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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로마서

로마서 강해 3장 9-20절, 모든 사람이 죄 아래에 있습니다

by Message.K 2021. 10.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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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모든 사람이 죄 아래 있음: 9절
죄의 보편성: 10-12절/ 모든 사람이 죄인임
사람의 모든 부분이 죄로 오염됨: 13-18절/ -인간이 말로 짓는 죄
                             -행동으로 짓는 죄의 총체성 
1:18-3:20의 결론:  19-20절/ 하나님의 심판아래 있는 온 세상


  바울은 논리적으로 이야기를 전개해가고 있는데, 먼저 유대인들의 자신들의 책임을 회피할 수 없음을 이야기한다. 죄를 지은 책임이 하나님에게 있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잘못해서가 아니고 인간의 전적인 책임임을 밝히고 있다. 유대인들도 그 범주에서 절대 도망칠 수 없음을 이야기한다. 그것은 유대인이 특별히 많은 죄를 지어서건, 작은 죄를 지어서건 간에 유대인들뿐만 아니라 모든 인류가 죄를 지었다는 진리로 바울은 논리를 몰고 가고 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다!” (10-12절)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다! 그렇다면 어떻게 모든 죄인이 구원받을 수 있는가?란 질문에 자연스럽게 도달하게 된다. 그러면서 바울은 유대인이 그토록 신봉했던 율법의 방법이 아닌 전혀 새로운 방법을 우리에게 이야기한다. 그것은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인류는 의로워진다고 답한다. 이것은 코페르니쿠스적인 혁명과도 같은, 신적인 반전이다.



  3장 9-20절은 1장 18절~3장 20절의 결론으로 유대인과 이방인을 막론하고 모든 인류가 죄인이며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음을 강조한다. 

 


  어린 시절, 초등학교 3학년 시절에 담임선생님을 짝사랑했던 기억이 있다. 그 선생님은 내가 자신을 얼마나 좋아했는지 알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초등학생이 선생님을 좋아해봐야 얼마나 표가 나고, 티가 나겠는가? 나는 그 선생님은 화장실에도 안 가고, 용변도 안 보시는 분으로 기억하였다. 화장실과는 도저히 어울리지 않는 분으로 말이다. 당시 화장실은 푸세식이 전부였다. 

 


  하지만, 후에 뒤늦게 재발견한 충격적인 사실! 그러나 너무나 보편적인 사실! 모든 인간은 화장실을 간다는 것이다. 국민 여동생 수지, 소치올림픽의 김연아도 화장실을 간다. 남자가 봐도 멋있는 김수현, 소지섭도 화장실을 분명히 갈 것이다. 김태희도... EveryBoby 누구나 화장실에 안 가면 변비나 치질, 소화기능에 이상이 생긴다. 정상적인 인간이 될 수가 없다. 



  이와 비슷한 원리가, 진리가 하나 있는데, 모든 인간은 죄인이라는 사실이다. 왜 한 사람도 죄인 아닌 사람은 없는가? 소크라테스, 공자, 석가모니도 다 죄가 없지 않았는가? 만약 죄가 없었다면, 죄가 없는 의인이었다면 그들은 죽지 않았어야 했다. 하지만 모든 인간은 다 죽었다. 왜? 죄의 삯wage은 사망이기 때문이다. 예수님? 예수님은 자신의 죄 때문이 아니라 온 인류의 죄 때문에 죽으신 것이다. 오해 말라!

 

 



모든 사람이 죄 아래 있음(9절)


  모든 인류가 죄 아래에 있다고, 죄의 권세 all under the power of sin  아래에 있다고 한다. 여기 단수 “하마르티아”는 인격화된 세력, 곧 죄의 권세를 의미한다. 바울에게 있어, 죄는 인간을 노예로 삼고 지배하는 권세이다. 그것은 단순히 인간의 범죄 행위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그 이상이다. 죄의 권세는 인간으로 하여금 자기의 피조성을 잊게 만든다. 자기가 피조물의 위치라는 것을 망각한다. 그리고 인간을 속여 스스로 피조물의 신분을 떠나 자기를 하나님과 같다고 생각하게 만들고, 그리하여 창조주 하나님의 주권을 부정하고 공격하게 만드는 악한 세력이다.
  아담과 하와가 왜 뱀의 유혹에 넘어갔는가? 뱀의 감언이설, 매력적인 꿀유혹이 있었던 것이다. 그게 무언가?

