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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창세기

창세기 4장 25-26절/에노스,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

by Message.K 2021. 9.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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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 4:25-창 4:26]

(25)아담이 다시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아들을 낳아 그 이름을 셋이라 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내게 가인의 죽인 아벨 대신에 다른 씨를 주셨다 함이며(26)셋도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에노스라 하였으며 그 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오늘 우리가 살펴 볼 이 짤막한 구절은 우리의 선조, 인류의 선조인 아담과 하와-이브-가 가인과 아벨을 낳은 후에 세월이 조금 지나 마주치게 되는 장면인 것이다. 부족함이나 결핍이나 어떤 문제도 없었던 그 에덴동산, 말 그대로 천국을 방불케 하는 그 인류 최초의 인간, 아담과 하와가 머물렀던 그 공간, 그 아름답고 풍요로운 낙원에서 인생을 출발하였으나 이제는 그들이 하나님이 그토록 당부하셨던 금단의 열매인 선악과를 따먹음으로 말미암아 그 아담과 하와, 이 두 커플은 에덴에서 추방되어지게 된다. 이 아담과 하와는 단지 우리와는 다른 한 사람, 한 사람이 아니라 그들은 온 인류를 대표하는 대표자격인 인물들인 것이다. 만약 그들은 그들이고, 우리는 우리라는 식으로 생각한다면 우리들에게는 원죄(Original sin)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을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금방 태어나서 죽은 어린 아기나 갓난아기들에 대해 단호히 ‘그 애들은 죄가 없다!’라고 선언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어린아이조차도 ‘원죄’를 피해갈 만한 아무런 보장이나 보험이 없다는 것이다. 그 어린아이조차도 바로 인간이기 때문이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다 그러한 ‘원죄’를 갖고 이 땅에 태어나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중요한 것은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은 그 죄가 바로 내 죄라는 그것은, 바로 아담과 하와가 바로 우리들의 모든 인생을 대표하는 생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이 동산의 모든 실과와 열매와 소산물을 먹고 마시고 즐기도록 허락하셨지만 그 ‘선악과-선(善)과 악(惡)을 알게 하는 나무’를 따먹지 말도록 그토록 금지하시고 당부하신 것은 바로 사람의 인생의 가장 큰 행복과 영광스러움이 어디에서 오는지를 하나님은 알고 계셨기 때문이다. 어찌 사람을 만든 조물주, 창조주이신 그 분이 그 미세한 사람의 삶의 시작과 끝을 왜 알지 못하겠는가?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는 이를테면, 주인과 종의 관계가 아니었다.

주인은 자신이 고용한 종의 삶의 일거수 일투족을 다 알지 못할 뿐만 아니라 그 종의 삶의 전체를 책임질 수 없다. 종이 언제 죽을지, 언제 병들지, 언제 시련을 만날지 모른다. 주인은 단지 종을 일시적으로 돌보아주고 그 대가로 부려먹는 그런 위치인 것이다. 하나님과 사람과의 관계는 단순한 주인과 종의 관계가 아니었다.

 

 

 

 하나님과 사람과의 관계는 그렇다면 어떠한 관계였는가?

바로 조물주와 피조물의 관계였다. 창조주와 창조물의 관계였다. 그것은 마치 공장에서 어떤 물건을 만든 그 직공, 인부가 그 물건의 성질이나 특징을 다 알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우리는 자주 슈퍼에 가서 과자나 음료수나 기타 생필품들을 산다. 그 때 우리가 예를 들어 아이스크림 슈크류바을 샀다고 치자, 그 아이스크림을 둘러싸고 있는 겉 봉지에 그 아이스크림을 만든 재료와 원료와 그것은 언제까지 먹으면 안전하고 언제부터 먹게 되면 불상사-배탈이나 식중독과 같은-가 일어날지도 모르는 ‘유통기한’과 제품이 어디서 만들어졌는지 다 적혀 있다. 그것은 바로 그 아이스크림을 만든 아이스크림 제조자가 아이스크림의 속성과 성질과 성격과 특징을 다 알고 있기에 그렇게 자세하게 설명을 겉 봉지에다 적어 놓은 것이 아닌가? 이처럼 우리 하나님과 우리 사람과의 관계가 이렇다는 것이다. 아이스크림을 만든 이와 아이스크림과의 관계와 똑같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그 만큼 우릴 잘 아신다는 것이다.

