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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요나

요나 1장 강해, 요나의 도피-'나를 들어 바다에 던지라'

by Message.K 2021. 10.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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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론....

감리교의 창시자 요한 웨슬레는 선교사로 조지아에 갔었고, 돌아오는 길에 대서양에는 무서운 폭풍우가 몰아쳤다. 웨슬레는 두려워했지만 함께 있던 모라비안 교도는 두려워하지 않았다. 요한 웨슬레는 마음의 찔림과 함께 ‘저 사람들은 내게 없는 무엇인가를 가졌다’는 것을 시인해야만 했다. 그들은 참된 그리스도인들이었다. 그들의 가르침으로 웨슬리는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것에 관하여 들었다. 그런 후에 런던으로 오게 되었다. 그리고 올더스케이트 가에서 그 때까지 머리로 알고 있었던 것을 마침내 마음으로 느끼게 되었다. 그 후 그가 제공한 신학적 설명에는 다음과 같은 선언이 포함되어 있다.

 

“그 이전에도 나는 그리스도인이었지만,

나는 종의 믿음을 가졌을 뿐 아들의 믿음을 가지지 못 하였다.”

 

 요한 웨슬레가 배를 타고서 만난 이 거대한 폭풍우의 체험은 그에게 있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더하게끔 하였다. 예전에 머리로만 알던 것을 가슴으로 느끼게 된 사건이다. 요한 웨슬레가 만났던 이 어마어마한 자연 현상 즉 폭풍우는 그 구약시대의 한 인물, 우리가 주일학교 때부터 귀에 딱지가 앉도록 수없이 많이 들어왔던 오늘의 설교무대의 주인공 ‘요나’에게도 일어났던 것을 볼 수 있다. 두 인물의 상황의 차이라면은 요한 웨슬레는 자신의 선교사역을 마무리하고 고향으로 돌아오는 귀향길에서 광풍을 만났고, 요나는 하나님의 준엄한 선교사역을 채 해 보지도 않고, 헌신을 다짐하기는커녕 도망가는, 도피하는 행각 속에서 위험천만한 바다의 풍랑을 만났다는 것이다. 이처럼 한 사람이 하나님을 만나는 방법은 다양하다. 성경은 이러한 많은 하나님과의 만남의 장면을 우리에게 제공하고 있다. 엘리야처럼 그가 로뎀나무 아래에서 삶에 지쳐 피곤과 무기력과 절망감에 사로잡혀 있을 때 하나님은 그를 만나 주시기도 하고 기드온처럼 미디안 족속들의 끊임없는 약탈행위를 두려워한 나머지 동굴에서 곡식을 타작하고 있을 때 하나님의 소명을 받는 경우도 있다. 그 외에도 많은 경우의 상황이 있을 것이다. 여러분에게 하나님이 만나주셨던 그 정황도 또한 다양할 것이다.

 

 

 

  오늘 우리는 우리들의 유년시절에 있어 성경이야기를 하다가 ‘물고기’하면 바로 떠올랐던 인물, 그 유명했던 우리의 추억과 기억 속의 사람<요나>를 만나게 될 것이다. 그가 우리들의 어린 시절의 재미있는 성경동화에서 수 없이 등장했던 그 유명세와 명성은 우리가 오늘 본문을 대하면서 그 빛이 바래어질지도 모른다. 왜 그런가? 왜냐하면 그것은 요나서의 처음 시작하는 부분부터 별로 좋지 않기 때문이다. V.1하나님의 말씀이 요나에게 임했다. 그리고서 그에게 하나님의 선교사역, 이방인들에 대한 하나님의 광대한 관심과 사랑을 전하는 도구로서 그 요나에게 소명이 부여되어졌다. 요나가 먼저 하나님을 찾은 것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이 먼저 한 사람에게 말씀하셨다. 자연인으로 태어나 어머니의 탯줄을 끊고 나와 학습하고 그러다가 생계의 책임을 질만한 그 어떤 직업에 종사하던 중에 결혼하고 애 낳고 기르고 하다가 결국 자연스럽게 흙으로 돌아가는 그 보잘 것 없고도 하찮은 인생에 하나님이 먼저 우리를 찾아오신 것처럼 이 요나에게도 하나님이 먼저 말씀하셨다.

 

 

 

  V.1...아밋대의 아들 요나...

이 얼마나 평범한 설명인가? 아들은 아비의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고 그 아비의 핏줄을 따라서 한 세기나 한 시대를 숨 쉬다가 무덤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 우리 사람들의 보편적인 법칙이다. 그러한 자연인을 보실 때에 하나님은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재물이나 사회적인 지위나 명성, 성공의 여부나 아니면 그 자식들은 무슨 대학을 나왔고 올해의 이 어려움의 세파속에서도, 다들 ‘취업 대란’의 위기 속에서 허우적거리고 있을 때 코흘리개 어린아이에게 물어봐도 잘 알 수 있는 대기업에 당당히 취업했는지 뭐 이런 것들을 보시지 않는다는 것이다. 하나님에게 사람들은 다 똑같을 뿐이다. 누구의 아들, 누구의 아들....아밋대의 아들에 불과한 요나라는 것이다. 죄인의 아들, 그 죄인에게 하나님이 찾아오신 것이다. 그리고서 하나님은 요나에게 요나가 감당해야 할 사역을 말씀하시고 계신다. 그것은 다름 아닌 니느웨 선교였다. 그 당시 유대인들은 -물론 지금의 유대인들도 그렇지만-선민사상, 즉 자기 백성들만이 하나님의 구원을 받는다는 특별한 우월의식 속에서 있었다. 그런 의식이 팽배한 민족의 아들인 요나에게 하나님의 이러한 선교사명은 자신의 생각에는 타당치 않았을 것이다.

