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성경 누가복음 23:46의 본문을 가지고 <아버지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란 주제로 한 설교입니다. 아래의 설교는 오늘 설교문보다 짧게 기록되어졌네요.
Prologue...
오츠 슈이치의 베스트셀러 '죽을 때 후회하는 스물다섯 가지'란 책이 있습니다. 1000명의 죽음을 지켜본 호스피스 전문의가 말하는 죽을 때의 후회를 적어놓은 책입니다. 여러 가지 이야기들을 적어 놓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고맙다는 말을 많이 했더라면'라는 이란 보편적인 이야기부터 시작해서 '나쁜 짓을 하지 않았더라면', '감정에 휘둘리지 않았더라면', '죽도록 일만 하지 않았더라면', 등의 후회도 있고, '고향을 찾아가보았더라면', '맛있는 음식을 많이 맛보았더라면'등의 특이한 후회도 있었다. 전라도 계신 여러분들은 다들 미식가라서 이런 후회는 안 하셔도 되겠습니다. 건강에 대한 후회도 있었습니다. '건강을 소중히 여겼더라면, 좀 더 일찍 담배를 끊었더라면, 건강할 때 마지막 의사를 밝혔더라면' 등의 후회도 있었습니다. '가고 싶은 곳으로 여행을 떠났더라면, 기억에 남는 연애를 했더라면' 등. 인간적이면서도 쉽게 공감할 수 있는 감성적인 터치가 주를 이루는 그런 이야기들, 죽을 때 후회하는 25가지를 적어 둔 것을 조금은 무덤덤하게 본 기억이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과연 죽을 때가 되었다고 한다면 무엇에 대해 후회하겠습니까? 무엇을 후회하시렵니까? 애플사의 스티브 잡스는 열 일곱 살 때 '하루 하루가 인생의 마지막 날인 것처럼 산다면 언젠가는 바른 길에 서게 될 것'이라는 글을 읽고 죽음을 자신의 삶의 하나의 귀한 기준점을 잡고서 인생을 낭비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무엇보다도 삶과 죽음에 대한 분명한 해석이 존재하기에 더 아름다운 삶의 열매를 남기고 살 수 있어야 한다고 확신합니다. 후회가 없을 수는 없겠지만 그 모든 후회 또한 영원한 생명의 연장선상에서 생각할 때 오히려 감사가 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오늘 인류의 구원자로 오신 예수님, 그 예수 그리스도의 마지막 최후는 그 어떤 후회나 미련이나 아쉬움이나 더 이상의 집착을 볼 수가 없습니다. 완전하신 주님께서 온전한 삶을 사시고 완전한 죽음으로 생을 마감하셨습니다. 그 죽음의 문 앞에서도 주님은 완벽한 문장으로 자신의 삶을 마무리 지었습니다. 가상칠언의 마지막 말씀을 오늘 같이 나누고자 합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이 고통 가운데 눈을 감고 머리를 떨어뜨리고 계신지 벌써 오랜 시간이 지났습니다. 그 모습이 너무도 처참할 뿐 아니라 끔찍하기까지 했습니다.
"저 사람이 도대체 무슨 죄를 지었길래 저토록 비참하게 죽어가야 한단 말인가?", "정말 예수란 저 친구가 죄가 많았던 것일까?"
그런 생각을 하면서 양심의 자맥질을 하는 군중들, 사람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서 십자가상의 예수님에 대해 안타까워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갑자기 이상한 기후의 변화가 찾아왔습니다.
찬송가 143장(나같은 죄인 살리신) 3절
주 십자가 못박힐 때 그 해도 빛 잃고 그 밝은 빛 가리워서 캄캄케 되었네!
온 하늘까지도 힘을 잃었고 갑자기 어둠이 온 땅을 덮쳤습니다. 그냥 단순한 우연의 일치입니까? 그리고 세상을 환하게 비추던 해는 그 빛을 잃었습니다. 마치 빛으로 이 땅에 오신 주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계신 것과 같이 낯을 환하게 비추던 빛이 그 빛을 잃고 어둠 속에서 눈물을 흘리는 것 같았습니다. 무정한 인간이 하나님의 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을 때 자연은 오히려 그 힘을 잃고 주님의 죽으심 앞에 경건의 마음을 울리는 것 같았습니다. 만물의 영장인 인간은 자기의 죄로 말미암아 죽으신 예수님에 대해 아무런 감정도 느끼지 못했지만, 오히려 자연은, 천지는 예수님의 죽으심에 깊은 슬픔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런 와중에 갑자기 성소에 있던 휘장이 꿈틀대기 시작했습니다. 무엇인가 심상치 않은 일이 일어날 것 같습니다. 그러더니 휘장 가운데가 위로부터 아래로 찢어지기 시작했습니다. 사람들이 놀라고 아수라장이 되었습니다. 이 광경을 지켜보던 성전의 관리자가 대제사장과 장로들과 서기관들에게 달려갑니다. 그리고 소리칩니다.
"큰일났습니다. 성소의 휘장이 찢어졌습니다."
