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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잠언

잠언 17장 9,18절, 진정한 우정에 대한 담소

by Message.K 2021. 10.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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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 17:9)허물을 덮어 주는 자는 사랑을 구하는 자요 그것을 거듭 말하는 자는 친한 벗을 이간하는 자니라

(잠 17:17)친구는 사랑이 끊이지 아니하고 형제는 위급한 때까지 위하여 났느니라

 

 

  

소중한 친구 만들기-탄줘잉의 ‘살아있는 동안 꼭 해야 할 49가지’ 중에서

 

-기원전 4세기 경, 그리스의 피시아스라는 젊은이와 다몬의 진실한 우정 이야기입니다.

 

“폐하, 제가 그의 귀환을 보증합니다. 그를 보내주십시오.”

“다몬아, 만일 피시아스가 돌아오지 않는다면 어쩌겠느냐?”

“어쩔 수 없죠. 그렇다면 친구를 잘못 사귄 죄로 제가 대신 교수형을 받겠습니다.”

“너는 피시아스를 믿느냐?”

“폐하, 그는 제 친구입니다.”

“피시아스는 돌아오면 죽을 운명이다. 그것을 알면서도 돌아올 것 같은가? 만약 돌아오려 해도 그의 부모가 보내주지 않겠지. 너는 지금 만용을 부리고 있다.”

“저는 피시아스의 친구가 되길 간절히 원했습니다. 제 목숨을 걸고 부탁드리오니 부디 허락해 주십시오, 폐하.”

“나의 친구 피시아스를 욕하지 마라. 당신들이 내 친구를 어찌 알겠는가.”

 

“제가 돌아왔습니다. 이제는 다몬을 풀어 주십시오. 사형수는 접니다.”

“다몬, 나의 소중한 친구여. 저 세상에 가서도 자네를 잊지 않겠네.”

“피시아스, 자네가 먼저 가는 것뿐이네. 다음 세상에서 다시 만나도 우리는 틀림없이 친구가 될 거야.”

 

“피시아스의 죄를 사면해 주노라!”

“내 모든 것을 다 주더라도 이런 친구를 한번 사귀어보고 싶구나.”

 

 

 

세상은 변하게 마련이지만 영원히 변하지 않는 것이 있습니다. 

친구가 힘들어할 때 두 손을 내밀어 잡아주는 것, 바로 속 깊은 우정입니다.

 

 

 

 오늘은 ‘우정’에 대해서 말씀을 나눠볼까 합니다. 

여러분들에게는 사랑하는 친구가 있나요? 피시아스와 다몬과 같은 친구가 있나요? 서로를 전적으로 믿어주고 신뢰해줄 만한 친구 말이다. 앞에 선 저에게는 많은 친구들이 지나갔지만 그 친구들과 늘 좋은 관계를 유지하지 못하는 것이 아쉽기만 하다. 바쁘다는 핑계로 시간이 없다는 핑계로 친구들과의 만남이 부족한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학창시절을 보내고 있는 지금, 여러분들에게는 단짝친구가 있는가? 그 친구만 보면 편하고 기분이 좋아지고 입가에 미소가 감도는 그런 절친한 친구가 있는가? 친구는 연인(애인)과는 다르다. 또한 친구는 부모님, 엄마, 아빠 랑도 다르다. 친구는 형제, 자매와도 다르다. 친구는 말 그대로, 영화 친구의 대사처럼 ‘친구 아이가!!!’이다. 

 엄마, 아빠 즉 부모님은 여러분들에게 끊임없이 보살펴 주고 돌보아주는 주고 받는 관계이다. 그렇다면 친구는 어떤 관계일까? 첫 번째 구절을 살펴보자!!!

 

(잠 17:9)허물을 덮어 주는 자는 사랑을 구하는 자요 그것을 거듭 말하는 자는 친한 벗을 이간하는 자니라

 

친구는 첫번째로, 허물을 덮어주어야 한다. 