우리의 감정과 이성과 의지가 어떻게 생겨먹었는지, EQ와 IQ, AQ 모두 다 잘 아신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질문할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은 우릴 그렇게 속속들이 잘 알고 계신다면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짓는 것도, 선악과를 따먹을 것을 다 알고 계셨을 것이 아닌가? 물론이다. 하나님은 그 인류의 시조인 그들이 어떻게 하실 것인지 알고 계셨을 것이다.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 보이는 것-자연만물, 사람, 동식물 등-을 만드셨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보이지 않는 것-공기, 사랑, 선함, 꿈 등-까지도 만드신 그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 왜 그것을 모르시겠는가? 과거와 현재와 미래조차도 모두 꿰뚫어보시는 그 분이 어찌 그런 한 인간의 미래와 삶을 왜 예언하시지 못하겠는가?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선과 악을 분별하여 선택할 수 있는 지혜, 분별력’을 이미 주셨다는 것이다.

 

 

 

우리는 아담이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당시의 에덴에 있는 모든 동물들의 이름을 지었다는 말씀을 알고 있지 않은가?

 

 

창2:19-20...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각종 새를 지으시고 아담이 어떻게 이름을 짓나 보시려고 그것들을 그에게로 이끌어 이르시니 아담이 각 생물을 일컫는 바가 곧 그 이름이라 아담이 모든 육축과 공중의 새와 들의 모든 짐승에게 이름을 주니라...

 

 

 아담은 이 지상에 있는 모든 동물들의 이름을 지었다. 예/기린, 코끼리, 호랑이, 뱀, 여우, 까마귀....

 

 

 

 

하나님은 아담에게 지적인 능력을 주셨다는 것이다.

 아담은 하나님께서 조성해 놓으신 선한 것들이 둘러싸고 있는 환경 가운데서 사람에게 있어 무엇이 선이 되고 무엇이 악이 되는지, 또한 악의 결과는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는 것이다. 바로 하나님께서 ‘먹지 말라’고 한 그것을 먹는 것이 악한 것이고 그 결과는 ‘정녕 죽게 되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일단 이 나무 자체가 선악을 알게 하는 능력을 지닌 것이 아니라는 점에 유의해야 한다. 이 하나님의 명령에서 무게 중심점은 그 명령 수단이 되는 ‘나무’가 아니라 ‘하나님의 명령 자체’에 놓여져 있다. 즉 하나님의 명령을 순종하는 것이 선이고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는 것이 악이라는 점이 그 핵심이지 하나님의 명령을 떠나 그 나무의 어떤 독자적인 선악을 알게 하는 능력이나 역할이 있는 것이 아니었다.

 

 

 한편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가 그 자체 독자적인 의미를 갖고 있지는 않지만 그 나무가 하나님의 명령의 도구로 사용되어질 때 부차적으로 의미를 갖는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일단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는 하나님께서 택하신 수단이기 때문에 그 수단에 합당하지 않은 행동을 취하는 것은 곧 하나님께 합당하지 않은 행동을 취하는 것이 된다. 만일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먹게 된다면 사람은 선악에 대한 경험적인 지식을 갖게 된다.

 

 

 

  아담은 이러한 선악과가 인생에 가지는 의미를 다 파악하고 있었다. 그런데도 왜 그는 굳이 선악과를 따먹어야만 했는가? 우리는 때때로 아담을 일컬어 이렇게 질문한다. 하나님은 왜 아담이 죄를 짓도록 만드셨으며 내버려두셨는가? 그러나 이제는 질문의 초점이 바뀌어야 한다.