 

(2)너는 일어나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그것을 쳐서 외치라 그 악독이 내 앞에 상달하였음이니라 하시니라

 

 

V.2너는 일어나 ...가서...쳐서 외치라....성경에 자주 등장하는 동사....일어나

하나님이 선지자들에게 소명을 주실 때에 자주 등장하는 동사이다.

 

 

수1:2...내 종 모세가 죽었으니 이제 너는 이 모든 백성으로 더불어 일어나 이 요단을 건너 내가 그들 곧 이스라엘 자손에게 주는 땅으로 가라..

 

하나님께서 요나에게 니느웨 선교를 명령하시면서 그 뒤에 덧붙이시는 말씀이 있다. 그것이 무엇인가?

 

 

....그 악독이 내 앞에 상달하였음이니라...

  하나님의 성품이 드러난다. 죄에 대해선 끊임없이 분노하시고 참지 못하시는 의로운 분이심을 볼 수 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공의이다. 때때로 우리는 사랑의 하나님과 공의의 하나님을 구별 짓는다. 그러나 두 가지 속성 모두가 바로 하나님의 성품이다. 마치 동전의 양면처럼...그러나 하나님의 이러한 죄에 대한 의로운 분노는 항상 이중적이다. 이 말이 무슨 말이냐 하면 하나는 하나님 앞에서 그 악독이 가득하면 하나님이 반드시 심판하신다는 사실이고, 또 하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바는 세상이 심판과 멸망을 당하는 것이 아니라 회개하고 구원 얻는 것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이러한 죄에 대한 질책과 분노의 그 배후에는 반드시 하나님께서 죄인들을 애타게 찾으시며 기다리시는 사랑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기에 이 요나라는 인물을 보내시어 회개를 촉구하려고 하시는 것이 아닌가? 하나님께서 애초에 세상에 대한, 죄인에 대한 아무런 관심이나 애착이 없었다면 예수 그리스도조차도 보내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하나님은 죄인들을 향한 뜨거운 가슴과 열정의 사랑을 지니신 분이시다. 그 분이 우리의 아버지이시다. 그러기에 그는 역사적으로 죄인들을 구원하기 위해 많은 하나님의 사람들을 보내고, 보내고 또 보내었던 것이 아닌가? 그 많은 하나님의 보냄의 역사 중에서 오늘 그 사역의 출발지에 서야할 사람, 그 이방인의 선교를 위한 주자가 바로 요나인 것이다.

 

 

니느웨에 대한 두 가지 사실...

❶ 니느웨가 보통 큰 도시가 아니었다는 사실. 요즘에는 대도시가 워낙 많아서 웬만한 도시는 크게 보이지도 않지만, 옛날에는 인구가 1만명이 채 못 되는 곳도 큰 도시였다. 그런데 니느웨는 어린아이만 12만 명이 넘었다. 아마 어른 인구까지 합치면 100만명을 넘었을 것이다. 니느웨는 이처럼 거대한 도시였다.

 

❷ 또한 니느웨는 아주 악한 도시였다. 얼마나 악독했는지, 그 악독이 하나님 앞에 상달될 정도였다. 참는 수준을 지나친 상황이었다. ‘하나님 앞에 상달되었다’는 것은 히브리인들이 쓰는 독특한 표현으로서, ‘이제는 더 이상 봐주려고 해도 봐줄 수가 없다.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물론이고 인간들이 보기에도 참을 수 없을 정도로 죄가 쌓였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그냥 멸망시켜 버리면 되지 않는가? 하나님은 왜 굳이 요나를 보내시어 그 죄를 책망하게 하시는가? 여기에는 그들을 멸망시키지 않고 응급조치를 해서 살리시겠다는 의미가 들어 있다. 일단 말씀이 귀에 들리기 시작한 사람은 망하지 않는다. 오히려 너무 일이 잘 되어서, 너무 잘 나가고 너무 잘 되어서 말씀 들을 시간과 여유가 없는 사람이 망한다. 예배 시간에 와서 앉아 있지만 설교 한 마디도 귀에 들어오지 않을 때 망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멸망시키기로 작정하시면 무엇보다도 말씀의 은혜를 거두신다.

 하나님은 인구가 많은 대도시인 니느웨라는 성읍에 한 번 더 기회를 주신다. 마지막 찬스를 요나를 통해 주시기를 원하신다.

  그러나 요나는 어떻게 반응하고 있는가?

 

 

V.3은 접속사 ‘그러나’라는 말로 시작되고 있다. 그러나..하나님의 마음이 이러한데,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셔서 죄인들의 죄의 굴레를 덜기 위해, 풀어주시기 위해 사역을 준비하셨는데 요나는 그러나....여호와의 낯을 피하려고 일어나 다시스로 도망하려 하여 욥바로 내려갔더니....그는 하나님의 선교사역을 위해서 일어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역에서 도피하기 위해 일어났던 것이다.