 

인간관계도 노력하고 개발해야 한다. 사람과 사람 사이는 참으로 묘해서 무언가 서로 주고 받는게 없으면 소원해지고 멀어지게마련이다. 물건과 물건을 사이에 둔다면 그 두 비인격체의 관계는 놔둔채로 늘 유지될 것이다. 하지만 인격체인 사람과 사람 사이는 끊임없이 움직이고 변화무쌍하다. 그러기에 그 움직이는 관계 가운데 주고 받는, 커뮤니케이션이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 관계들이 조금씩 조금씩 사라지고 인간관계의 윤택함이 상실되어 간다. 친구관계도 더 그렇다. 서로 다른 환경과 배경과 가정과 교육과 생각과 가치관을 가진 사람이 서로 주고 받는게 없다면 서로의 관계에 아무런 업그레이드도 없다. 미래가 없다. 그 친구끼리 서로 주고 받는 가운데 서로에게 잘못을 할 수가 있다. 의도적이건 의도적이지 않건간에 사람과 사람 사이에는 문제가 생길 여지가 많다. 누가 문제를 발생시켰건, 그것이 당사자이거나 제3자에게 잘못을 했건간에 성경은 분명히 말하고 있다. 허물을 덮어주는 것이 진정한 친구관계의 본질이다. 조금 못된 짓을 하거나 화 나게 하거나 부족한 점이나 마땅치 않은 점이 있다손 치더라도 친구라 하면, 허물을 덮어주어야 한다고 성경은 말한다. 

 

 

반대로 친구의 잘못과 허물을 계속적으로 말하는 자는 친구관계를 포기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허물을 반복해서 거듭 말하는 사람은 친구가 될 수 없는 것이다. 특히 여자들끼리의 생활에서는 이러한 일이 더 많지 않은가? ‘왕따, 이지메, 고자질, 이간질..아닌가?’ 남자도 여자가 말을 더 많이 하는 라이프스타일과 수다떨기를 좋아하는 여자들의 취미와 습관을 돌아볼 때 ‘그것(허물)을 거듭 말하는 자는 친한 벗을 이간하는 자’라는 말씀은 더 크게 다가올 줄 믿는다. 반, 학급 생활 가운데 우정을 깨는 것은 바로 ‘험담’, ‘이간질’, ‘고자질’ 같은 언어생활에서 시작된다. 말이라는 것은 또한 특별한 힘과 능력이 있어서 A에서 이야기한 것이 B로 가면 A가 아닌 A’가 될 수도 있다. 그만큼 확대해석, 확대적용, 의미변화가 심하다는 것이다. 그러기에 좋은 말은 계속 거듭 말하면 좋지만, 나쁜 말, 별로 덕이 되지 않는 흠이나 잘못이나 결점들을 이야기할 때에는 확실히 조심해야 한다. 예전에 병훈-중하 이렇게 삼각 구도 사이에서 이러한 것을 경험하지 않았던가? 서로에 대한 감정싸움 뿐만 아니라 돈 문제까지 얽혀서 병훈의 입장은 참으로 외통수였다. 그런 외통수의 지경에서 병훈이의 입에서 나오는 ‘일구이언’에 대해 중하와 나는 참을 수 없었다. 서로 서로 말에 대해 의심하고 혀를 차고 불쾌했던 시간들…

 

 

‘친구 아이가..’친구 좋은 것이 바로 서로의 허물을 들추어내지 않고 덮어주는 데 있다. 이 세상에 완벽한 친구는 없다. 여러분들 중에 사무엘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라는 책을 읽어보았는가? 그 책에 보면 ‘에라스트라공’과 ‘블라드미르’가 나온다. 이 두 사람은 똑같이 ‘고도’를 기다리며 길을 걸어간다. 하지만 그 긴 여정 가운데 두 사람은 충분히 친구가 될만한데도 둘은 결코 친구가 되지 못한다. 왜냐하면 ‘마늘 냄새 때문이다’. 에라스트라공은 블라드미르의 마늘냄새, 블라드미르는 에라스트라공의 마늘냄새 때문에 더 서로를 신뢰하지 못한다. 즉 서로의 허물을 결코 용납하지 않는다. 이해하진 못하더라도 받아들인다면 둘은 좋은 친구가 될 수 있을텐데. 그러지 못했던 것이다. 

 

 

 