창세기 3:5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하나님과 같이 될 수 있다는 말에 발끈한 것이다. 피조물의 위치 중에 가장 높은 위치였고, 땅을 정복하고 다스리는 위치였다. 하지만, 아담과 하와는 그곳에서 더 높아지길 원했다. 
  마귀, 사탄의 이름은 루시퍼, 그는 원래 하나님 다음으로 NO.2였다. 하나님 나라의 찬양단(대)를 맡은 이였다. 하지만 하나님보다 더 크고자 No.1의 유혹으로 인해 타락천사가 되어 사탄이 된 것이다. 자기 자신을 제대로 바라볼 줄 아는 사람, 자신을 제대로 평가할 줄 알아야 한다.

 



  인간은 죄 아래, 죄의 권세 아래 놓여진 존재이다. 단순히 죄를 지을 수 있는 습성을 가졌다는 말이 아니다. 죄의 권세, 세력power아래 존재한다는 뜻!
 모든 이가 죄의 종, 죄의 노예이다. 좌 아래 있다는 것은 은혜 아래 있다는 말의 반대말이다. 아담의 후손으로 태어난 모든 사람은 죄 아래에 있다. 
  바울은 죄를, 인류를 죄책과 심판 아래 가두어 놓고 있는 잔인한 폭군으로 의인화하는 듯하다. 죄는 우리 위에서 우리를 내리누르며, 꼼짝 못하게 하는 짐이다. 

 

 



죄의 보편성: 모든 사람이 죄인임(10-12절)


  바울은 네 번씩이나 ‘한 사람도 없다’는 문구를 사용한다. 


1)의인(하나님의 율법을 완벽하게 지키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 상대적인 기준에 의해 의인이란 기준에 도달할 수 없다. 의인이라면 죽으면 안 된다. 죄의 삯은 사망이기 때문. 죄가 있다는 것은 죽음의 그림자가 이미 내장된 것이다. cf) 에녹, 엘리야- 특별한 경우, 아무리 착하게 산 사람이라도 죄는 다 있고, 그 죄-원죄, 자범죄로 인해 죽기 마련이다. 

 


2)깨닫는 자도 한 사람도 없다. 여기서 깨달음이란 지혜를 말한다. 특별히 하나님을 경외하는 지혜를 말한다. 지혜의 근본이 바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경외할 줄 아는 사람이 없다는 것! 아담과 하와를 떠올려보라. 그들이 하나님을 진짜 두려워할 줄 알았다면, 에덴동산에서 영원히 살았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가 없다.

 


3)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다. 하나님을 만나고자 애쓰며 하나님의 임재를 인식하려고 애쓰는 것을 말한다. 자신의 필요나 찾지 하나님을 굳이 찾으려고 하지 않는다. 현대는 물질만능주의와 배금주의로 인해 더 하다. 하나님이 아닌 다른 가짜 하나님을 찾고 있다. 그 가짜 하나님이 자신의 모든 욕망을 들어주는 것이냥. 다른 가짜 하나님은 영생에 대해 아무런 대답도, 답변도 해 줄 수가 없다. 어거스틴이 말한 것처럼 다들 자기 안에 있는 ‘구멍’을, ‘빈 여백’을 메우기 위해 온갖 잡다한 것에 목말라한다. 하지만, 세상의 모든 것은 목마르다고 바닷물을 계속 마셔대는 것과 같다. 작열하는 태양아래 목이 말라 소금물을 마시는 것과 같은 형국이다. 젊은 날, 여러분은 무엇을 찾아 헤매고 있는가? 사랑을 찾아 떠나고 있는가? 모든 인간의 감정은 항상 20대, 30대의 뜨거운 피가 흐르진 않는다. 나는 아직 40대지만, 인간의 감정과 열정은 언젠가 드라이해지기 마련이다. 물질을 쌓아볼 요량인가? 여러분이 대박나지 않는 한 우리가 백만장자가 되기는 아무래도 힘들지 않겠는가? 추신수나 김연아, 이상화처럼 스포츠영웅이 돼서 광고도 좀 찍고 그래야 되지만, 그것은 정말 소수의 몫으로 보여진다. 돈이 없으면 불편하다. 가난은 부끄러운 것은 아니지만, 불편한 것이다. 불편한 형편을 던져버리고는 싶지만, 더 나아지고자 하는 꿈을 향해 지금은 참고 견뎌야 하는 것이다. 
  청년, 대학부 여러분! 아무 소망도, 아무런 희망도 없으면서 하나님을 찾지 않는 베짱은 무슨 베짱인가? 