 

 

사람들에게 있는 아이러니한 현실...‘우리 편은 한 명도 죽으면 안 되지만 악당은 아무리 많이 죽어도 상관없다’는 생각이 자리 잡고 있다. 나에게 중요한 사람은 조금만 고통을 받아도 가슴이 찢어질 듯 아프지만, 나에게 중요하지 않은 사람은 아무리 큰 고통을 당해도 별로 대수롭지 않게 생각한다는 것이다.

 

  탈레반에 의해 아프카니스탄에서 피랍된 23명의 지체들 중 인솔자 배형규목사가 살해당하고 아직 22명의 인질들이 잡혀 있다. 한국교회에서 고신교단은 그리 큰 교단이 아니다. 군소교단이다. 그 고신교단에 그래도 영향력있는 교회 ‘분당샘물교회’에서 파송된 단기선교팀의 사건이다. 우리가 우리와 관계없는 일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가까운 곳에서의 일이다. 우리가 만약 내가 모르고, 내 관심 밖의 일이라고 해서 외면한다면 그것은 ‘도피하는 요나’와 같은 모습이다.

 

  하나님은 말씀하신다. ‘이스라엘 백성들 너희만 사람이 아니라 니느웨 백성들도 내 형상대로 지음 받은 사람들이다. 나는 그들을 사랑하며, 그들을 구원하기를 기뻐한다’...

우리에게는 우리가 중요하지만 하나님께는 인간 한 사람 한 사람이 다 중요하다. 하나님은 니느웨에 요나를 보내심으로써 이스라엘 백성들의 잘못된 우월감과 선민의식을 까부시고자 하신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들이 니느웨 사람들보다 완악하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얼마나 많은 선지자들을 보내셨는가? 그래도 그들은 회개하지 않았다. 반면에 니느웨 성은 요나의 설교 단 한 번에 뒤집혀 버렸다. 석호필의 ‘한방승부’!!!

 

아마 열 두 소선지자 가운데 요나는 신앙적으로나 신학적으로 가장 수준이 낮은 선지자라는 비난을 면하지 못 할 것이다. “여호와의 낯을 피하여”라는 말은 천하만국, 삼라만상을 다스리시는 하나님이시라는 구약의 이해와 배치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시139;7-10)...내가 주의 신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 내가 하늘에 올라갈지라도 거기 계시며 음부에 내 자리를 펼지라도 거기 계시니이다 내가 새벽 날개를 치며 바다 끝에 가서 거할지라도 곧 거기서도 주의 손이 나를 인도하시며 주의 오른손이 나를 붙드시리이다

새벽날개...빛의 속도, speed

 

 

요나는 아마도 하나님에 대한 이해를 단지 ‘지역신(Local God)정도로 생각한 것 같다. 요나는 세상을 신들이 그 지역을 분할하여서 주권을 행사하고 통치한다는 편협한 신(神)개념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다. 이러한 사고방식은 그 당시 이방인들의 신관이었다. 하나님께로부터 부르심을 받고 체험적인 소명의 사건을 거친 선지자가 이 같은 이방적인 신관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신앙으로써 세속적인 관점과 가치관을 버리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보여준다. 그러나 요나 선지자의 이 같은 생각은 얼마나 어리석은가? 그는 어둠 속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알고 계시며 아무도 볼 수 없는 마음, 무의식과 의식적인 모든 차원가운데서 발생하는 악한 생각을 헤아리시는 분이시다.

 

요나는 끊임없이 하나님의 낯을 피하려고 도망치고 있다.

 

 

“피할 수 있을 때까지 피해보라. 피할 수 있다면 그것은 소명이 아니다.”

-찰스 스펄젼

 

 

“여호와의 낯”은 우선적으로 성전을 가리키는 표현이다. 그러나 북쪽 이스라엘에는 진정한 의미의 성전이 없다. 여기에서 ‘여호와의 낯’은 가나안 지경을 가리키는 표현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이 가나안 땅 구석구석을 살피고 계신다’는 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이런 맥락에서 요나도 가나안 땅만 벗어나면 여호와의 낯을 피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하나님은 도망칠 계획을 세워 실행하는 요나를 보면서도 가만히 계신다. 왜 가만히 계시는가? 요나는 결국 얼마있지 않아 여호와의 낯을 피할 수 없다는 사실을 곧 알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어디를 가도 하나님의 눈앞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도망쳐서 꼭꼭 숨어버리면 찾지 못하는 것이 세상의 범죄자들이기에 탈주자를 찾는 경찰이나 형사들은 더 혈안이 될 수밖에 없지만 하나님은 상황이 다르지 않은가?

 

 

요나는 왜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하기로 결심했는가? 니느웨 사람들이 회개하는 것이 싫었기 때문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받아야 할 하나님의 은혜가 악한 자들에게 넘어가는 것이 싫었기 때문이다. 앗수르는 이스라엘에게 많은 고통을 준 나라였다. 그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수 없이 죽이고 잡아갔다. 물질적, 경제적인 심각한 타격도 주었다. 그런데 왜 굳이 그들을 찾아가 회개시켜야 하는가? 가만히 두면 저절로 망할 텐데, 왜 제 발로 찾아가서 그들을 살려내고 재무장시켜 자기 백성을 멸망시키게 해야 하는가?

 

  하나님께 사용되는데 가장 중요한 조건 중에 하나는 마음의 상처가 치료되는 것이다. 마음의 상처가 치료되지 않으면 나에게 상처를 준 사람들의 발을 씻어 줄 수가 없다.