우리 인간 세상에서 우리가 살 수 있는 시간은 100살 정도로 잡는다면 1년이 365일이니깐, 36500일 밖에 되지 않는다. 여러분은 10대 후반이니깐 31025일(15살로 잡는다면)을 앞으로 더 살 수 있다. 적어도 여러분이 교통사고나 각종 갑작스런 사고가 나지 않고 암이나 AIDS같은 병에 걸리지 않고 건강하게 살다가 지병없이 늙어서 죽는다고 생각했을 때 그렇다. 그 31,025일 동안, 시간으로 따지면_ 744,600시간, 분으로 따지면_44,676,000분 동안, 초로 따지면_2,680,560,000초 동안 여러분이 만나는 친구들, 동네친구, 유치원 친구,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 대학원, 직장, 동호회, 동아리, 교회, 계모임…등에서 많은 친구들을 만나겠지만 그 만나는 친구들마다 다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것을 불가능하다. 지금 여러분이 만나는 친구들과 함께 하는 시간은 여러분이 남은 그 31,025일 동안, (시간으로 따지면) 744,600시간, (분으로 따지면)44,676,000분 동안, (초로 따지면) 2,680,560,000초 동안 얼마 되지 않는 양이다. 그 시간 동안에 최선을 다하여 친구 노릇을 하기를 바란다. 친구의 허물을 덮어주어라! 얼마 안 되는 양의 초, 분, 시간, 일, 년 가운데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붙여 준 귀한 선물이다. ‘잘못을 용서해주고, 감싸주고, 이해해주고, 용납해주고, 더 가까이해주라’ 그것이 바로 친구이다. 

 

 

 

내 친구는 완벽하지 않다. 나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우리는 너무나 잘 맞는다. - 포프

한 친구를 얻는 데는 오래 걸리지만 잃는 데는 잠시이다. - 릴리

♤ 친구를 칭찬할 때는 널리 알도록 하고 친구를 책망할 때는 남이 모르게 한다. - 독일속담 -

 

 

 

  우리 그리스도인에게는 인생이라는 거대한 시간 가운데 멋진 친구를 한 분 주신 것을 기억할 것이다. 그 분이 누군가?

 

(요 15:14)너희가 나의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

 (요 15:15)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종은 주인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니라

 

 

예수님은 우리더러 ‘친구’라고 말씀하신다. 

마 11:19에 예수님은 ‘세리와 죄인의 친구로다’라고 등장한다. ‘의인과 도덕점수가 탁월한 사람들의 친구’라고 하지 않는다. 예수님은 얼짱, 몸짱, 성격짱, 몸매짱, …짱짱짱 들의 친구가 아니라 ‘세리와 죄인의 친구’, 만인의 친구이셨다. ‘삭개오’와 같은 정말 키는 지독하게 작고 성격은 고약하기 이를 떼 없고 돈은 무지하게 밝혀서 자기 동포의 세금을 뜯어내는 그런 스크루지 영감보다 더 악랄한 인간에게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겠다’고 다가가주셨던 것이다. 이러한 이야기를 하지 않더라도 예수님은 우리의 친구이시다. 그 예수님을 믿는가? 그 예수님을 난 강력히 여러분에게 추천한다. 이만한 친구 없다. 원츄~!!! 이 친구는 핸드폰으로 굳이 문자 보낼 필요도 없고 전화할 필요도, 이멜 확인도 필요없다. SNS의 방명록이나 게시판을 들락거릴 필요도 없다. 그 친구, 예수님은 우리 안에 계시기 때문이다. 그 예수님을 마음 속에 모시기만 하면 우리 안에 계시기 때문에 우리는 늘 그분과 함께 생활할 수가 있다. 그 분과 대화할 수 있다. 굳이 기도라는 용어를 붙이지 않더라도 우리는 그 분과 대화할 수 있다. 사람들이 미친 거 아니냐? 바보 똘아이 아니냐? 라고 할지 모르지만 우리는 우리 안에 친구 예수님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 예수님은 친구의 첫번째 특징인, ‘허물을 덮어주는데’는 도사이다. 그는 우리의 결점과 헛점과 약점과 핸디캡과 죄를 꼬집어 비난하고 고자질하고 욕하지 않는다. 그 분이 우리 죄를 다 까발리고 욕할라치면 뭐할려고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겠는가?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것과 죄를 용서하는 것은 별개가 아니다.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기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이지, 우리의 죄를, 우리의 허물을 책잡고 심판하시기 위해 십자가에 죽으신 것은 아니다. 

  이 좋으신 친구 예수님께 여러분의 죄를 고하고 용서를 구하라. 예수님, 여러분의 허물을 덮어주시는 멋진 친구이시다.

예수님 여러분의 죄를 용서해주시면서 말씀하실 것이다. ‘네, 내 친구 아이가~’

 

 

 

두 번째 구절을 살펴보자. 

(잠 17:17)친구는 사랑이 끊이지 아니하고 형제는 위급한 때까지 위하여 났느니라

[공동번역]잠 17:17 사랑이 한결같은 것이 친구다. 어려울 때 도우려고 태어난 것이 동기다.

