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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사도행전

사도행전 17장16-34절, 바울의 아덴에서의 도전,우리의 도전

by Message.K 2021. 9.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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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속 바울이 아덴에서 받았던 도전과 과제 역시 우리 그리스도인, 교회를 향한 도전임을 깨닫고 말

 

 

"생각의 속도”-스피드의 시대

  정말, 요즘 모든 것은 스피드로 말하는 것 같다. 리더모임중에 누군가 자기가 동아리방에서 짜장면을 들어오는 길에 시켰는데, 1분도 안 되어서 달려왔다고 너무 놀라했다. 정말 놀라운 속도이다. 우리가 스마트폰을 켜다가 다음페이지로 서치, 서치하는데 버벅대거나 로딩이 걸거나 버퍼링 심하면 사람들은 분노하고, 대노하고, 격분한다. 작은 속도의 늦어짐에도 민감하게 반응하는 시대이다.

 

  정작 분노해야 할 것들에 대해선 분노를 스킵하고 작은 것에 분노하고 대노하는 우리들은 아닌지 모르겠다. 우리 가정과 가족과 사랑하는 사람들의 고통과 상처에 대해선 무감하면서 이런 작은 것들에는 굉장한 관심과 호기심을 보이는 시대적인 징후!

 

 

  세계적인 부호이자, 석학인 빌 게이츠의 생각의 속도도 이제 구닥다리가 되어간다. 속도는 정말 앨빈 토플러가 이야기한 것처럼, 다변하고 급변하는 것 같다. 앞으로 더 빠르게 진화하고 진보할 것이다. 아이들이 또봇을 보다가 안 넘어가니깐 화를 낸다. 나도 지금 하는 게 있는데, 조금만 기달려달라고 한다. 어느새 애들이 잠이 들어버렸다. 피곤하긴 피곤했나보다. 참지 못하고, 기다리지 못하는 시대이다.

 

 

 

 

 넘쳐나는 정보량의 시대

  새로운 것과 기발한 것, 온갖 정보더미가 넘쳐나는 시대

  인터넷 포털사이트를 들어가면 넘쳐나는 것이 천지다. 볼 것도 천지다. 하지만 정작 우리는 그 많은 정보들을 다 들이키기보다 작은 것에 집착하거나 편식하거나 그렇게 살아간다. 산해진미가 있다고 해서 그 음식을 다 먹는 미식가가 있는 반면에, 자기가 늘 먹던 것만 먹는 편식가가 있다. 또한 넘쳐나는 정보량으로 인해 사람들은 새로운 것에 대해서 별로 새로운 느낌을 가지지 못한다.

 

  사람이 죽었다는 소식은 그냥 귀가 가려울 뿐이고, 사고가 나도 크게 나던가, 세월호처럼 젊은 애들이 많이 죽던가, 재난도 크게 나거나 특이하게 나야 사람들의 귀를 쫑긋이 세울 수 있다. 진동버스사건도, 세월호사건도, 경주MT사건사고도 이제는 다 지나간 과거에 불과하다. 그 이야길 또 끄집어내면 새로울 게 없게 된다. 아주 따끈따끈하고 새로운 소식이 아니면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킬 수가 없다. 정보의 양이 많기 때문에 그 많은 정보로 인해 정말 필요한 질적으로 필요한 정보를 취득하는 것도 쉽지 않다. 쓸데없는 정보가 정말 필요한 정보의 길을 가로막기 때문이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아덴, 아테네는 어쩌면 오늘날과 유사한 사상적인 기류가 흘렀던 것으로 보인다.

 

 

 

  먼저, 바울이 복음을 전했던 도시 아덴은 당시 ‘지적, 사상적, 철학적 중심지’였다.

당대의 엘리트들이 모여 철학을 논했던 자리였다. 18절의 에피쿠로스 학파, 스토아학파 들이 모여서 토론하기 일쑤였다.

 

 

•에피쿠로스 학파: 정원의 철학자들, 신은 인간사에 관심이 없고 너무 멀리 떨어져 있다. 그래서 아무런 영향력을 미칠 수가 없다. 세상은 우연히 원자들이 되는대로 집합되어 이루어진 것이며, 죽음 뒤의 삶이나 심판 같은 것은 없다. 그러기에 인간들은 쾌락, 특별히 고통이나 병이나 두려움과는 멀리 떨어져 있는 평온한 삶의 향락을 추구했다.