  하나님은 누구에게 우리를 보내시는가? 우리가 가장 가기 싫어하는 사람들에게 보내신다. 나의 여러 가지 문제들은 하나님께 맡기고, 내가 싫어하는 그 사람들을 찾아가 그들을 살리는 일부터 하라고 하신다. 왜 그렇게 하시는가? 그것이 하나님의 사랑이기 때문이다.

 

  세리였던 마태 사도는 유대인들로부터 심한 마음의 상처와 굴욕을 받았다. 하지만 자신을 가장 아프게 했던 그 사람들을 위해, 그 유대인들을 위해 마태복음을 집필했다.

  우리는???

 

  요나는 하나님의 기지국이 없는 다시스로, 하나님의 통화불능지역이라고 생각하는 도시로 떠나고자, 피하고자 한다.

요나에게는 영적 교만이 있었다.

 

 

 

 

살리에리와 모차르트(살리에리의 영적 교만)

살리에리식 믿음-자신을 위해 믿음도 도구화!!!

 파이프 오르간의 장엄한 프레류드가 연주됩니다. 한 소년이 진지한 모습으로 기도합니다. 두 손은 가지런히 모아졌고 초롱초롱한 두 눈은 십자가에 달려 고통 당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한참 동안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이윽고 조그만 입술이 움직입니다.

 

"사랑의 주님,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저에게 음악적 재능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 재능을 통하여 저의 이름이 세상에 널리 퍼지게 해 주세요. 하나님을 더욱 더욱 찬양하겠습니다."

 

그의 기도 덕분인지 그는 음악가로서 점차 유명해지기 시작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와 교제하기를 원했습니다. 각지에서 몰려온 재능 있는 젊은이들이 그에게 사사받기를 원했습니다. 그는 이제 비엔나의 사교계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는 성공한 음악가가 되었습니다.

 

 그의 특기인 이태리 오페라는 왕을 비롯하여 모든 귀족들의 사랑을 받고 있었습니다. 그는 여유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자신만만하였습니다. 음악에 관한 한 누구도 그를 따라올 자가 없을 것 같았습니다.

 

   사실 시골에서 올라온 이 청년이 비엔나에서 갑자기 두각을 나타내기 전까지는 그의 명성은 영원할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풋나기 시골 청년 하나가 이제껏 쌓아 올렸던 그의 명성을 우습게 만들었습니다.

  그 청년은 무례했고 비도덕적이었으며 유치한 말과 행동을 거리낌없이 해댔습니다. 지위의 고하나 장소의 분위기에 전혀 상관하지 않았습니다. 교만하기 이를 데 없고 이기적이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음악은 천재적이었습니다. 누구도 무시할 수 없는 재능과 기술이 있었고 보통 사람의 상상을 초월하는 음악적 감각과 풍부한 악상이 있었습니다.

 인기 정상에 있던 살리에리는 잘쯔부르그에서 온 모짜르트의 갑작스런 출현으로 인하여 당황하기 시작합니다. 그는 다시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하나님, 어떻게 저런 무례하고도 비도덕적인 인간에게 그토록 귀한 음악적 재능을 많이 주셨습니까? 저는 저 청년처럼 그렇게 나쁜 말을 하지도 않고 또 나쁜 장소에도 가지 않습니다. 하나님, 나에게 더욱 많은 재능을 주셔야 하지 않습니까?"

 

그의 기도는 원망으로 바뀌었습니다. 모짜르트의 등장으로 살리에리의 음악은 어린아이의 장난처럼 우습게 되어버렸습니다. 살리에리 자신도 모짜르트의 악보를 보고 있노라면 그의 천재성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불평은 분노로 바뀌었고 마침내 그는 서재에 걸어놓았던 십자가를 떼어 벽난로의 불꽃 속으로 던져 버렸습니다. 그리고 그의 원수(?)인 모짜르트를 죽이기 위하여 음모를 꾸밉니다. 모짜르트의 성격과 그의 어려운 환경을 교묘히 이용하여 레퀴엠(Requiem: KV.626)을 쓰는 동안 과로로 죽게 만듭니다. 하나님을 떠나고 동료 음악가를 죽음으로 몰고 가는데 성공한 살리에리는 마침내 자신의 인격도 파괴되어 정신병동에서 비참한 죽음으로 자신의 생을 마감합니다.

  이상은 ‘아마데우스AMADEUS’의 영화의 줄거리입니다. 이 영화의 내용 중에는 사실보다는 작가의 상상력이 발휘된 부분이 꽤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전혀 터무니 없는 근거에서 씌여진 각본은 아닙니다.

 

  살리에리(Antonio Salieri: 1750-1825)는 당대 비엔나에서 유명한 오페라 작곡가였으며한때 베토벤이 성악 작곡법을 사사받기도 할 정도로 실력이 있는 음악가였습니다. 그의 명성은 잘쯔부르크 촌에서 올라온 모짜르트에 의해 충분히 손상을 받았습니다.

   

 당대 유명했던 한 음악가의 생애가 왜 비극적으로 끝나게 되었을까요? 하나님은 왜 그의 기도에 응답하지 안는 듯 보이실까요? 살리에리의 근본적인 문제는 무엇입니까? 살리에리의 문제는 과연 그 자신만의 문제일까요?

 

  살리에리의 비극은 자기 자신의 세속적 욕망과 하나님에 대한 잘못된 인식에서 비롯되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믿는 것 같지만 자기의 재능을 더 믿었습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 같지만 사실은 하나님의 능력을 이용하여 자신의 영광을 구하고자 하는 세속적 욕망이 그의 마음 가운데 숨겨져 있었습니다. 영적 교만이 또아리를 틀고 있었다.