 

 


4)선을 행하는 사람이 하나도 없다. 선이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어떤 것을 행하는 것을 말한다. 자신의 욕망과 욕심이 우선이기 때문에 다른 것이 눈에 들어올 수가 없는 것이다. ‘가시나무’의 가사처럼, 내 속에 나를 찌르는 수많은 가시들과 그 가시가 다른 사람들을 또 찌른다. 선을 행하는 사람이 없는 인류.



죄인들은 모두 자기 이익을 위해 행동한다. 
결국 모든 사람이 다 치우쳐 하나님이 사람에게 지정해 놓으신 길을 벗어났다. 
그리하여 모든 사람이 무익하게 되었다. 죄인들은 부패한 음식처럼 하나님께 쓸모없게 되었다. 단 한 사람의 예외도 없이 모든 인간은 죄인이다. 

 

 

 

 

죄의 총체성: 사람의 모든 부분이 죄로 오염됨(13-18절)


  바울은 모든 사람이 죄인일 뿐만 아니라 사람의 모든 부분이 죄로 오염되었음을 말한다. 이것을 전적 부패라 한다. 이것은 인간의 부패의 정도가 아니라 부패의 범위를 말한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모든 인격, 지성, 감정, 의지다 다 죄로 부패했다는 것이다. 바울은 인간의 전적 부패의 진리를 말하기 위해 인간이 말로 짓는 죄(13-14절), 행동으로 짓는 죄(15-18절)를 언급한다. 바울은 먼저 인간의 발성기관을 목구멍, 혀, 입술, 입의 순서대로 언급하면서 인간이 말로 짓는 죄가 얼마나 치명적인가를 말해준다. 



죄인의 목구멍: 열린 무덤, 무덤 안에는 시체가 썩고 있다. 사람의 마음은 썩은 시체가 있는 것처럼 더럽고 냄새난다. 시체 썩는 냄새는 음식물냄새보다 더 독하다. 음식물 냄새도 한번씩 손에 묻으면 지워내는 것이 고역이다. 하지만 죄인의 목구멍, 식도는 시체의 저장고인 무덤이 아가리를 벌린 채 열고 있는 것이다. 인간의 마음속에 있는 온갖 부패와 죄악이 목구멍을 통해 밖으로 나온다. 



죄인의 혀: 속인다. 혀의 부드러움에 거짓과 속임이 있다. 뱀의 혀를 보라. 인간의 혀도 무섭다. Ex)세빠지게=혀 빠지게, 혀 빠진 모습을 보면 얼마나 혀가 긴 지 모른다. 징그럽다. 사람의 혀가 사람 앞에서, 뒤에서 다른 말을 한다는 것이다. 혀는 속이기 명수이다. 부드러운 혀는 거짓말을 밥 먹듯 하고, 죄인의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다. 죄인의 말에는 다른 사람을 인격적으로 죽이는 독이 나온다. 
손발로 당한 상처는 쉽게 치료되지만, 말로 받은 상처는 치유되기 어렵다. 
만 입이 내게 있으면 그 입 다 가지고 내 구주 주신 은총을 늘 찬송하겠네.
그렇게 하기도 바쁜 우리의 입술이 죄를 짓고, 사람들에게 상처와 데미지를 주고 저주의 화살을 쏘아댄다는 것이다. 말이 무서운 것이다. 믿음은 말씀을 들음에서 난다. 하지만 실족이나 낙심도 언어로부터 시작되는 것이다.

나의 언어생활은 어떠한가? 더러운 냄새, 부드러운 말 속에 속임? 독이 묻어나 있진 않나? 

 

 


바울은 연속해서 일곱 개의 구약 인용문을 제시한다. 
첫 번째는 전도서에서, 그 다음에 다섯 개는 시편, 하나는 이사야에서 나온 것으로 모두가 인간의 불의함을 서로 다른 방식으로 증거한다. 


  10-11절, 전도서 7:20
  12절, 시 14:1-3=시 53:1-3 
  13절, 시 5:9, 시 140:3
  14절, 그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고(시 10:7)
  15절-17절: 사 59:7-8, 참고, 잠 1:16
  18절-시 36:1

“저희의 발은 피 흘리는 데 빠른지라”
  
  모든 죄의 말과 행동으로 지은 죄의 뿌리는 무엇인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 모든 죄의 근본 원인이며 뿌리이다(18절).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 경외심이 필요하다.