 

 

•스토아 학파: 제논이 창설한 것, 지고의 신이 있으나 범신론적으로 인식하여 ‘세상의 혼’과 혼동, 인간은 아무리 고통스럽더라도 자연, 이성과 조화를 이루기 위해 스스로를 포기하고 임무를 수행해야하며, 자급자족해야 한다. 숙명론, 복종, 고통의 감수를 강조.

 

 

 두 학파는 서로 반대되는 사상과 입장을 지닌 학파이다. 이런 사상과 철학이 팽배한 그 곳! BC 5세기 이래로 가장 중요한 도시였다.

 

 

  철학하면 떠오르는 것? 소크라테스-플라톤-아리스토텔레스...로마 제국의 지적 중심지였다. 그 도시에 팽배한 문화적, 사상적, 영적 풍토는 바로 19절에 등장하는 것처럼 ‘새로운 가르침’, 20절에 나오는 ‘어떤 이상한 것’ 과 같은 새로운 호기심을 유발하는 것에 굉장한 촉수를 세우고 있는 분위기였다.

 

 

21절

모든 아덴 사람과 거기서 나그네 된 외국인들이 가장 새로운 것을 말하고 듣는 것 이외에는 달리 시간을 쓰지 않음이더라

(All the Athenians and the foreigners who lived there spent their time doing nothing but talking about and listening to the latest ideas.)

 

  18절에서 에피쿠로스학파와 스토아학파의 사람들 중에 ‘이 말쟁이가 무슨 말을 하고자 하느냐?’하고 물었다. 이 말장이란 말은 스페르모로고스spermologos를 번역한 것인데, 램지는 그것은 ‘아덴의 은어다운 특성을 나타내는 단어’라고 했다. 문자적 의미는 ‘씨를 쪼아먹는것’이라는 것이며, 여러 가지 씨를 먹는, 또는 썩은 고기를 먹는 새들에 대해 사용되었다. 새들로부터 사람들, 곧 시궁창 같은 데서 주운 음식 찌꺼기를 먹고 사는 부랑자나 거지들에게 적용될 때 사용된 단어였다. 자기 머릿속엔 별 독창적인 사상이 없으면서 여기저기서 지식의 부스러기들을 주워 모으며 거리낌 없이 다른 사람의 사상을 표절하거나 ‘남에게 얻어 듣는 이류지식을 열심히 찾는 사람’, 허풍선이, 앵무새, 지능적 수다장이, 무지한 표절자 라는 번역으로 나왔다.

 

 

  굉장한 것에 촉수를 세운 무리들! 아덴의 철학자들이 그러했다. 새로운 것에 혹했다. 오늘날과 비슷한 분위기이다. 새로운 것이 아니면 지루해하고, 빠른 것이 아니면 지겨워하고, 색다른 것이 없으면 흥미가 떨어지는 분위기가 바로 그때의 분위기였다. 왜 그렇게 사람들은 재미와 흥미를 추구하는가? 그들의 배후의 세계관 때문이다. 세상을 구원하는 구원자나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부정과 거절이 낳는 것은 이 땅에서의, 현세에서의 욕망과 쾌락밖에 더 있는가? 에피쿠로스 학파는 낙관적인 세계관이고, 스토아학파는 비관적인 세계관으로 볼 수 있다. 새로운 것을 추구하는 경향은 언제나 그 배후에 이러한 생각의 기초가 있다.

 

 

 우리는 어떠한가? 새로운 것을 날마다 찾다가 더 이상 새로울 것이 없어 거덜난 인생은 아닌가? 기억하라!

 

‘해 아래 새 것이 없다!’

 

고 했다.

 

Ex)논문이나 paper쓸 때 꼭 참고문헌이나 인용출처가 있어야 인정된다. 왜? 과거의 역사와 문헌을 참고하지 않는 보고서는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21세기의 아덴 사람들이여! 예수 그리스도만이 날마다 우리를 새롭게하시는 존재임을 믿으라!

 

 

  둘째, 아덴은 범사에 종교성이 많다(22절)고 했다.

