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설교는 졸업예배 때 설교한 내용입니다.
시작과 끝은 우리의 모든 인생에 산재해 있습니다. 전도서 3장에서는 모든 인생의 시간에는 때가 있다고 했습니다. 시작의 때가 있으면, 끝의 때가 있는 법입니다.
오늘 창세기 22장은 아브라함의 시험을 받는 대목입니다. 엄격한 시험대에 서 있는 아브라함입니다. 이 시험은 아브라함에게 끝이었습니까? 시작이었습니까? 그 결론적인 대답은 여러분의 머릿속에 그려두고 같이 한번 말씀을 보기를 원합니다.
우리는 인생을 살아가면서 많은 시작과 끝은 경험합니다. 요즘 신문 머릿기사에 이런 기사가 떴다고 합니다.
‘청춘이라고 쓰고 절망이라고 읽는다’
요즘 시대는 4포(抛)의 시대, 4포의 세대라고 합니다. 요즘 젊은이들이 4개를 포기하는 시대라고 합니다.
첫째, 연애를 포기합니다.
둘째, 인간관계를 포기합니다.
셋째, 결혼을 포기합니다.
넷째, 출산을 포기한다고 합니다.
현실적으로 청년들이 살아가기가 힘든 세상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제 꽃도 피우기전의 젊은이들이, 시작하기 전의 인생들이 끝을 생각하는 우울한 분위기입니다. 우리의 시대가 살아가는 것이 점점 더 쉽지만은 않은 세상이 될 것입니다. 아직 선진국의 대열에 서기에는 조금 모자라지 않는 가 싶습니다. 우리 나라의 정치와 경제, 그리고 모든 문화, 교육과 더 나아가 국민의 정신(멘탈)의 문제까지 아직 그 선진국의 대열에 서기에는 아쉬운 대목이 있다고 저는 개인적으로 생각합니다. 이런 다소 이런 시대와 세상을 살아가는 것 자체가 우리 인생 모두에겐 시험의 연속이라고 볼 수도 있겠습니다. 하지만 인생도, 우리의 신앙도 이런 시험을 거치면서 성장하는 것은 분명합니다.
오늘 본문의 아브라함은 부자였습니다. 재물이 많았습니다. 수많은 종들을 거느리고 있었습니다. 조카 롯이 위기에 처했을 때, 자기 개인 경호원(특수사설경호원)들 318명을 데리고 가서 엘람동맹국들을 무찌르고 안전하게 조카를 구해 돌아올 정도였습니다. 오로지 아쉬운 것은 사라의 아이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후처인 하갈에겐 아이가 있었습니다만, 아브라함의 정식부인인 사라에겐 아이가 없다는 것이 아브라함에겐 가장 큰 아픔이었고 상처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 모든 걱정과 상처와 아픔을 한방에 날려주셨습니다. 그래서, 그 모든 걱정은 끝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또 다른 시험이 시작되고 있습니다. 아들문제로 인한 시험이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이제 아브라함의 신앙은 바로 그런 시험을 앞두고 있습니다. 그런데 주체는 바로 하나님이셨습니다.
“과연 하나님은 약속을 지키실까?
과연 하나님은 약속, 언약을 지키시기 위해서 이러한 시험을 주시는걸까?"
여러 가지 생각이 들게 하는 대목입니다.
본문의 상황이 그렇습니다.
그 일 후에-
하갈과 이스마엘을 21장에서 쫓아냈다. 이제는 독자가 이삭밖에 없습니다..
①아브라함은 아내의 부탁과 일치된 하나님의 명령에 의해서 하갈과 이스마엘을 쫓아냅니다.
이제 하나님은 오로지 이삭만이 약속의 아들, 언약의 아들이라는 것을 끊임없이 아브라함에게 계속 강조하고, 주지시키고 있고, 상기하기를 원하시는 의도가 담겨있습니다.
②아비멜렉과 그 군대 장관 비골의 축복
이 사람은 아브라함을 보더니만 21:22에
‘네가 무슨 일을 하든지 하나님이 너와 함께 계시도다’
주위 사람들에 의해서도 아브라함의 믿음은 드러났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 가운데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믿음을 테스트하십니다. 우리가 잘 나가고 있을 때, 우리가 모든 상황과 환경이 내 편이라고 여겨질 때, 그 때 생뚱맞게! 하나님은 한 번씩 브레이크를 거실 때가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릴 망하게 하려고, 우리가 잘 되는게 샘나서 그러시는 게 아닙니다. 우리가 잘 나가면 배가 아파서, 우리가 고통당하면 오히려 기뻐서 어쩔 줄 몰라하는 분이 아니십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한 번 우리를 다듬어 가시기 위함이다. 더 나은 그릇으로 만들어가기 위함입니다.