하나님을 두려워함 -> 경외하는 마음 -> 예배로 나타남


 마땅히 두려워해야 할 하나님을 두려워할 줄 아는 데서 인간의 참된 경건이 시작된다. 그러므로, 죄인의 가장 큰 특징은 바로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바울시대에 재판 중에 변호할 말이 없으면, 그 표시로 손을 입에 갖다 댄다. 법관을 입을 ‘닥치라’는 표시로 피고인의 입을 때리기도 했다.

 

 


율법의 기능? 죄를 보게 하는 거울과도 같은 것, 율법 자체는 우리 죄를 없애지 못하지만, 율법은 우리에게 우리 죄를 씻어 주시는 그리스도를 바라보도록 가르쳐 준다. 바울이 이처럼 인류의 죄의 보편성과 율법의 행위로는 구원받을 수 없음을 강조하는 것은 앞으로 자신이 제시할 이신칭의의 복음 때문이다. 모든 사람이 죄인이며,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알지 못하면, 복음도 분명하게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왜 죄인들에게 복음이 필요한가?

 



기독교를 제외한 모든 종교는 인간의 구원이 자신의 행함으로 이루어진다고 가르친다. 
불교는 자기선과 도를 닦고, 열반의 경지에 이르는 해탈을 향해 나아간다. 도를 닦는 선을 추구하는 사람들, 길거리에서 길가는 사람 붙잡고 뭐라고 뭐라고 하는 사람들-그래서, 내가 커피 사주면서 한 번 물어봤다. 과연 결론은 헛소리!-. ‘조상에게 제사신을 드려야한다나?’


  과연 인간의 행함과 노력으로 구원이 가능한가? 이미 우리는 1:18-3:20을 통해 사람이 율법을 지킴으로 의인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을 살펴보았다. 인간 스스로는 구원은커녕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다. 성경은 구원은 인간 편에서가 아닌 전혀 색다른 방법으로 오는 것임을 알려준다. 그래서 21절에는, 
그러나 이제는 으로 시작한다. 결정적인 전환이다. 

 


그러나, ‘이제는’(21절) 하나님의 직접 간섭하셨다. 이 ‘이제’라는 말은 세 가지의 의미를 지닌다. 

1. 논리적인 것(전개되는 논증), 
2.연대적인 것(현재의 시간), 
3.종말론적인 것(새 시대가 도래했다!)이다. 

 



  이제는! ...율법으로는 도저히 어떻게 할 육체가, 인류가 없기 때문에 율법 외에서 무언가가 나와야 하는데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의’라는 것이다. 
21-26절의 본문을 레온 모리스 박사는 ‘아마도 지금까지 씌어진 모든 글 가운데 가장 중요한 문단일 것’이라고 했다. 바로 여기에 등장하는 이 ‘하나님의 의’, 좀 더 세밀하게 번역하면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의’라는 말 때문일 것이다. 

 


로마서 3;21-4:25은 이러한 이신칭의의 진리를 자세하게 두 가지로 설명한다. 


1복음의 핵심인 이신칭의 설명(3:21-41)
2이신칭의의 아브라함(4:1-25).



오늘 이 단락에서 ‘우리는 어떻게 구원을 받는가?’의 문제를 다룬다. 
  그러나 이제는 ‘율법 외’의 방법이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한 의라고 표현된다. 그것은 22절에 하나님의 의,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미치는, 차별없는 하나님의 의이다. 우리가 앞에서 이야기 할 때 우리 사람의 편에선 아무도 의로울 수 없다고 했다. 근데 반전이 일어났다. 사람의 의가 아닌 하나님의 의가 등장한 것이다. 그 하나님의 의가 우리 사람으로 연결되려면 접속코드가 있어야 한다. 그 접속코드, pw는 바로 믿음이다. 우린 이것을 신학적 용어로 ‘칭의’(법률용어)라고 한다.