 아테네는 철학적 중심지일 뿐만 아니라 웅대한 파르테논 신전, 아덴의 고대 성채인 아크로폴리스, 그 도시의 수호신인 아폴로의 상들, 주피터, 비너스, 머큐리, 바카스, 넵툰, 다이아나, 에스쿨레이피어스의 상들이 있었다. 신들을 모신 신전(판테온)이 있었고, 올림푸스의 모든 신들이 거기에 있었다. 그것들은 아름다웠다. 금과 은과 상아와 대리석으로 만들어졌으며, 헬라의 가장 솜씨좋은 예술가, 조각가들이 우아하게 만들었다. 파르테논 신전의 아테네 여신상은 금과 상아로 만들어졌는데, 그 사의 번쩍이는 창 끝은 64km를 떨어진 곳에서도 볼 수 있었다고 했다. 아덴은 그 나라의 지역 전부에 있는 신들보다 더 많은 신들을 가지고 있었고, 거기에는 사람보다 신들을 발견하기가 더 쉬울 정도였다.

 

그래서 누군가 아덴을 ‘진정한 우상들의 숲’이라고 했다.

  로마가 굉장히 로직하고 합리적이고 견고한 것같지만, 그 안에는 엄청난 신들이 존재했었다. 바울은 이 아덴의 유명한 걸작품들과 예술품들을 보면서 경탄을 하고 칭찬을 하기 보다는 16절에 격분했다고 했다. 왜 격분했는가? ‘그 성에 우상이 가득한 것을 보고’ 격분했던 것이다. 아덴은 우상들의 도시였다. 시대가 더 합리적이고 더 문명화되면 인간의 심리와 성품도 더 과학적이 되어야 하는데, 꼭 그렇지만은 않다. 인간 내부에는 이러한 종교성이 있어서 때론 합리적인 것보다는 비합리적이고, 미신적이고, 우발적이며 충동적인 것들을 더 선호하는 경향이 있는 것이다.

 

Ex) 천하의 이병헌이가 이민정을 놔두고 왜 걸그룹애들과 섬씽이 생겼는가? 인간의 욕심에는 끝이 없기 때문이다. 욕망이 대다수의 젊은이들에게 신, 우상이 아닌가? 물론 그때 그사건은 소리소문도 없이 잘 묻혔다.

 

섹스, 마약, 권력, 음식, 술, 부모, 배우자, 자녀와 친구, 일, 오락, 텔레비전과 재산들, 심지어, 교회, 기독교봉사, 종교까지도 우상이 될 수 있다고 존 스토트는 말하고 있다. 21세기 아덴은 어쩌면 더 많은 우상들로 곤혹과 유혹과 시험을 치르고 있는지도 모른다.

 

  우리의 우상은 무엇인가?

우리의 장래와 미래, 핑크빛 장래인가? 우리의 성공한 장밋빛 인생인가? 아메리칸 드림이 아니라 ‘코리안 드림’인가? 앞으로 직업도 ‘외모’와 ‘건강’에 관련된 직종이 뜨게 될 것이라는 뉴스가 나왔다. 이제는 점점 모든게 비쥬얼하고 무병장수하는 것으로 목표로 하는 것이 대세이다. 여전히 공무원과 교직원은 인기가 있을 것이다.

 

  자, 우리가 사는 도시는 21세기의 아덴이다. 지적인, 정보의 광장이자 동시에 종교성이 넘치는 우상숭배의 도시라는 것이다. 그것이 우리의 현실이고 우리의 현재이다.

 

 

 

 

 바울의 반응, 우리의 반응

 자, 더 중요한 것은 이러한 넘쳐나는 도시의 지식과 넘쳐나는 우상들의 창궐함에 바울이 어떻게 반응하였느냐는 것이다. 격분했다는 것이다.

온 성이 우상숭배에 넘어간 것을 보고는’격분했던 것이다.

 

우상이 가득찬- ‘우상의 밑에’란 표현이다. 우상들로 푹 잠겨있다는 뜻이다. 그것에 대해 바울은 ‘파로키노마이’즉, 발작(Paroxysm)이라는 단어에서 나왔다.-자극하다, 성나게 하다, 화를 돋구다는 의미이다. 신약에서 그것은 바울이 쓴 고린도전서에서 단 한 번 더 나타나는데, ‘사랑은 성내지 아니하며’에서 나온다. 그렇다면 바울은 지금 아덴에서 그것을 실행하고 있지 않는가? 이 동사는 지금 미완료 시제로 사용되었다. 이는 갑자기 화를 터뜨리는 것이 아니다. 바울이 본 것에 대한 지속적이고도 일정한 반응을 표현했다.