야구선수들 보면 투수 중에 어떤 친구는 공을 손에서 놓지 않는다고 합니다. 공이 자신의 몸의 일부인양 늘 들고 다니면서 공과 친해지는 것입니다. 미국의 홈런왕이 타격을 잘 하기 위해서 훈련을 하다보니 그 야구공이 처음엔 자그만했는데, 나중에는 ‘수박’만하게 보인다고 한답니다. 그런 훈련처럼, 오늘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다듬어가는 훈련이 필요했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생각지도 못한, 우리에게 한 번도 생각지도 못한 일들을 계획하시고 그것을 우리에게 보여주십니다.
여러분에게 주어진 필드는 암담한 현실가운데 이제 새로운 시작입니다. 이제까지 받은 교육기관의 훈련을 끝으로 이제 삶의 새로운 훈련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또 다른 시작을 위한 또 다른 훈련을 지금 준비중이십니다.
아브라함이 그러했습니다.
하나님의 그 브레이크! 아브라함을 향한 하나님의 시험은 어떻게 시작되었습니까?
그래서 2절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라고 했다. 소유격 네, 네를 반복강조하고 있다. 아브라함의 입장에서 얼마나 갈등이 되었을까? 하지만 그는 주저하지 않았다.
그를 번제로 드리라(2절)
하나님의 핵심요지이다. 번제는 영어로 burnt offering이다. 다 태워진 가운데 드려지는 제사, 제물, 헌물이란 말이다. 다 태워져야 한다. 모든 제사가 다 불(火)과 관계가 있지만 번제는 더 그렇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삭, 바로 한 사람, 2절에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이라고 분명히 아브라함이 가장 사랑하는 자가 바로 그 아들임을 뻔히 알면서도, 번제라는 말을 넣어 ‘그를 번제로 드리라’고 하신다.
번제burnt offering(불살라 하나도 남김없이 다 태운다)
구약시대의 가장 대표적인 제사.
기본 정신: 제물을 조금도 남김없이 온전히 불태워 버리는 것! 다른 제사는 불사르고 나서 남은 것은 사람이 가지지만, 이것은 하나님께 모든 것을 다 드리는 번제이다. 제사를 드리는 사람이 제물을 통해 자기 자신을 하나님께 온전히 드리는 것이다. 하니님에 대한 철저한 ‘자기 부인’, 온전한 ‘자기의탁’이다. 번제는 예배의 영원한 모본, 예배= 하나님께 대한 자기부인과 자기의탁이기 때문.
*방법:
a, 번제는 제사드리는 사람이 제물의 머리에 안수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b, 번제의 제물은 제사를 드리는 사람이 잡아야 한다.
그는(제물을 바치는 자) 여호와 앞에서 그 수송아지를 잡을 것이요(손으로 잡는 것이 아니라 죽이라는 말이다), 아론의 자손 제사장들은 그 피를 가져다가 회막 문 앞 제단 사방에 뿌릴 것이며 그(제물을 바치는 자)는 또 번제물의 가죽을 벗기고 각을 뜰 것이요 제사장 아론의 자손들은 제단 위에 불을 붙이고 불 위에 나무를 벌여놓고
많은 사람들의 오해와 착각: 제사는 제사드리는 자는 제물만 바치고, 바쳐진 제물은 제사장이 잡는다? 그러나, NO! 제물을 바친 사람의 일은 짐승을 죽인 후에도 가죽을 벗기고, 살코기의 각을 뜨며, 내장과 다리를 씻는 일까지 모두 직접 해야 했다. 그러면 그제서야 제사장은 제물의 피를 뿌리고, 각으로 떠진 살코기와 잘 씻어진 내장과 다리를 불 위에 올려 태우는 일만 했던 것.