 

 


첫 번째, 칭의는? 무죄선고이다. 
칭의의 반대말은 유죄선고 즉, 정죄condemnation이다. 칭의: 피고를 의인이라고 선언하는 것, 정죄: 피고를 죄인이라고 선언하는 것이다. 칭의와 정죄는 판사가 법정에서 피고에 대해 선고하는 말이다. 왜 법정용어가 어울리지 않게 등장하는가? 우리는 우리의 인생의 마지막, 최후의 심판대 앞에서 하나님의 최후의 선고를 받아야 하기 때문이다. 

  남자들은 제일 가기 싫은 것을 들라면 군대이다. 어떤 사람은 목욕탕을 지독하게 가기 싫어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신체검사날짜가 나오면 약간의 긴장이 된다. 그래도 대학수능시험 칠 때만큼의 긴장은 아니다. 왜? 그냥 신체검사 받아서 현역/방위나 공익/재검사/신의 아들 이렇게 판별이 되기 때문에 별 걱정이 없다. 하지만 군입대는 다르다. 
가기 싫어도 가야하고, 훈련받기 싫어도 가야하는 곳이 군대이다. 나이도 나보다 어린 조교 앞에서 우린 온갖 모욕과 욕과 알아듣기 어려운 군대용어들을 긴장 입빠이한 채로 주워들어야 한다. 하나님의 심판대? 거긴 한번의 선택만 있을 뿐이다. 이제껏 살아온 나의 인생에 대한 내가 선택한 것들의 결과물을 가지고 이젠 내가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심판자이신 하나님께 내가 선택을 당하던지, 버림을 당하던지 하는 것이다. 너는 무죄!, 아니면 너는 징역 1000년! 이렇게 선고가 되는 것이다. 군대는 훈련을 잘 못 받거나 약간의 문제가 있으면 재입대를 하던가, 아니면 영창에 가면 된다. 하지만 하나님 앞에 마지막 심판대는 피할 길이 없다. 검은색이든지, 흰색이든지 하지 회색(중간지대)이 없는 것이다. 
  그런데, ‘그러나 이제’의 반전은 바로 우리가 흰색으로 갈 수 있는 길이 생겼는데, 바로 그것은 ‘칭의(Justification)이다. 이 칭의 안에는 죄용서와 의의 성취가 동시에 존재한다. 우리가 죄의 옷을 벗고 나니 입을 옷이 없는 것이다. 벌거벗긴 상태로 하나님 앞에 설 수 없다. 하나님 앞에 가려면 의의 옷이 필요하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피로 산 의의 옷을 선물로 주신 것이다. 칭의의 옷을 입으면 천국에 가지만, 정죄의 옷을 입으면 지옥에 가는 것이다.

  칭의는 예수님 재림 이후 인류 최후의 심판 날에 이루어지는 것인데 어떻게 지금 예수 믿는 즉시로 칭의를 받을 수 있는가? 원래 칭의는 최후 심판대에서 선고되는 것이다. 하지만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심으로 이런 종말의 칭의가 현재에도 가능해졌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우리가 심판대에서 받아야 할 정죄를 우리 대신 미리 받으셨기 때문이다. 앞당겨서 칭의를 받은 셈이다. 바로 가불이다. 월급을 가불해 달라고 하면 월급날 받을 월급을 내가 필요한 당겨쓰는 것을 말한다. 그리스도인은 칭의를 가불 받은 것이다. 

 



 그럼, 두 번째로, 이 칭의의 근거, 뿌리(기원)은 누구인가? 
 그것은 바로 24절에 나타난다. 
  하나님의 은혜이다. 나를 지으신 이가 하나님, 나를 부르신 이가 하나님, 나를 보내신 이도 하나님, 나의 나된 것은 다 하나님의 은혜라! 절대 사람의 공로가 들어갈 수 없죠.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근거한 것이다. 


 노예상인 존 뉴턴의 이야기를 다 알지 않는가? -Amazing Grace
“나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크고 놀라와 잃었던 생명 나 찾았고 광명을 얻었네”
이 찬송은 역대상 17장 16, 17절의 말씀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존 뉴턴 목사는 자신의 죄, 즉 아프리카에서 흑인들을 마구잡이로 잡아다가  미국 남부 농장에 팔던 일을 비롯해 노예선 선장으로서 노예들이 반란을 일으킬까봐 발과 손에 착고를 채워 배의 갑판에 생선을 잡아 말리듯 노예들을 죽인 죄를 회개하는 마음에서 고백했던 기도가 가사로 불려지게 되었다. 