[표준새번역]잠 17:17 사랑이 언제나 끊어지지 않는 것이 친구이고, 고난을 함께 나누도록 태어난 것이 혈육이다.

[현대인의성경]잠 17:17 변함없이 서로 사랑하는 것이 친구이며 위급할 때 서로 돕는 것이 형제이다. 

[KJV]잠 17:17 A friend loveth at all times, and a brother is born for adversity.

 

 

 

친구의 사랑은 한결 같은 사랑이다. 어떠한 것에 구애 받지 않는 순수한 사랑, 그것이 바로 우정, 진정한 Friendship이다.

 

친구를 향한 사랑이 끊이지 않아야 한다(17:17).  일시적인 충동과 욕구로 말미암아 잠시 친구에게 잘 해주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친구를 향한 마음이 끊이질 않는다는 것이다. 잠시 반짝했다가 사라지는 것은 현 시대의 증후이다. 액기스가 필요하다. 우정의 액기스! 친구를 항상 잘 대해주어야 한다. 그게 바로 친구이다. 친구는 특별한 하나님의 선물이다. 

 

 

 

 

제가 중2때 아주 친한 친구가 있었다. P는 00년 0월 0일+ 년 0월 00일=2000년 8월 17일 학교 앞 대구은행 건물 앞에서 약속을 했다. 앞으로 10년 후에 어떻게 될 지 모르는 가운데…. 하지만 우리는 그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 적어도 나는 그러했다. 이러한 우정은 참된 우정이 아니다. 친구를 향한 우정은 끊이지 않아야 한다. 여러분도 학창시절에 설익은 약속들 꼭 함 지켜 보라. 엄청난 행복과 축복이 여러분을 노크할 것이다. 난 그것을 뒤늦게서야 알았다. 후회스럽다. 학창시절의 우정을 계속 이어나가라! 요즘 TV 프로그램도 있지 않은가? ‘친구야, 반갑다!!!’ 참 감동적인 장면이다. 그것은 바로 우리 인생에 있어 ‘친구’는 참 멋진 우리의 동반자이기 때문이다. 여러분이 남은 그 31,025일 동안, (시간으로 따지면) 744,600시간, (분으로 따지면)44,676,000분 동안, (초로 따지면) 2,680,560,000초 동안 얼마 되지 않는 세월 가운데 말이다. 참, 여러분은 15살이 아니지 않는가? 더 빼야겠네…ㅋㅋ

 

 

 

 

  우리는 구약성경에서 아주 멋진 친구를 만나게 된다. 그 두 사람은 바로 누구? 바로 ‘다윗과 요나단’이다. 

 앞에서 이야기한 피시아스와 다몬을 방불케하는 우정의 사람들이었다. 다윗은 이스라엘의 2대 왕이 될 지명자the anointed였다. 그런데 아이러니칼하게도 요나단은 이스라엘 1대 왕, 사울의 아들, 즉 왕자였다. 왕이 왕자에게 왕위를 계승하는 것은 우리에게 당연한 순서이다. 하지만 이스라엘은 신정국가였기에 하나님의 뜻에 의해 이스라엘의 제2대 왕은 요나단이 아닌 다윗으로 지명되었다. 어쩌면 가장 원수될 법한 자리의 두 사람, 다윗과 요나단이 가장 절친한 친구가 되었던 것이다. 또 하나 두 사람의 친구관계가 대단해 보이는 것은 요나단의 아버지, 사울이 다윗을 무지막지하게 싫어하고 미워한 나머지 죽이려고 하였던 것이다. 왜? 사울은 자신의 왕위가 다윗에게 찬탈당할까봐 그것에 대해 신경을 바짝 쓰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한 긴장과 위기의 소용돌이 가운데서 두 사람의 우정이 싹틔웠던 것이다. 

 

[삼상 18:1-삼상 18:4]

(1)다윗이 사울에게 말하기를 마치매 요나단의 마음이 다윗의 마음과 연락되어 요나단이 그를 자기 생명 같이 사랑하니라

 (3)요나단은 다윗을 자기 생명 같이 사랑하여 더불어 언약을 맺었으며-아버지의 불합리한 행위에 대한 미안함과 친구에 대한 깊은 신뢰감으로 요나단은 아버지의 왕권보다, 자신의 왕권 계승과 자리매김보다 다윗을 더 사랑하였던 것이다. 

 

-또한 요나단은 아버지 사울의 추격으로 인해 피난길에 오른 다윗에게 신변의 안전과 안녕을 위해 어떻게 하였는가?