 

  그의 숨겨진 세속적 욕망을 하나님께서 모르실 리가 없습니다. 그는 세상으로 향하던 그의 마음을 겸손히 돌이켰어야 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를 구했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살리에리는 자신의 죄악에 대한 회개는 생각도 못하고 하나님만을 원망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존재를 무시해 버렸습니다. 하나님의 존재를 부인하는 순간 사탄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그의 마음 가운데 자리를 잡았습니다. 그의 인생에서 비극이 시작되는 순간입니다.

 

 

  저는 하나님을 믿는다고 생각하는 많은 사람들이 살리에리식의 믿음을 갖고 있지 않나 생각해 봅니다. 특히 음악을 하는 많은 사람 중에 그의 재능으로 온전히 하나님을 찬양하기보다는 하나님이 주신 재능을 통하여 나 자신의 영광을 구하고자 하는 숨은 욕망이 있는 사람들을 많이 봅니다.

  그 사람들은 사신 하나님을 온전히 믿을 수도 없으며 찬양할 수도 없습니다. 연주performance는 할지언정 찬양Praise은 할 수 없습니다. 찬양한다고 착각하고 있을 뿐입니다.

  이러한 사람들은 사신 하나님과 인격적인 관계를 맺기 위하여 많이 노력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누구인지 잘 알지 못할 때 나와 하나님과의 관계는 피상적인 관계가 됩니다. 그때 나는 하나님을 나의 경배 대상이 아니라 내 연주의 청중들 중 하나로 착각하게 됩니다. 하나님과 나의 생명의 관계가 튼튼하게 맺어져 있어야 나는 하나님을 올바로 찬양할 수 있습니다. 최 혁, 나의 찬송을 부르라(서울: 규장, 2001), 25-28.

 

 

  이런 영적 교만의 선봉장인 요나는 자신의 소명으로부터 도피길에 오른다.

근데 요나가 도망칠려고 하니 상황도 발 맞추어 따라주고 있다. 욥바로 내려가서 다시스로 갈려고 하는 배를 탈려고 하니 ‘마침’ 배가 있었다는 것이다.

 

 

...마침 다시스로 가는 배를 만난지라 여호와의 낯을 피하여 함께 다시스로 가려고 선가를 주고 올랐더라...

...앗싸! 아다리!!!

 

그의 도피길은 순조로웠다. 자신의 소명을 역행하는 길임에도 불구하고 순탄했다. 여기서 우리가 주의해야 할 것은 원문에서는 이 ‘내려갔다’라는 동사가 무려 4번씩이나 등장하고 있다.

 

 

V.3욥바로 내려갔더니.....배에 올랐더라(원문/내려갔다)

  다시스까지 가는 배삯은 결코 싸지 않았을 것이다. 요나는 죄를 짓기 위해 대단히 비싼 대가를 지불했다. 타락은 절대 공짜가 없다. 타락하려면 돈이 제법 많이 든다?...하나님의 백성이 타락만 하지 않으면 돈 쓸 일이 그렇게 많지 않다.

dr'y:

발음 : {yaw-rad'} : 야라드

어원(기원) : 기본어근

TWOT : 909

품사 : 동사

파생어: 없음

  '내려오다'(문자적으로 '내려가다'; 인습적으로 해안, 경계, 적진지 등의 낮은 지역으로 내려가다; 또는 상징적으로 떨어지다); 사역동사로 '내려가게 하다'(위의 모든 적용에서):- ×풍성하게, 데리고 내려오다, 운반해 오다, 들어내리다, 내려 놓다(내려오게하다, 내려�

  1)내려가다, 내려오다, 아래로 향하게 하다, 아래로 행진하다, 가라앉다

 

 

...V.5...배 밑층에 내려가서...2:6....산의 뿌리까지 내려갔사오니

 

  깊은 산골이나 지하나 바다 먼 곳으로 가면 휴대폰이 잘 터지지 않을 수 있다. 요나는 그랬다. 휴대폰 통화지역을 벗어나 휴대폰 통화불능지역으로 내려가고 있었다.

 

 

  오늘날 많은 현대인들의 영상과 잘 맞물리는 것 같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도외시한 채 끊임없이 내려가고 있다. 아무도 침범하지 않은 은밀한 공간 속으로 도피하는 요나처럼 현대인들도 그렇게 도피하고 있다. 노래방, 비디오DVD방, 텔레쿠라(음란전화방)라는 일본식 전화방이 그 모태인 전화방, 편의점과 실내포장마차를 합친 편의방, 남성동성연애자들을 상대로 한 휴게실인 남성방, 여성전용 술집인 제비방, 안마기계에 앉아 새소리나 물소리를 들으면서 스트레스를 푸는 안마방, 교외에 나가지 않고도 삼림욕을 하듯 산소마스크를 이용, 신선한 산소를 마실수 있는 산소방, 멀티미디어와 방 산업의 결합형태인 멀티방, 차 한잔을 마시면서 인터넷을 통한 정보산책을 할 수 있는 인터넷방, 룸 싸롱/ 끊임없는 은밀한 방과 공간을 찾아서 많은 사람들이 지하로, 어두운 뒷골목으로, 컴퓨터 화면 속으로, 브라운관 속으로, 음악 속으로, 시끄러운 소음 속으로 내려가고 있다. 도피하고 있다.