 

 


셋째, 칭의의 기초는 그리스도의 구속이다(24-26절). 
죄에는 반드시 벌이 따른다. 죄지은 만큼 벌을 받는 것이 공의이다. 살인범인데 판사가 제멋대로 무죄를 선고해버린다면, 피해자와 유족들의 마음은 너무나 가슴 아플 것이다. 경주 리조트 지붕 붕괴사건도, 이집트 성지순례 버스의 자살폭탄테러 사건도 누군가는 그 책임을 져야 한다. 죄에 대한 벌, 댓가를 지불해야 한다. 우리가 지은 죄로 인해 우리는 영원한 형벌을 받아 마땅하다. 우리의 죄는 심판을 요구한다. 하지만 칭의가 가능한 이유는? 바로 예수님 때문이다. 내 죄에 대한 형벌을 대신 받으셨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은 크게 ‘구속’과 ‘화목 제물’로 설명되어 있다. 

 

 



먼저, 예수님의 십자가는 죄인된 나를 구속해 준다. 

속량은 상업적인 용어로, 죄인을 구속한다는 것은 노예 시장에서 값을 지불하고 노예를 사서 해방시켜 준다는 것이다. 구속의 이런 의미가 상징적으로 발전되어 구원을 설명하는 중요한 개념이 되었다. 노예였던 사람들이 예수를 믿으면 그 의미를 잘 알 수 있겠지. '속량(아포류트로시스)'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리스도의 피로 사서 죄의 노예 상태에서 해방시킨 것을 의미한다. 이스라엘이 애굽의 노예상태에서, 바벨론의 노예상태에서 해방되었다는 의미에서 그것은 곧 죄에 대한 해방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대목이다. 

 

 

 


둘째로, 하나님이 예수님을 화목제물로 삼으셨다. 

화목제물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써...속죄소(힐라스테리온)로 세우셨으니” 힐라스테리온: 어떤 사람들은 그것이 하나님의 진노를 진정시키는 화해행위를 의미한다고 생각하고, 다른 사람들은 죄를 용서하고 제거하는 속죄행위를 의미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이 단어는 히브리서 9:5(“그 위에 속죄소mercy seat를 덮는 영광의 그룹들이 있으니”)과 구약 70인경에서 속죄소를 가리키는 데 사용되었다. 속죄소는 광야에서 회막(후에는 예루살렘 첫 성전의)의 지성소 안에 있는 언약궤를 덮는 덮개이다(출 25:17-22). 이 덮개 위에는 대칭적으로 두 그룹이 올려져 있었다. 레위기 16장을 보면, 대제사장은 일년에 한번 대속죄일에 지성소에 들어가서, 먼저 자신을 위해 속죄제물을 드린 후에, 속죄소 염소의 피를 속죄소 위와 속죄소 앞에 일곱 번 뿌려 백성을 위해 속죄를 수행했다(레 16:15). 이런 의식은 A.D 70년까지 예루살렘 성전에서 정규적으로 행해졌다. 성전 파괴 후에는 대제사장이 속죄소가 놓여져 있었던 자리에 희생제물을 뿌렸다....바울이 볼 때, 십자가에서 죽으신 그리스도는 구약 속죄소의 종말론적인 대형이다. 즉,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새로운 속죄소이다.  홍인규, 로마서 어떻게 읽을 것인가(서울: 성서유니온, 2011), 77-78.
이란 피해자의 진노를 풀어줌으로써 가해자와 피해자 사이의 화해가 이뤄지도록 하는 제물이다. 속죄소라고 할 수 있다. 
  형태상으로 보아 법궤(언약궤)의 뚜껑에 불과한 속죄소. 이것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만나고', 모든 일을 '이르는' 성소에서 가장 핵심이 되는 장소이다. 한편 속죄소(카포레트)란 말은 '덮다'란 기본 뜻을 가지는 '카파르'에서 유래했다.  따라서 이는 단순히 '뚜껑'이라 해석할 수도 있다. 그러나 '카파르'는 '죄를 덮는다'란 의미에서 전이된 '속죄하다'(출30:10)로 주로 번역된다. 이는 인간의 죄가 하나님의 덮어 주심이 있어야만 해결됨을 보여 준다.
즉 구약의 속죄 원리인 짐승 제사는 짐승의 피 자체가 죄 사함의 효력이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를 보고 죄를 덮어 두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따라서 '뚜껑'이라는 일차적 번역이 가능한 '카포레트'를 '속죄소'로 번역하여도 무리가 없는 것이다.