 

(4)요나단이 자기의 입었던 겉옷을 벗어 다윗에게 주었고 그 군복과 칼과 활과 띠도 그리하였더라

 

여러분이 사무엘상을 읽어보면 알겠지만, 요나단과 다윗의 우정은 한결같았다. 이러한 한결 같은 우정이 우리 안에 많았음 좋겠다. 여러분에게 이러한 우정이 넘쳐났음 좋겠다. 그러기 위해선 한결같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여러분 좋고 편한대로 하고 싶은대로 다 하고 살면 결코 친구들이 여러분 곁에 머물지 않을 것이다. 한결 같은 맘으로 멋진 우정을 만들어 보라!!!

 

 

또한, 친구가 많다고 다 좋은 것은 아니라고 말하는 것이 보편적인 진리이다. 이를테면,

얼굴을 알고 지내는 사람은 얼마든지 많으나마음을 알고 지내는 사람은 얼마 되지 않는다.내 얼굴을 아는 백 사람을 사귈 바에야내 마음을 이해해 주는 단 한 명의 친구가 낫다. 고 한 격언도 있을 뿐만 아니라

 

 

 

 (잠 18:24)많은 친구를 얻는 자는 해를 당하게 되거니와 어떤 친구는 형제보다 친밀하니라

 

 

사랑이 끊이지 않는 친구, 그런 멋진 친구를 만들어 보라. 그리고 여러분들이 바로 그러한 멋진 친구가 되라!!!

관계의 장벽-돈Money

 

(잠 14:20)가난한 자는 그 이웃에게도 미움을 받게 되나 부요한 자는 친구가 많으니라

[잠 19:4-잠 19:7]

(4)재물은 많은 친구를 더하게 하나 가난한즉 친구가 끊어지느니라(5)거짓 증인은 벌을 면치 못할 것이요 거짓말을 내는 자도 피치 못하리라(6)너그러운 사람에게는 은혜를 구하는 자가 많고 선물을 주기를 좋아하는 자에게는 사람마다 친구가 되느니라(7)가난한 자는 그 형제들에게도 미움을 받거든 하물며 친구야 그를 멀리 아니하겠느냐 따라가며 말하려 할지라도 그들이 없어졌으리라

[공동번역]잠 19:4 부유하면 벗이 많아지지만 옹색하면 있던 벗도 멀어진다.

[표준새번역]잠 19:4 재물은 친구를 많이 모으나, 궁핍하면 친구도 떠난다.

[현대인의성경]잠 19:4 부유하면 새로운 친구가 계속 늘어나지만 가난하면 있던 친구도 떠나고 만다. 

[KJV]잠 19:4 Wealth maketh many friends; but the poor is separated from his neighbour.

 

 

 

- 우정에 있어서도 부함과 가난함은 좌지우지 된다. 인간사에 있어 부요함이 참으로 인간에게 많은 영향력을 끼치는데 이러한 정신적인 영역에도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 가난하면 친구가 사라지고 끊어진다. 

 

(표준새번역)가난한 사람은 이웃에게도 미움을 받지만, 부자에게는 많은 친구가 따른다.

 

돈과 관계된 그래서 이익과 손익 분기점을 따지는 우정이라는 부위에 대해서 성경은 참으로 신랄한 통찰을 제공한다. 

이것은 세속적인 우정의 실체이다. 손과 익을 따지면서 접근하면 인간관계, 친구관계에 무슨 의미와 무슨 능력이 있겠는가?

세상사람들도 다 그렇게 친구를 사귀면서 친구 덕을 좀 보면서 소위 ‘백’을 하나 더 만들려고 하는 것은 아닌가?

 

 

 

♠ If you want to lose your friend, grant him a loan. - Russia(친구를 잃고 싶거든 돈을 꾸어 주라.)

♠ Go to thy rich friend's house when called ; go uncalled to thy poor friend's house. - India(부자인 친구에게는 초대되면 가고, 가난한 친구에게는 초대되지 않았을 때 가라.)

♠ Be friends with a man's goodness and not with his wealth. - China(그 사람의 선량성으로 해서 친구는 되되, 그 사람의 부로 해서 친구는 되지 말라.)

Lend your money and lose your friend. (돈을 빌려주면 친구를 잃는다.) 금전관계의 어려움을 경계하는 속담이다. 셰익스피어는 그의 작품 '햄릿'에서,Neither a borrower nor lender be, For loan oft loses both itself and friend.(돈을 빌리지도 빌려주지도 말지어다, 금전의 대여는 돈과 친구를 둘 다 잃기 쉬운 까닭이니라.) 라고 말하고 있다.위와 같은 내용을 뒤집어 말한 속담으로는,

 

Short debts make long friends. (빚을 빨리 갚으면 우정은 오래 간다.)