번제 드리는 사람의 일은 뒷짐 지고 구경하는 것이 절대 아니었다. 제물 잡는 일은 철저하게 자기 소관이었다. 제사장이 오히려 그 번제자가 한 일을 마무리하는, 바치는 역할만 했던 것이다. 제물을 바치는 사람은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가죽을 벗기고, 각을 뜰 때의 피비니린내와 내장과 다리를 씻을 때의 역겨운 냄새와 악취를 감수해야 했다. 그러나 그 과정이 있어야 제사가 살아있는 제사가 될 수 있었다. 아브라함은 지금 이 번제를 손수 해야만 하는 것이다. EX)롬 12:1 산 제물 living sacrifice
물론 지금 족장시대이기 때문에 모세오경에서 제시된 제사법이 확실하게 보여지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 제사의 자세와 태도는 동일하다고 생각합니다. 번제라는 말은 아브라함이 사랑하는 자식 아들을 직접 손으로 잡아서 죽여서 하나님께 다 태워 드리는 것입니다. 그것이 번제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지금 요구하시는 것은 번제의 정신이요, 자세입니다.
지금 아브라함은 ‘네 사랑하는 네 독자 이삭’을 내려놓아야 하는 순간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죽는 시간이다. 자신의 목을 치고, 자신의 몸과 마음을 온전히 하나님 앞에 내어놓는 시간이다. 완전한 굴복, 완전한 자기부인이어야 한다. 그것이 번제의 정신입니다.
아브라함, 침묵으로 순종을 실행하다
생명을 창조하시고 생명을 사랑하신 하나님 아버지께서 어찌 이런 얼토당토한 명령을 하신단 말인가?
하지만 아브라함은 어떻게 했는가?
아브라함은 시종일관 침묵으로 순종했다.
3절에 누구랑 같이 모리아산으로 가는 길을 떠났는가?
아브라함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나귀에 안장을 지우고 두 종과 그의 아들 이삭을 데리고 번제에 쓸 나무를 쪼개어 가지고 떠나 하나님이 자기에게 일러 주신 곳으로 가더니
그들의 여행길은?
4절에 3일 길이었다. ...제삼일에...
만약 중간에 아브라함이 자신의 처지와 하나님의 명령을 이야기했다면 두 종이 아브라함이 나이가 들더니만 노망을 했다고, 노인네가 실성을 했다고 욕하면서 말렸을 것이다. 그리고서 급히 요즘 같으면 사라 사모님에게 전화를 걸었을 것이다. 아니면 경찰을 부르던지 해서 어떻게 제지를 했을 것이다. 또한 이삭은 너무나 충격에 휩싸여 아브라함 곁에서 도망치진 않았을까? ‘엄마!’ 하면서 ‘우리아이가 달라졌어요!’가 아니라 ‘우리 아빠가 맛이 갔어요! 우리 아빠가 제정신이 아닙니다!’ ‘살려주세요!’라고 하면서 집으로 come back home하진 않았을까?
그런데 아브라함은 어땠는가?
끝까지 침묵했다.
3절: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벌써부터 준비를 서둘렀다. 사람의 마음이란 것이 언제든지 흔들릴 수 있는 부분이기 때문에, 이렇게 액션을 취한 것은 8절의 아브라함의 대답에서 볼 수 있다.
8절을 한 번 읽어보자!
내 아들아 번제할 어린 양은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시리라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신뢰했던 것이다. 비록 자신의 아들의 생사를 알지 못하지만 자신을 인도해 오신 하나님을 믿었던 것이다. 갈대아우르에서 자신을 우상의 도시에서 불러 약속의 땅으로 인도해 오신, 도저히 생산할 수 없는 100세 나이에 이삭을 주신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믿었던 것이다.
우리는 지금 아브라함의 스토리, 레전드스토리를 다 알고 있지만 아브라함은 현재진행형의 스토리였다. 자신의 외아들의 생사를 알 수 없는 가운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믿고 신뢰했던 것이다.
-내 아들아 번제할 어린 양은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시리라
이것이 아브라함의 믿음의 고백이기도 하지만, 자기 아들 이삭을 포기한 아브라함의 결연한 뜻을 드러내는, 내려놓음의 포기의 정신이기도 하다. 아들 이삭을 번제물로 바치는 것이기에 차마 말을 하지못해 거짓말로 둘러댔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의 고백대로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을 살려주신다. 순종의 댓가였다.