  한편 영어 성경들은 대부분 이 용어를 '자비의 자리mercy seat'로 번역했다. 이는 '속죄소'란 번역보다 원어적 배경이 부족하다 볼 수 있다. 그러나 이곳이 하나님과 인간이 '만나는'(야아드) 장소이며 이러한 행위가 하나님의 자비에 연유한다고 볼 때 다소 설득력을 갖는다. 특히 '야아드'란 용어가 단순히 만나는 데 지나는 것이 아니라 강한 목적의식이 전제되어 '상관하다', '의합하다'라는 보다 적극적 의미가 있으므로 이러한 해석도 가능한 것이다. http://shyunya.blog.me/40193117592


 내 죄는 내가 죄의 종이 되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진노를 불러온다. 하나님께서 진노하신다고? 사람들은 진노라는 말을 싫어한다. 하지만 하나님의 진노는 죄에 대한 하나님의 공의의 반응이다. 
Ex) 우리 집 아들이 우리 집에 놀러온 여러분의 지갑의 돈을 훔쳤다고 칩시다. 한5만원 훔쳤다고 치자, 그 사실을 알게 된 나는 요즘 경제도 어려운데 참 ?아들, 네가 아버지의 마음을 아는구나! 잘했다 잘했어 그러면서 아들 30%주고, 제가 70% 먹고 그럴까요? 마피아처럼? 아니죠. 진노합니다. 아들의 죄에 대해 진노합니다. 훔친 돈을 제가 먹고 진노할까요? 아니다. 그 훔친 돈을 돌려주고 사과할 것이다. 그리고 아들의 죄에 대해 문책하고 적절한 심판을 해야 아버지가 아버지이다. 하물며 공의의 하나님이실까 보냐? 예수님의 십자가는 이제 나 대신 모든 하나님의 진노를 대신 받으셨기 때문에 이제 나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는 사라진 것이다. 죄인 된 나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가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으로 완전 해결되었다. 

 



  넷째, 칭의의 수단은 믿음이다(24-26절). 

믿음은 손과 같다. 믿음은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 그릇과 같다. 우리는 믿음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내 것으로 만든다. 믿음은 나의 칭의의 근거가 될까요? 나의 칭의의 유일한 근거는 예수님의 행위이다. 믿음은 나와 예수님을 연결시켜주는 끈이다. 

 

 

 



구원과 자랑(27-28절)


  그러므로 믿음으로 구원받은 사람은 자신의 믿음을 자랑할 수 없다. 지, 정, 의가 결합된 믿음은 내 속에서 내가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다. 그러기에 자랑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만을!

 

 



오직 유일한 구원의 길(29-30절)


  세상에 많은 종교나 이론이나 정신이 구원을 얻는 방법도 다양하다고 이야기한다. 종교다원주의가 그러하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가 구원 받을 수 있는 길은 하나밖에 없다고 말한다. 그것은 바로 믿음의 길One Way뿐이다. 이것은 유대인과 이방인 모두에게 마찬가지이다. 유대인들이 구원받는 방법이 따로 있고, 이방인들이 구원받는 방법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동양 사람 Vs 서양 사람

 

 

 



율법을 영예롭게 하는 믿음(31절)


  이 믿음과 율법은 어떤 관계일까요? 바울은 믿음과 율법의 관계를 이렇게 말합니다(31절).
 바울은 믿음이 율법-모세의 율법-을 세운다고 말한다. 


 이신칭의의 진리는 오히려 율법을 세운다. 예수님은 십자가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율법이 요구하는 정죄를 받으심으로 율법을 세우셨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고통과 죽으심으로 하나님의 거룩한 성품과 의로운 인격을 드러내셨고 이로써 율법을 세우셨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죄에 대한 진노를 보여준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우리의 철저한 무능력을 드러냄으로써 율법을 세웠다. 이신칭의는 예수님이 온전히 율법을 다 이루심으로 구원이 이루어진다는 것을 믿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는 믿음이 율법을 세운다.

 

 

 

 


 

 

로마서 3장 1-8절, 인간의 책임입니다

개요 3:1-8 자신의 선포에 대한 유대인의 항의에 대한 답변 1) 유대인의 나음과 할례의 유익에 대한 답변(1-2절) 2) 언약에 대한 유대인들의 불성실성이 하나님 편에서도 불성실성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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