 

 

 

여러분들은 절대 ‘돈’문제로 인해 친구를 잃지 않았음 한다. 성경의 수많은 말씀, 수 많은 세상의 격언과 속담이 그걸 말해주고 있다. 특히 한동안 문제가 많았던 ‘카드값’의 주인공, ‘카드’도 절대 빌려줘선 아니 된다. 여러분과 관계없는 이야기지만 미래를 위해 미리 교육시키는 것이다. 돈이나 카드를 빌려주면 그 친구를 잃는다고 생각하고 행동하라! 

 

 

 

 한결 같은 사랑의 친구를 한 명 소개하고자 한다. 누군지 다 눈치를 채셨나? 바로 예수님이시다.

그 예수님은 태초부터 우리를 지으신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의 성자 하나님이시고 지금도 우리와 함께 하시는 멋진 친구이시다. 그 분의 우릴 향한 마음과 관심과 기대와 소망과 사랑은 남다르다. 그 마음 때문에 전세계의 모든 기독인들이 그 분을 섬기며 살아가고 있다. 신실하시고 변함이 없으신 예수님의 사랑은 우리가 살아가야 할 앞으로의 날들, 그 31,025일 동안, (시간으로 따지면) 744,600시간, (분으로 따지면)44,676,000분 동안, (초로 따지면) 2,680,560,000초 동안 끊임없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친구로 곁에 계실 것이다. 그 예수님은 우리 뿐만 아니라 과거의 수많은 사람들, 현재의 수많은 사람들, 미래의 수많은 사람들과 인격적인 관계를 맺으시면서 한결같이 우리를 향한 자신의 사랑을 표현해 주셨고, 주시고 계시며, 주실 것이다. 

 

 

 

 

그리스도의 사랑, 그것이 우리의 우정의 본질적인 면을 고려한 것이기도 하다. 하나님과 우리는 결코 끊어질 수 없는 우정의 관계에 놓여 있기 때문이다.

 

 

(롬 5:8)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당신은 최근에 친구 때문에 손해를 입어 상처를 받았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적어도 예수님은 친구에게 배신을 당하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이해하신다(눅 22:1-6, 47-53). 혹은 당신이 친구에게 손해를 입힌 장본인일 수도 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 용서를 구하고(정말 미안한 마음이 있다면) 화해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보라.

한 가지 확실한 한 것은, 예수님께서 친구관계에서 당하는 모든 어려움들을 총체적으로 다 겪어보신 삶의 애환의 베테랑이시라는 것이다. 그 예수님께서 고난의 최정점인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한결같이 우리를 사랑하신다.

 

 

[눅 22:1-눅 22:6]

(1)유월절이라 하는 무교절이 가까우매(2)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예수를 무슨 방책으로 죽일꼬 연구하니 이는 저희가 백성을 두려워함이더라(3)열 둘 중에 하나인 가룟인이라 부르는 유다에게 사단이 들어가니(4)이에 유다가 대제사장들과 군관들에게 가서 예수를 넘겨 줄 방책을 의논하매(5)저희가 기뻐하여 돈을 주기로 언약하는지라(6)유다가 허락하고 예수를 무리가 없을 때에 넘겨 줄 기회를 찾더라

 

 

[눅 22:47-눅 22:53]

(47)말씀하실 때에 한 무리가 오는데 열 둘 중에 하나인 유다라 하는 자가 그들의 앞에 서서 와서(48)예수께 입을 맞추려고 가까이 하는지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유다야 네가 입맞춤으로 인자를 파느냐 하시니(49)좌우가 그 될 일을 보고 여짜오되 주여 우리가 검으로 치리이까 하고(50)그 중에 한 사람이 대제사장의 종을 쳐 그 오른편 귀를 떨어뜨린지라(51)예수께서 일러 가라사대 이것까지 참으라 하시고 그 귀를 만져 낫게 하시더라(52)예수께서 그 잡으러 온 대제사장들과 성전의 군관들과 장로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강도를 잡는 것같이 검과 몽치를 가지고 나왔느냐(53)내가 날마다 너희와 함께 성전에 있을 때에 내게 손을 대지 아니하였도다 그러나 이제는 너희 때요 어두움의 권세로다 하시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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