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울의 변명에 제일 먼저 반응을 보인 사람은 로마 총독 베스도였습니다. 베스도는 1-23절의 내용으로 바울의 변명을 마치자,
“바울아, 네가 미쳤도다. 네 많은 학문이 너를 미치게 한다.”
고 했습니다. 그도 그럴것이 죄수로 잡혀온 신세의 바울이 너무나도 확신에 찬 답변을 하고 있기 때문에 베스도는 당황했을 것입니다. 바울의 기백 넘치는 모습에 베스도가 ‘네가 미쳤도다!’고 이야기한 것입니다.
바울은 9-18절에서 자기가 변화된 사건을 바탕으로 예수님의 주되심을 증거했습니다. 바울은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 얼마나 무지했는지, 그리고 예수님을 만난 극적인 순간과 사건을 말했습니다. 그리고 사명자로서의 삶을 이야기하면서 예수가 주님이심을 증거했던 것입니다. 그는 자신을 통해 예수님을 바라보도록 했습니다. 복음이 어떻게 자신을 변화시켰는지에 대해 복음이 이론이 아니라 실제적인 능력이 있는지를 보여주었습니다. 그리고, 복음의 능력을 확증한 다음, 복음의 핵심인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도록 도왔습니다. 하지만, 베스도는 미쳤다고 반응합니다. 바울은 자신이 미친 것이 아니라 참되고 온전한 말을 한다고(25절) 이야기합니다.
복음은 이 세상 질서와는 전혀 다른 새로운 가치 질서를 우리에게 제시합니다. 로마인의 눈에는 복음은 너무나 없어 보이는 것이었고, 미련하게 보이는 것이었습니다. 특히 로마제국은 힘을 숭배하였고, 그리스 철학의 인간 이성과 정신 숭배사상에 물든 로마제국의 엘리트들에게는 죽임당한 그리스도가 세상을 구원한다는 것이 너무나 어처구니없는 이야기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고린도전서 1:18-25에서 바울은 자신의 십자가의 복음이 왜곡된 인간의 이성과 어두워진 인간의 지혜 앞에서는 이해할 수 없는 암호와 같다고 다음과 같이 말하지 않았던가!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기록된바 내가 지혜있는 자들의 지혜를 멸하고 총명한 자들의 총명을 폐하리라 하였으니 지혜있는 자가 어디 있느냐 선비가 어디 있느냐 이 세대에 변론가가 어디 있느냐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므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기를 기뻐하셨도다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우리가 복음을 전할 때 베스도와 같은 이를 만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전할 때 그들은 미친소리라고, 미쳤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진리는 불변하는 것입니다. 세상은 표적을 구하기도 하고, 지혜를 구하기도 하지만, 우리는 십자가의 그리스도가 우리의 영원한 진리임을 바울처럼 고백하고 선포해야 합니다.
바울의 변명을 들은 또 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 사람은 바로 아그립바 왕입니다. 바울은 26절에 ‘담대히’ 말했다고 합니다. 복음의 검을 가진 바울은 자신의 환경과 상황과 처지에 관계없이 자신을 변화시킨 그 능력의 복음을 강력하게 변호합니다.
‘이 일에 하나도 아시지 못함이 없는 줄 믿나이다 이 일은 한쪽 구석에서 행한 것이 아니니이다’
바울은 아그립바가 성경과 유대 종교에 대해 상당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불과 얼마 전에 예루살렘에서 일어났던 예수의 죽음과 부활, 성령강림 사건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습니다. 베스도는 바울의 말들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어서 미쳤도다 라고 했지만, 아그립바는 마음이 흔들렸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거기까지였습니다.
27절에 아그립바왕에게 ‘선지자를 믿지 않느냐’고 말하자,
아그립바는 ‘네가 적은 말로 나를 권하여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려 하는도다’고 대구합니다. 바울은 선지자를 믿는다면, 예수 그리스도를 못 믿을 이유가 없다는 논리입니다. 바울의 이야기는 과장과 비약이 심한 이야기가 아니라 성경의 논리에 따르면 반드시 그리스도가 등장해야 한다는 영적인 기백과 공세입니다. 하지만 아그립바왕은 자신의 신분과 위치를 생각할 때 어떠한 말도, 어떠한 입장도 표현할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게 그 사람의 끝이었습니다.
‘네가 적은 말로 나를 설득하여 왕인 나를 그리스도인이 되게 할 수 있느냐’
는 아그립바의 발언은 그의 자존심을 건드린 바울에 대한 대구였습니다. 여러분도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왕의 자리가 쉽게 그렇게 반응을 하여 영접하고 그렇게 될 수가 없는 위치입니다. 그게 아그립바의 걸림돌이었습니다.
우리 주위에 복음을 받아들이는 데 걸림돌이 있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더군다나 아그립바처럼 ‘자존심 때문에’주께 나오지 못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아그립바는 복음에 대해 호의적이긴 했지만, 그 복음 안으로 들어오진 못했습니다. 그 자존심때문이지요. 우리 주위에 이런 사람들이 있다면 이들을 위해 기도합시다. 그리고 그들이 복음의 걸림돌을 넘어 복음 앞에, 그리스도 앞에 철저하게 무릎꿇는 그 날을 소망하며 기도합시다.
바울은 그런 대구에 오히려 더 당당하게 대처합니다.
“말이 적으나 많으나 당신 뿐만 아니라 오늘 내 말을 듣는 모든 사람도 다 이렇게 결박된 것 외에는 나와 같이 되기를 하나님께 원하나이다”(29절)
바울은 아무리 왕의 앞이라고 하더라도 자신의 복음은 그런 왕좌와 왕의 권세를 뛰어넘는 영원의 소식이기에 당당하게 거침없이 복음을 선포하고 전하고 있습니다.
아그립바 왕과 총독, 버니게, 그리고 그 자리에 있었던 사람들이 떠나면서 바울의 무죄를 이야기합니다.
‘이 사람이 만일 가이사에게 상소하지 아니하였더라면 석방될 수 있을 뻔하였다’
오늘 우리는 복음을 거절하는 두 사람, 베스도와 아그립바 왕을 보았습니다.
한 사람은 미쳤다고 하고,
한 사람은 부드럽게 거절하며 뒷걸음질치는 모습을 봅니다.
복음은 영혼에 관한 영원의 소식입니다. 현재와 현실과 현세에 집중하는 자들에게는 들리지 않는 소식입니다. 이 복음의 진리를 발견한 자들은 바울처럼 담대히 복음을 말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바울은 복음을 전할 때, 예의 있는 태도로 대화를 시작했습니다. 또한, 그는 대화가 통할 수 있는 열린 마음이라는 인상을 심어주면서 복음을 변호했습니다. 또한, 자신의 삶의 변화에 대한 간증을 증거했습니다. 마지막으로, 예수님에 대한 믿음과 하나님께 대한 회개를 강조했습니다. 진리를 발견한 바울처럼 우리도 그렇게 복음을 선포하며 살아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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