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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사도행전

사도행전 17장 10-16절 하나님 나라 시민증은 무엇입니까

by Message.K 2021. 9.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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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17:10-16을 텍스트로 하여 '하나님 나라 시민증은 무엇입니까?'란 주제로 한 설교입니다.  

 

 

 

바울과 실라는 밤에 데살로니가에서 도망하여 약 100km쯤 떨어진 베뢰아로 향하였습니다. 그들이 그곳으로 도망간 것은 그들의 안전을 위해서이기도 하지만, 그곳에서도 복음을 전파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베뢰아에서 디모데와 다시 합류하게 되었습니다. 여기에도 역시 유대인의 회당이 있었기에 거기서도 복음을 전했습니다(10절). 그런데 베뢰아의 유대인 공동체는 데살로니가의 유대교도들과는 전혀 다르게 복음에 대해 반응했습니다.

 

 

  오늘 11절의 본문에서는 더 너그러워서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았다고 합니다. 이전 개역한글 성경에서는 ‘신사적이었다’고 했습니다. 신사적이었다는 말은 ‘편견이 없어서’말씀을 잘 받아들였다는 말입니다. 너무나 간절한 마음이 있었기에 그들은 단지 일주일에 한번 안식일에만 바울은 만나는 것이 아니라 날마다 그를 만나 매일 대화를 나누면서 성경을 상고했습니다.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한’

 

그들의 접근 절차는 어떤 새로운 형태의 종교적 가르침을 받아들이는 압력이 들어올 때 모든 사람이 본받을만한 절차인 것입니다. 바울은 베뢰아 성도들의 근면함과 편견 없는 개방성에 대해 칭찬하고 있습니다. 또한 복음에 대한 수용성과 비판적 질문을 겸비하며 ‘상고했다’는 말은 ‘자세히 공부하다’라는 뜻의 사법적 조사에 사용된 동사입니다. 그래서 베뢰아적이라는 형용사는 편견없이 주의깊게 성경을 연구하는 사람들에게 적용되어 오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 어떤 태도로 받고 있습니까?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연구하고 상고한 베뢰아 성도들처럼 우리에게도 그러한 신사적인 성경상고의 자세가 필요합니다. 말씀을 가지고 자신을 적용하고 생각하고 묵상하는 태도는 우리가 본받아야 할 자세입니다.

 

 

 

 이 바울이란 설교자가 전하는 이 복음이 과연 내 인생을 바꾸어 놓을만한 가치 있는 종교이며 신앙이며 체계인가? 내 인생을 송두리째 바꾸어 놓을만큼 의미 있는 일이며, 영생을 걸고 내어 놓을만한 사안인가? 그런 진지하고 심각한 질문을 하면서 마치 법관이 법정에서 조사하며 연구하듯이 말씀을 대했다는 부분은 우리가 다시금 새겨들어야 할 대목입니다. 수많은 설교자들이 회당에서 설교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바울이 전한 그 설교와 복음은 베뢰아 사람들을 흔들어놓기에 충분했습니다.

 하지만 데살로니가에서 전한 복음과 베뢰아에서 전한 바울의 복음은 전혀 다른 것이었습니까? 아닙니다. 동일한 복음입니다. 복음이 전파될 때, 받아들이는 자의 자세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주는 대목이기도 합니다. 우리에게도 이러한 말씀을 받는 숭고한 자세가 필요하겠습니다.

 

 

 

  바울과 실라의 전도팀이 데살로니가에서 그렇게 쫓겨왔지만, 베뢰아의 헬라의 귀부인과 남자들이 적지 않게 복음을 수용하는 것에 대해 큰 위로를 경험했을 것입니다. 우리가 복음을 전하면서도 그런 경우가 있지 않습니까? 심각한 냉대와 비판과 반대와 거절을 경험하고 복음의 현장을 떠나왔는데, 다른 곳에서 복음을 잘 받아들이고 순종하는 경험을 하게 되면 우리의 이전의 부정적인 생각들과 경험들이 묻히는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우리가 어떤 상황가운데 처한다 할지라도 복음을 위하는 자는 복음으로 말미암아 살게 될 줄 믿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우리가 먼저 복음을 전하면서 이 복음이 과연 그러한가 하는 깊이있는 상고의 자세와 복음의 진리에 대한 확신이 서야 합니다. 그 확신있는 복음이 증거될 때, 받는 자들도 더 강력하게 받아들이는 역사가 있을 것입니다.

 

 

 

 베뢰아에서 큰 위로를 경험하고 있을 때, 데살로니가의 유대인들이 바울을 또 따라와서 소동을 일으킵니다. 따라서 기독교인들은 바울은 아덴까지 뱃편으로 호송하게 됩니다. 그러나 실라와 디모데는 베뢰아에 남아있게 됩니다. 아마도 바울은 배를 타고 480km가 넘는 길을 항해했을 것입니다. 바울은 다시 실라와 디모데를 속히 아덴으로 오라고 명령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배를 타는 것을 굉장히 싫어했던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바울은 심한 배멀미와 배울렁증을 내려놓으면서까지 복음사역을 감당했음을 볼 수 있습니다. 복음을 전하는데 왜 이런 고난과 아픔이 다가오는가 우리는 종종 의아할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우린 바울을 통해 위로를 받습니다.

 

 베드로전서 3:17

선을 행함으로 고난 받는 것이 하나님의 뜻일진대 악을 행함으로 고난 받는 것보다 나으니라

 

 복음을 전하는 선한 사역을 통해 고난받는 것은 하나님의 계획이고 뜻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복음을 전하거나 아니면 가정의 어려운 환경 가운데서도 믿음으로 살려고 고군분투하는 삶을 통하여서 하나님께서 더 기뻐하실 것입니다. 선을 행함으로 고난받는 것에 당황해하지 말고 오히려 감사하고 또 감사하는 영혼들 되시길 바랍니다. 바울은 데살로니가에서 반대에 부딪히다가 베뢰아에서 조금 나아지는가 했더니만, 또 소동이 일어나 아덴으로까지 도망가게 됩니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우리의 삶의 고난과 아픔이 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나의 죄악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고난이라면 더 감사하고 참아낼 수 있는 은혜를 달라고 기도합시다. 베뢰아인들의 신사적인 마음을 가슴에 담고서 아덴으로 떠나가는 바울의 심정을 한번 그려봅시다. 그것이 복음사역자, 복음전도자의 운명임을 바울을 다시 한번 생각하면서 자신의 마음을 다잡았을 것입니다.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도 많은 환난과 고난이 있을 것입니다. 그것인 복음을 위한 고난이라면 믿음으로 잘 감당하시길 바랍니다. 하나님의 위로와 은혜가 있을 줄 믿습니다.

 

  오늘 복음을 믿음으로 받아들인 베뢰아인들의 신사적인 심령을 우리가 소유하길 원합니다. 더 나아가 우리가 복음을 위해 수고하더라도 고난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그 가운데서도 바울처럼 의연히 고난을 이겨내면 나아가는 하나님의 백성들 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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