 

 ‘왜 아담은 하나님이 그런 지혜와 예지와 능력을 주셨는데도 죄를 지어야만 했는가?’

 

  이해가 되는가?

 하나님은 아담이 죄를 짓기 전에 이미 이러한 지적인 능력뿐만 아니라 하와와의 결혼을 통하여 가족의 사랑을 체험케 하셨다는 것도 의미심장하다. 하나님은 가정이라는 성(聖)스러운 공동체를 통하여 자신의 계획을 성취하려고 하셨다는 것이다.

 

 

 

또한 더 나아가서 아담에게 하나님은 하나님의 임재의식에 대한 감수성을 주셨다는 것이다.

 

아담이 죄를 지었을 때 하나님은 아담에게 ‘네가 어디에 있느냐?’고 물었을 때 아담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숨었다고 성경은 말하고 있다. 이것은 아담이 하나님과의 관계에서의 거리에 대한 인식이 있었다는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아담에게 ‘땅을 정복하고 다스리라 생육하고 번성하라’(1:28)는 하나님의 땅에 대한 명령과 계획을 주셨을 때 아담은 이미 하나님의 의도와 목적을 다 이해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이처럼 아담에게

 

1.지적인 능력,

2.가정의 사랑,

3.하나님의 임재 의식,

4.하나님의 목적에 대한 충분한 이해함 을 주셨는데도 불구하고

 

 

그가 죄를 지었다는 것은 바로 인류 전체의 욕망이요,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교만한 반역이 여기서부터 출발되어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여러분들이 만약 에덴 동산에 있었다면 아담과 같이 선악과를 따먹지 않을 수 있었다고 장담할 수 있겠는가? 전 장담 못 한다. 여하튼 우리는 아담의 인류적인 죄를 통하여 죄의 진노의 자식으로 전락하게 되었다. 선악과를 따먹음으로 말미암아 순수하고 순결한 하나님의 가슴에 죄의 과도로 상처를 내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타락이라는 것이다. 성경은 3가지의 구조로 압축되는데 그것은 바로 ‘창조-타락-구속’이다.

 

 

 이렇게 아담과 하와의 인생은 출발되어졌다. 그들은 가인과 아벨을 낳았는데 여러분도 잘 알다시피 가인이 아벨을 쳐 죽이는 사건이 있고 시간이 좀 지나서 하나님께선 아벨 대신에 셋이라는 아들을 주신다. 셋의 부모인 아담과 하와는 아들의 이름을 이런 뜻에 지었다. ‘하나님이 내게 가인의 죽인 아벨 대신에 다른 씨를 주셨다’

 

 

 

 근데 그 다음 구절이 중요하다. 셋도 아들을 낳았는데 그 이름을 에노스라 지었다는 것이다. ‘에노스’란 말은 사람의 이름을 나타내는 고유명사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보통명사이기도 하다. 보통명사 때의 ‘에노스’는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란 의미이다. 인간들은 자신들이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임을 깨닫고서야 비로소 생명의 근원 되신 여호와 앞으로 나아갔던 것이다.

 

‘그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이 말은 그때 하나님을 향한 믿음이 생겼다는 것이 아니라 공적인 예배를 드리며 기도하기 시작했음을 의미하기도 한다.

 

 

 

  가인과 셋의 계보가 다른 점은 하나님의 이름을 기억하고 그분께 경배하는 삶을 사는지의 여부이다. 다시 말해 죽음에 대한 자각에서부터 참 생명의 삶이 추구되기 시작한 것이다. 죽음을 아는 것은 이처럼 중요하다. ‘아벨의 죽음’을 통하여 아담과 그의 가족들은 에덴동산이 아닌 세상이라는 땅에서 그들이 살아가고 있음을 경험하였다는 것이다. 인간은 생명을 계속적으로 유지하는 삶이 아니라 언젠가는 죽음으로, 흙으로 돌아간다는 현실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으며 자각하였던 것이다.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겠다.