 

 

현대인들은 아니 우리들은 뭔가 조용히 혼자 있기를 얼마나 두려워하는지 모른다. 자기 자신의 실체와 마주 대하기를 꺼리는 나머지 자꾸만 도피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다름 아닌 내려가는 삶이다.

 

 

   ...올라가는 삶이 아니라 내려가는 삶이 요나의 특징이었다.

  그가 선지자임에도 불구하고 계속적으로 내려가는 다운, 다운, 다운, 그러다가 따운되지는 않을지 두려울 정도이다. 그가 하나님의 낯을 피하면 피할수록 밀려들어 침체로 인해 그는 배 밑으로 내려갔을 때 무엇을 하고 있는가? ->우리 교회의 음울한 상황

 

 

 

V.5..그러나 요나는 배 밑층에 내려가서 누워 깊이 잠이 든지라...우리가 피하면 피할수록 더 디프레스 된다. 하나님의 소명에 불순종한 결과는 게으름과 나태와 침륜의 가라앉음이었다. 그는 정직하게 자신의 존재와 대면하기를 거부하면서 모든 것을 잊고자, 망각하고자 잠을 청했다.

-...제일 핑계대기 쉬운 게 바로 ‘잠’이 아닐까?

잠을 잘 못 자서, 늦잠을 자서, 잠이 모자라서, 밤을 새서, 잠이 모자라서 제 컨디션이 아니다...등등...

 

 

  LXX70인역에서는 “코를 골면서 잤다”라고 번역하고 있고, 마르틴 루터는 요나의 이러한 잠에 대해서 주석하기를 “그는 죽음의 잠을 잤다”라고 했다. 그가 가진 하나님께 대한 죄책과 불순종에 대한 겸연쩍음이 그를 이렇게 만들어가고 있다. 그의 존재가 한 없이 하나님을 떠나 가라앉고 있을 때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었는가? 그가 타고 있던 그 다시스로 가는 배도 가라앉을 위기에 놓였다. 지금 밖은 온통 난리가 났는데 하나님의 사람, 요나는 잠을 자고 있다. 이런 그를, 요나의 불순종에 대해 하나님은 침묵하시지 않으셨다. 그 분은 자연현상을 통해서라도 한 사람을 돌이키게끔 노력하시는 모습이 드러난다. 요나는 모든 것, 하나님에 대해서도 소명에 대해서도 잊어버리고 망각해버리고자 잠을 청함으로 몸부림치고 있을 때 하나님은 그런 잠자는 요나를 깨우고 다시 하나님의 원대한 사역을 감당시키기 위해 몸부림치고 계신다.

 

  하나님으로부터 도망치는 요나를 끝없이 추적하시는 하나님을 보라. 마치 숨바꼭질 같다. 이것이 인간의 역사이며 죄인의 역사인 것이다. 하나님의 그 추적은, 하나님의 그 추격은 폭풍을 몰고서 요나에게로 오고 있다.

 

 

..V.4...여호와께서 대풍을 바다 위에 내리시매...배가 거의 깨어지게 된지라

우리가 어린 시절 냇물이나 고인 물에다 종이로 접은 배를 띄워놓고 물결을 치게 할 때가 있다. 그러면 배가 심하게 흔들린다. 하나님 앞에서 다시스로 가는 종이배를 탄 요나, 그 요나를 흔들어 깨우시는 하나님을 보라!!!

이런 것도 모르고 망각의 늪에 빠져 있는 요나를 깨우는 이가 있다.

 

 

V.6선장이 나아가서 그에게 이르되 “자는 자여 어찜이뇨?.....”

[공동번역]욘 1:6

선장이 와서 보고 야단쳤다. "이런 판국에 잠을 자다니! 너도 일어나 너의 신에게 부르짖어 보아라. 너의 신이 우리를 생각해서 행여나 살려 주실지 아느냐?"

 

 

     어떤 걸인의 우스운 에피소드....“여기가 교회인줄 아느냐?”

 

Bench Warmer

 불신자가 신자를 책망하고 있다.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이 하나님의 사람을 꾸짖고 있다. 불신자들이 교회가 바로 서 있지 못 할 때 도리어 비판하고 손가락질하게 된다. 교회가 비판되고 있다는 것은 세상이 그래도 교회에 대한 기대가 여전히 남아 있음을 시사한다. 선장이 외치고 있다. ‘자는 자여 어찜이뇨 일어나서 네 하나님께 구하라 혹시 하나님이 우리를 생각하사 망하지 않게 하시리라’ -이에 대해서 어떤 이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세상의 음성을 들어보았느냐?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보았느냐?”

어려운 일이 생기면 기도해야 하는데, 믿는 사람이 오히려 더 기도하지 않으니까 하나님이 답답해서 믿지 않는 사람들을 동원하신다.

 

“너 교회 다니잖아. 기도라도 한번 해 봐.”

“나 기도 잘 못하는데.”

“그럼 주기도문이라도 외워 봐. 집사라면서?”