 

  바울이 게다가 혼자 거기에 있었다. 아무도 그의 감정의 격발을 목격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후에 자신의 감정을 누구에게 이야기할 때, 그 자신이 사용한 단어에 틀림없다!

 이것은 70인역에 통례적으로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에 대해, 특별히 우상숭배에 대한 그분의 반응에 대해 사용되고 있는 동사라는 것이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시내산에 금송아지를 만들었을 때, 후에 그들이 브올과 바알 신과 관련하여 엄청난 우상숭배와 부도덕의 죄를 범했을 때, 그리고 북왕국이 사마리아에서 예배드리기 위해 또 다른 금송아지를 만들었을 때, 그들은 여호와 하나님의 노를 ‘격발시켰다’. 실로 그분은 이스라엘을 ‘내 앞에서 항상 내 노를 일으키는 백성’이라고 하셨다.

 

  자기 자신이 마치 하나님인 것처럼. 그리고 꼭 그같은 이유로 곧 그분의 이름과 명예와 영광을 위하여 그런 것이다. 성경에서는 때때로 그런 감정을 ‘질투’라고 부른다. 여호와는 ‘질투라 이름하는 질투의 하나님이니라’고 기록되었다.

 

 

  우상의 문제는 곧 예배의 문제이다.

  하나님을 나 외에 다른 신을 내게 두지 말고 만들지 말라고 십계명에서 분명히 말씀하셨다. 그것은 경외의 문제이고, 경배 즉 예배의 문제이다. 인간은 하나님을 섬기지 아니하거나 예배하지 아니하면 반드시 다른 존재, 그 무언가를 섬기고 예배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바울은 지금 아덴의 모든 것들이 하나님께서 올려드려져야 할 영광과 찬송이 우상에서 드려지고 있다는 것에 대해서 하나님의 이름을 위한 깊은 질투심을 느낀 것이다. ‘그 도시가 우상숭배에 넘겨진 것을 보았을 때 그의 영혼 전체가 혐호감을 가졌다.’(JB)

 

  이러한 깊은 혐호감, 하나님의 이름을 위하 깊은 질투심이 바울을 움직여 우상숭배자들과 복음을 나누도록 하게 했던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17절, 회당에 가서 유대인들과 경건한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고, 시장터에서도 대화를 나누고, 18절에서 철학자들과 변론을 하기도 했던 것이다. 그러면서 그는 철학적인 아덴의 사람들으로 대상으로 복음을 전했다.

 

 

 

 그 복음을 전한 결과는?(32-34절)

  그리스도의 십자가(본문에 등장하진 않음)와 부활의 소식은 사람들의 반응을 양분되게 했다. 여러분이 남은 일주일동안, 아니 앞으로 인생 살아갈 동안 복음을 전할 때 사람들의 반응은 양분된다. 다시는 듣고 싶지 않다는 기롱하고 조롱하는 무리와, 다시 복음을 듣고 싶다는 준비된 영혼들이 있을 것이다.

 

    주일날 하나님을 예배하지 않으면, 우리는 분명히 하나님이 질투할만한 그 무언가, 그 누군가를 예배하면서 21세기의 아덴에 서 있을지 모른다. 그러기에 주일성수는 중요한 것이다. 우리의 욕망과 우리의 즐거움을 추구하라고 성경을 말하지 않고 먼저 그 나라와 그 의를 추구하라고 했다. 구하라는 말은 ‘제이테오’(추구하라to seek)이다. 여러분의 욕망과 우상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 하나님의 뜻을 한 번 추구해보라. 21세기의 아덴에 홀로 선 바울이 복음을 담대하게 설교한 것처럼, 여러분들도 여러분의 아덴에서 복음의 나팔을 외칠 것을 소원한다.

  

 

  이번 일주일도 복음을 전하고, 교회가자는 소릴 할 때 분명히 반응은 양분된다. 그래도 복음을 전하라. 우리는 이 세상의 신들, 우상들, 내 욕심을 채우기 위해 전도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기뻐하심을 위해서 전도하는 것임을 기억하자.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이기에 우리가 그 일을 하는 것임을 기억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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