았고, 그 때조차도 자신이 그들의 환난의 원인인 것을 고백하지 않다가, 자신에게 죄가 있고 또 그들의 역경의 체험이 있음이 밝혀지고 나서야 비로소 그것을 고백하였던 것이다. 그 때 요나는 자신이 참된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인 것을 아주 자랑스럽게 말하였다.

 

 “나는 히브리 사람이요 바다와 육지를 지으신 하늘의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로라”(1:9)

 그러자 선원들은 하나님을 두려워했고 요나를 지존하신 하나님의 선지자로 받아들여 이 위기의 때, 폭풍우의 한가운데서 자기들이 무엇을 해야 할지를 물었다. (1:11 바다가 점점 흉흉한지라 무리가 그에게 이르되 우리가 너를 어떻게 하여야 바다가 우리를 위하여 잔잔하겠느냐)

 

 

 

 

 그때 요나는 그제야 일말의 깨달음을 얻고서 아주 기다렸다는 듯이 비장한 각오로 ‘나를 들어 바다에 던지라’(1:12)라고 대답했다. 그러나 선원들은 배를 육지로 돌리고자 힘써 노를 저어 스스로를 구하고자 했다. 그들은 요나를 바다에 던지는 방법보다 스스로 노를 저어 모든 생명을 구하는 방법을 선택한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그들은 생명에 대한 관심이 엿보인다. 마치 요나가 니느웨의 죽어가는 영혼들을 불쌍히 여기기는커녕 오히려 사역의 소명으로부터 도망치는 면과는 대조적으로 말이다. 또한 선원들은 어쩔 수 없이 요나를 배 밖으로 던질 때에도 하나님의 용서를 구하기도 했다.

 

 “무리가 여호와께 부르짖어 가로되 여호와여 구하고 구하오니 이 사람의 생명 까닭에 우리를 멸망시키지 마옵소서 무죄한 피를 우리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주 여호와께서는 주의 뜻대로 행하심이니이다 하고”(1:14)

 

 

 요나를 바다에 던졌을 때, 그들의 믿음은 보상을 받았다. 바다가 잔잔해진 것이었다. 사공들은 즐겁게 행선을 계속하였고, 요나의 운명은 불확실한 채 남아 있었다. 그들은 잔잔한 바다를 항해한 반면, 요나는 바닷속 한가운데 있었다. 그들의 기도는 이미 응답되었으나, 요나는 이제야 기도하기 시작하였다.(2장) 그들은 즉시로 하나님께 희생과 자발적인 감사 제물을 드렸으나(1:16), 요나는 감사 제물을 드릴 것을 서원하기까지(2:9) 아직 상한 채 있어야 했던 것이다.

 

 이러한 과정에서 사공들은 비록 하나님의 완전함과 그의 구속사적인 행위들에 대해 사실상 아는 바가 전혀 없었다 할지라도, 그들은 믿음의 영웅들이었다. 그들은 하늘과 땅의 주 하나님을 경배하고, 인간의 생명을 귀하게 여겼을 뿐만 아니라 여호와께 서원한 것을 이행하였다(1:16). 이에 대하여 반 게메렌은

 

“요나의 기도가 무척이나 자기중심적이었다”

 

고 말한다. (2:1-9) 2장, 요나의 기도를 자세히 살펴보면 <나>라는 말이 대단히 많이 나온다. 약 20번 안팎으로 나타난다. 다 같이 한 번 살펴볼까 한다.

 

 

 

 

 

 

 

요나만 못한 우리들

이처럼 우리는 언제나 요나서 1장과 2장을 읽을 때마다 다른 선지자의 수준에 미치지 못하는 영적으로 저급하고, 삶에 있어서 신앙으로 다져지지 못한 사역자의 본보기를 본다. 그러나 오늘날 요나만 못한 사역자들이 우리에게는 얼마나 많은가? 요나만도 못한 그리스도인들이 얼마나 많은가? 아니 요나만 못 한 우리들이 아닌가? 그는 하나님의 일꾼으로서 고난을 받을 때에 비록 그것이 불순종으로 말미암는 고난이었다 할지라도 그 가운데서 여호와를 부를 마음이 생겼다.

 

  

  중요한 것은 선지자의 불순종이 아니라 고통과 고난 가운데서 다시 떠오르고 있는 하나님의 성전을 향한 소망(이것은 사실 하나님 자신을 향한 소망의 표현이었다) 임을 기억하여야 한다. 그러나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고난과 연단을 받음에도 불구하고 관심을 하나님께 두는 대신 세상과 사람에게 둔 채 재앙의 폭풍 속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살아가는가? 얼마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끈질긴 사랑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아직도 자신을 포기치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자포자기하여 비탄의 낭떠러지로 떨어지고 마는가? 그러므로 우리는 언제나 하나님의 뜻을 받들어 행하는 일에 있어 경성 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한다.

 

 

 성도 여러분들이 당하고 있는 고난과 역경 가운데서도 요나의 기도 속에 담긴 그의 진실한 고백이 삶 속에 번져가길 바란다. 그의 고백을 들어보길 바란다.

 

 

V.2 내가 받는 고난을 인하여 여호와께 불러 아뢰었삽더니

 V.4"내가 주의 목전에서 쫓겨났을지라도 다시 주의 성전을 바라보겠다 “

 V.7 내 영혼이 내 속에서 피곤할 때에 내가 여호와를 생각하였삽더니 내 기도가 주께 이르렀사오며 주의 성전에 미쳤나이다

 

 

 

오늘은 구약성경 요나서 2장 강해설교로 "내가 다시 주의 성전을 바라보겠다: 요나의 회개"에 대한 내용을 같이 공유해 보았습니다. 요나의 모습이 우리의 모습이고, 기독교인의 모습, 자화상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의 영혼이 날마다 회개하길 소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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