 

그렇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불꽃처럼 살지 못 할 때 불신자들이 호들갑을 떨고 있다. (요나의) 죄와 불순종은 이처럼 자기의 잘못과 관계없는 사람들까지도 고통으로 몰아가고 있다. 아이성을 공격하다 실패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낙심을 생각해보라. 그들은 모두 죄에 참여하지 않았다. 그러나 아간 한 사람의 죄악이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고통을 안겨주었다. 지금의 교회와 가정도 마찬가지이다. 한 사람의 죄와 불순종은 그 죄에 참여하지 않은 많은 사람들에게 폭풍과 같은 고통을 가져다준다. 우리는 여기서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과 죄인을 다루심에 있어서 일종의 연대성을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자신이 불순종에서 돌이키고 죄에서 떠난 삶을 사는 것은 다른 사람에 대한 자비로운 삶의 출발이 된다.

 

 

  사공들은 당황하였을 것이다. 왜냐하면 자신들의 항해 계획에는 이러한 폭풍이 없었기 때문이다. 사공들은 손해를 무릅쓰고 생명을 구하기 위해서라도 자신들의 방법을 강구하였다.

 

 

V.5각각 자기의 신을 부르고 또 배를 가볍게 하려고 그 가운데 물건을 바다에 던지니라

  그러나 불순종의 죄로 말미암아 비롯된 재앙은 하나님의 진노가 그침으로써만이 그칠 수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재앙의 당사자는 그들의 신이 아니고, 너무나 많이 실은 화물 때문도 아니었다. 재앙을 주관하시는 이는 하나님 자신이었다.

 

  선원들은 폭풍이 닥칠 때 ‘이 정도로 바다가 날뛰는 것은 엄청난 죄인이 이 배에 타고 있기 때문이다. 한두 명도 아니고 수십 명을 죽인 끔찍한 살인자가 분명 이 배에 탔을 것이다. 그 사람을 찾아내지 않으면 바다가 잔잔해지지 않는다’라고 믿는 식의 미신을 흔히 가지고 있었다.

  하나님은 그런 미신을 사용하여 제비를 뽑게 하셨다. 하나님은 세상의 어리석은 점궤와 점, 제비, 이러한 것들까지도 주관하셔서 자신의 뜻을 이뤄가시는 놀라우신 하나님이시다.

 

  세상에는 우연이 없다.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손 안에 있다. 악한 사람들은 모든 일이 자기 뜻대로 되는 줄 생각하지만, 결국에는 그들의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대로 되게 되어 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지 않고 숨어 있는 요나를 이방인들 앞에 드러내기 위해 폭풍을 사용하시고 선장을 사용하시고 제비를 사용하셨다. 이방인들에게 설교하기 싫어서 도망가던 요나는 결국 이방인들 앞에서 자기 신앙에 대하여 , 하나님에 대해 증거할 수 밖에 없는 처지가 되었다.

 

  불신자들은 자신들이 흔히 하는 방법대로 ‘제비뽑기’를 통해서 뭔가 실마리를 풀어 보고자 했다. ‘자 우리가 제비를 뽑아 이 재앙이 누구로 인하여 우리에게 임하였나 알자’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여러분이 요나의 심정을 한번 상상해 보라. 그 얼마나 섬뜩한 충격으로 다가오겠는가? 요나가 탄 그 배가 온전히 구원받을 수 있는 길은 요나에게 달려 있었다. 하나님의 사람이 어떻게 살아가느냐에 따라서 이 세상이라는 거대한 배, 항해선의 흥망성쇠가 좌우된다. 제비뽑기에 걸린 요나에 대해 사람들이 그의 정체에 대해서 묻자 그는 자신을 아주 솔직하게 소개한다.

 

“나는 히브리 사람이요 바다와 육지를 지으신 하늘의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로다”

 

  분명히 이 대답은 앞에 기록된 계획된 불순종과는 어울리지 않는 대답이었다. 바다와 육지를 지으신 하나님이시라고 믿는 사람이 어떻게 그 바다에서 하나님의 낯을 피할 수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단 말인가?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로 자처하는 사람이 어떻게 니느웨로 가라는 명령을 어기고 불순종의 길을 갈 수 있다는 말인가? 이것은 요가나 배 밑창에 누워서 잠들어 있을 때에 가졌던 자기 인식이 아니라 커다란 풍랑과 두려운 폭풍을 만나 수많은 사람의 생명이 위기에 놓이게 되었을 때에 각성함으로 깨달은 사실임에 틀림없다. 그는 비록 불순종하였고 하나님의 뜻을 잠시 저버렸으나 이 재앙을 통하여 자신의 본분을 새롭게 깨닫게 되었던 것이었다.

 

  끊임없이 내려만 가던 그의 삶이 일어서려고 하고 있다. 광대한 폭풍우 배후에 말씀하고 계시는 하나님을 그가 인식했던 것이다. 그는 핑계치 아니하였다. 잠시 잊었던 자신의 소명과 하나님을 다시 떠올리며 일어서려고 하고 있다. 하나님은 자기의 뜻과 계획을 이루시기 위해 끝까지 주목하셔서 자기의 파란만장한 사람에 대한 프로젝트를 완성시키고 마신다. 아무도 그 풍랑의 이유를 몰랐을 뿐만이 아니라 그 풍랑에 대해 어떻게 대처해야 좋을지에 대해서도 깜깜했던 것이다. 불신자들은 알지 못 한다.

 

불신자들은 두 가지 사실 때문에 두려워하고 있다.

 

❶ 그들 앞에서 진노하고 계신 하나님은 ‘진짜’ 하나님이라는 사실이다.

❷ 그 하나님의 진노를 누그러뜨릴 방법을 찾을 수가 없다는 사실이다.