 십자가 골고다 언덕에 세워진 예수님의 십자가를 보라.

‘골고다’의 뜻은 ‘해골’이라는 뜻이다. 왜 그 곳의 이름이 ‘해골’이었는지에 대하여는 대체로 세 가지 설이 있다.

 

 

첫째, 그 곳 지형이 마치 해골처럼 생겼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둘째, 그 장소가 예로부터 사형집행장으로 사용되었기에 여기 저기 해골들이 나뒹굴고 있었던 까닭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예수님께서 오시기 훨씬 이전부터 유대인 사이에 내려오던 전설로서, 바로 그 곳에 인류의 시조인 아담의 무덤이 있었고, 그 무덤에서 아담의 해골이 발굴되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한국 땅에 살고 있는 우리로서는 그 옛날 왜 그 곳의 지명이 ‘해골’로 명명되었는지 정확한 이유를 알 수 없다. 그러나 그 이유를 규명하는 것은 의미 없는 일이다. 중요한 것은 왜 예수님의 십자가가 이스라엘 전역에서 하필이면 ‘해골’이라는 이름의 언덕 위에 세워졌는지 그 이유를 깨닫는 것이다.

 

 

 해골이라 불리는 곳에 세워진 주님의 십자가를 한 번 머리속에 그려보자.

그 자체가 참으로 위대한 메시지가 아닐 수 없다. 해골이 죽음의 증거라면 십자가는 생명의 표적이다. 아무리 죽음이 난무하는 해골이라 할지라도 그 위에 십자가가 임하기만 하면, 위로부터 하나님의 생명이 그 십자가를 타고 내려 참 생명으로 거듭나게 된다는 것이, 골고다와 그 위에 세워진 십자가가 우리에게 응변하는 메시지이다. 이것이 바로 복음의 핵심이다. 이 진리를 인간들에게 분명하게 깨우쳐 주시기 위하여 주님의 십자가는 해골 언덕 위에 세워져야만 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누가 주님의 십자가를, 아니 십자가의 주님을 영접하였는가? 두말 할 것도 없이 인생이란 결국 해골일 수밖에 없는 존재임을 자각한 자, 다시 말해 자신이 에노스임을 통감한 자만 십자가의 주님을 인생의 주인으로 모실 수 있다. 죽음을 안다는 것은 이처럼 절대적이다. 죽음의 인식이야말로 참 생명의 시발점이다.

 

“당신은 해골이십니까”, “희망이 있군요!!!”-서로 고백해보라!!!

 

 

   그러기에 에노스는 곧 골고다 언덕이다. 죽음은 곧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계기와 기회를 만들었다. 주님의 죽음은 온 인류가 다시금 죄에서부터 소망과 희망을 가지게 된 기회를 부여받았던 것이다.

 

 

 예전에 제 주위에서 한 사람의 죽음을 목격하였다. 전혀 그럴 것 같지 않은 사람이었는데 그 분은 자살을 하였다. 이혼하고 그러하여서 그 고통을 견디다 못 해 생을 달리하였다. 여러분들에게도 죽음과 같은 체험이 있을 줄 안다.

 

 

  죽음이 아니면 ‘죽음’을 방불케 할 정도의 극심한 환란과 고통과 어려움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에노스’에 대한 자각함을 인하여 하나님께 더 접붙임 되어져야 할 것이다. 골고다, 해골 같은 삶의 일그러진, 아골 골짜기 같은 힘듬과 격정이 있을지라도 그것으로 인하여 생명의 주님을 더 바라보아야 할 것이다. 우리 주님께서 골고다 해골 위에 십자가를 세우셨다는 것은 우리의 소망이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대목이 아니고 무엇인가? 에노스는 곧 생명이요, 골고다는 곧 영생의 길이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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