하나님의 입장 | 하나님은 100년동안 기다렸던 아들, 이삭을 아브라함이 얼마나 사랑하는지 잘 알고 있다. 불임의 세월이 지속될 때,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은 75세에 약속을 주시고, 100세에 그 약속의 결과를 보게 하셨다. 그런데 느닷없이 지금 와서 이삭을 번제물로 바치라는 것은 하나님의 시험하시기 위한(1절) 의도이다. 하나님은 정말 아브라함의 믿음을 테스트하길 원하셨다. 약속을 받았지만, 그 약속을 받을만한 그릇이 되는지, 자격이 되는지 하나님은 한번 더 검증하신 것이다. 무작정 하나님의 복과 선물과 약속을 주어봤자, 그 받는 당사자가 그 선물의 소중한 가치를 알지 못한다면, 주는 사람 기분이 나쁘기 때문이다. 정말 복과 선물의 가치를 제대로 알 때 하나님은 그 복을 손에 쥐어주길 원하셨던 것이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의 미래, 우리의 앞날, 우리의 내일은 어떤 시험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하나님은 지금도 살아계신다는 사실이며, 그 하나님은 지금도 우리의 삶을 인도하시는 신실하신 분이시라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아브라함에게 행하셨던 그 모리아산의 엄격한 시험대를 우리에게 보이지 않게 행하시고 계십니다. 창 22:13-14 –예비(준비)하시는 하나님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살펴본즉 한 숫양이 뒤에 있는데 뿔이 수풀에 걸려 있는지라 아브라함이 가서 그 숫양을 가져다가 아들을 대신하여 번제로 드렸더라 아브라함이 그 땅 이름을 여호와 이레라 하였으므로 오늘날까지 사람들이 이르기를 여호와의 산에서 준비되리라 하더라 여호와 이레: ‘여호와께서 준비하시다, 예비하신다’ 이삭...번제에 쓸 장작을 매고 올라감, 아브라함: 하나님께서 친히 제물을 준비하실 것이다! 준비자, 예비자 하나님! 우리의 쓸 것을 미리 미리 준비하시는 하나님!!! 아무리 가난해도 아기를 낳기 전에 미리 아기용품을 사두는 것이 부모의 모습이다. 창세기의 순서를 보라! 모든 것을 예비해두신 뒤에 사람을 만드셨다! 만약, 사람을 젤 먼저 만들어놓았다면 과연 사람이 생존이 가능할까?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얼만큼 사랑하느냐?” “정말 사랑하느냐? 그러면 네 손을 든 것을 놓아라! 네가 움켜잡고 있는 것을 내려놓아라!” Ex) 막내 아들에게 묻는다. ‘아빠가 좋아? 폴 리가 좋아?’ 이 아이의 대답은 언제나 아빠가 아닌 장난감이다. 아브라함은 그 테스트에 너끈히 통과했다. 여러분들도 그 테스트를 넉넉히 통과하시길 소원한다. 아브라함에게 모리아산이 끝이라고 생각했지만, 오히려 그 끝은 또 다른 시작을 의미한다. |
하나님은 단순히 아브라함의 믿음을 시험하신 것이 아니다. 또한 하나님은 언약 관계를 맺고 있으려면, 그 대가가 아무리 커도 완전히 순종해야 한다는 사실을 증명해 보이셨다.
2> 당신이 소중히 여기는 물건이나 사람들, 이런 모든 것보다 하나님이 더 중요한지 생각해보라.
내가 소중히 여기는 물건 |
내가 사랑하는 사람 |
하나님보다 더 소중한 것을 내려 놓으라!
그건 끝이 아니라, 시작이다. 끝은 또 다른 시작임을 기억하라!
하나님 앞에서 내 것을 놓으면, 모든 것이 끝이라고 생각하지만, 거기서 시작이 출발한다는 것을 기억하라.
“모든 것을 잃어도 하나님을 얻으면 모든 것을 얻는 것이다.
모든 것을 얻어도 하나님을 잃으면 모든 것을 잃는 것이다."
나는 하나님의 엄격한 시험대 앞에서
과연 어떤 삶과 어떤 평가를 받을 수 있을 것인가?
아브라함은 자신의 자식, 이삭의 인생이 끝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그 끝은 또 다른 시작이었습니다.
Epilogue...
“지금 이 배는 나가는 배가 아니고 들어오는 배입니다.”
-데이빗 A. 씨맨즈의 <좌절된 꿈의 치유> 중에서 한 설교자의 일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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