 

오직 유일한 길은 하나님의 사람, 요나가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길 뿐이었다. 저는 1장의 클라이막스라고 생각하는 말이 있는데 바로 요나의 발언이다.

 

 

 V.12"나를 들어 바다에 던지라“

이 시대에 우리가 살 길이 무엇인가?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일은 갑자기 앞길이 열리거나 많은 돈이 생기는 것이 아니다. 오늘 우리에게 정말 필요한 일은 새로운 하나님을 발견하는 것이다.

 

(12)그가 대답하되 나를 들어 바다에 던지라 그리하면 바다가 너희를 위하여 잔잔하리라 너희가 이 큰 폭풍을 만난 것이 나의 연고인 줄을 내가 아노라 하니라

 

   ‘나를 들어 하나님이라는 거대한 바다에 던지라’ 던지기만 하면 그 후의 일들은 하나님이 감당해 주신다. 솔직히 이러한 믿음 보다는 요나는 자신이 숨겨온 소명, 그 소명으로부터 도피해온 자신의 모습을 보면서 이제 그게 하나님을 업신여기는 것이었고 얼마나 하나님 앞에 교만했는지를 깨달았다. 그리고 이런 무서운 죄에 대한 심판은 오직 죽음 밖에 없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배에 탔던 사람들은 요나의 죄가 그렇게 죽임 당할 만한 죄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아니, 사람이 한 번 순종하지 않을 수도 있는 거지, 그렇다고 해서 바다에 던져 버리면 우리 같은 사람들은 기름에 수백번 튀겨져야겠네. 이 죄 같지도 아니한 죄 가지고 그렇게 사람을 바다에 던져?”

 

하면서 어떻게든 다른 방법으로 문제를 해결해보렬고 했다. 하지만 모든 것이 허사였다. 오히려 13절에는 상황이 더 악화되었다.

(13)그러나 그 사람들이 힘써 노를 저어 배를 육지에 돌리고자 하다가 바다가 그들을 향하여 점점 더 흉용하므로 능히 못한지라

 

  요나는 전에는 이방인들의 소중함을 알지 못했다. 유대인의 생명이 이방인의 생명에 비해 열 배 백 배 소중한 줄 알았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방인들을 살리기 위해 그가 죽기를 원하셨다.

“이 배에 있는 사람들, 나를 모르는 사람들, 매일 술이나 퍼마시고 못된 짓만 골라서 하는 이 뱃사람들을 나는 사랑한다. 너 혼자 살려고 발버둥칠래, 아니면 너 하나 바다에 빠져서 이 사람들을 전부 살릴래?”

 

  요나가 바다에 자신을 던지라고 한 것은 자포자기의 결과도 아니었고 자살행위도 아니었다. 물론 그는 자신이 죽임 당해 마땅한 죄를 지었다는 사실을 알았다...-그는 그래도 선지자 아닌가?!!!

 

그러나 동시에 하나님이 자신의 희생을 통해 이 이방인들을 살리기 원하신다는 것을 알았다. 그는 이들을 살리기 위해서라면 자기 목숨은 몇 개라도 바다에 던지겠다는 심정으로 바다에 던져지기를 자청했다.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이 책임지신다. 요나를 위해 큰 물고기를 준비하신 하나님을 보라. 하나님을 위해 자신을 던지라. 그것이 이 민족이 살 길이요, 이 나라와 경제와 우리의 가정과 교회가 살 길이다.

 

이동원 목사님 왈 “부흥은 정직에서부터 시작된다”

솔직하게 우리 자신들을 돌아보자. 정직하게 하나님 앞에서 대면하자.

나를 괴롭히고 힘겹게 하며 나를 퇴보시키는 영적 어려움의 원인은 무엇인가?

 

 

희생의 결과...?

1. 그렇게 무섭게 날뛰던 바다가 잔잔해졌다.

이것은 우연인가? 까마귀 날자 배 떨어지는가? 사실에 대한 해석, 믿음으로 해석하는 시각이 필요하다.

  우리가 어려움에 봉착했을 때 정말 중요한 것은 어려움 그 자체가 아니라, 그 어려움을 대응하는 자세, 태도가 더 중요하다.

 

(16)그 사람들이 여호와를 크게 두려워하여 여호와께 제물을 드리고 서원을 하였더라

불신자들이 하나님께 약속을 하고 서원을 하고 있다. 요나의 희생의 결과였다. 요나가 자신을 세상을 위해 던짐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인이 세상을 위해 한 알의 밀알이 되어짐으로 말미암아....생명이 또 다른 생명 낳고 주님 볼 수 있다면 나의 삶과 죽음도 아낌없이 드리리....

 

 

요나의 과감한 희생 후의 결과는 어떠한가?

(17)여호와께서 이미 큰 물고기를 예비하사 요나를 삼키게 하셨으므로 요나가 삼일 삼야를 물고기 배에 있으니라

 

(고전 10:13)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에게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치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

 

“사람을 보며 세상을 볼 때”

동남풍아 불어라 서북풍에 불어라

가시밭에 백합화 예수 향기 날리니 할렐루야 아멘

 

우리 하나님은 신실하신 분이심을 믿고 ‘나를 들어 바다에 던지라!’

여러분 자신을 하나님의 필드위에 던져라!

이것이 요나의 번지점프였다!!! 두렵고 떨림으로 하나님의 품, 하나님이 만드신 바에 번지점프하였다.

우리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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