성소의 휘장은 거룩한 담이자 경계였습니다. 해마나 일 년에 한 번씩 대제사장이 그 성소의 휘장을 지나가 하나님께 이스라엘 백성의 죄를 위해 제사를 지내던 곳입니다. 히 9:71) 1년에 한 번, 오직 1 사람만이 유일하게 출입할 수 있는 그 신성불가침의 공간이, 절대 사람들에게 보여질 수 없는 공간이 오픈되어진 것입니다.
절대로 아무도 마음대로 들어갈 수 없는 곳입니다. 이 휘장은 바로 인간의 죄 때문에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 하나님이 거하시는 거룩한 곳인 지성소를 가리고 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 휘장이 찢어졌다는 것입니다. 실밥이 풀어져서 느슨해져 있다가 휘장이 떨어진 것이 아니라 휘장이 찢어진 것입니다.
마태복음 27:51에서는,
이에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고 땅이 진동하며 바위가 터지고
라고 기술되어 있습니다. 성소의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로 찢어진 것입니다.
예전에 이런 찬양이 있었습니다!
휘장을 지나 담대히 주님의 보좌 앞에
주께서 뿌린씨로 맺은열매 향기로운 제물들고
우리 입술의 찬양드리며 주님을 송축하리...
그렇습니다. 우리 인간은 그동안 죄 때문에 하나님 앞에 도저히 나아갈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대속 제물인 예수님의 십자가의 찢기신 몸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제는 예전 구약시대의 그 어떤 짐승의 제물을 들고, 피를 뿌려가며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이 필요 없게 된 것입니다. 이제는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새롭고 산길이 열렸습니다. 히 10:19,202)
이러한 성소의 휘장이 찢어지는 일이 일어난 직후에 십자가에 못 박혀 계신 주님께서 마지막으로 외치십니다.
아버지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마지막까지 하나님의 뜻을 순종하며, 당신의 영혼까지 주께 맡기는 철저한 헌신과 순종을 의미합니다. 죽음의 최후까지 하나님의 아들로 아버지의 뜻을 따라 십자가에서 죽음을 맞이하시는 주님이십니다. 그리고 주님의 사역의 끝이 되는 십자가에서의 죽음을 통해 예수님의 사역의 최종적인 영광을 받으실 분은 바로 하나님 아버지시라는 것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땅에 나게 하신 분도 하나님 아버지이셨고, 그 아들을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날 내가 너를 낳았도다'라고 격려하셨던 분도 하나님이셨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게 하신 것도 아버지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나면서부터 죽음에 이르기까지 순종하며 행하셨던 예수님의 사역을 잘 보여주는 부르짖음입니다.
"아버지여, 당신의 뜻을 순종하며 따른 아들입니다. 이 고통스러운 십자가의 죽음까지 참고 따랐나이다. 이제 제 영혼을 아버지 손에 맡기나이다."
"내 영혼의 안식처는 바로 하나님 아버지 당신의 손에 있습니다."
주님은 마지막으로 “아버지,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라고 기도하고 숨을 거두십니다. 마치 주님의 영혼이 주님의 손에 있다가 하나님 아버지께 넘겨진다는 뜻 같습니다만, 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주님의 영혼이 언제 아버지 하나님과 분리되어 있었던가요? 그렇지 않습니다. 체포되시던 날 밤, 겟세마네 동산에서 그토록 고뇌하며 기도하신 이유는 하나님과의 그 온전한 연합을 지키려 하신 것 아닌가요? 주님은 언제나,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계신다고 강조하셨습니다. 그러니 이 기도는 주님께 있던 무엇을 아버지 하나님께 돌려 드린다는 부분적인 헌신과 드림의 뜻이 아니라, 주님의 전 존재를 다 드린다는 뜻입니다.
"아버지여, 당신의 뜻을 순종하며 따른 아들입니다. 이 고통스러운 십자가의 죽음까지 참고 따랐나이다. 이제 제 영혼을 아버지 손에 맡기나이다."
“아버지,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라고 기도드릴 때, 주님은 완전히 비워지셨고 가장 깊은 나락으로 떨어지셨습니다. 주님은 형틀에 묶인 시체에 불과했습니다. 누가 무슨 폭력을 가해도 다 받고 참아야 하는, 무력하고 비참한 상태였습니다. 아무것도 해 볼 수 없는 철저한 무력 상태, 그것이 십자가가 상징하는 바입니다.
바로 그 순간 인류 역사의 수레바퀴가 반대로 돌기 시작했습니다. 어느 신학자의 표현대로 주님은 역사의 수레바퀴를 되돌리기 위해 몸으로 막다가 그 바퀴에 말려 들어가 죽으셨습니다. 그 바퀴는 주님의 살점과 피로 범벅이 되어 서서히 멈추었고 마침내 반대로 돌기 시작했습니다. 주님이 두 팔을 벌리고 십자가에 달려 모든 것을 포기하고 만물의 찌꺼기처럼 되셨을 때, 그 일이 일어났습니다. 주님이 가장 약해지셨을 때 가장 위대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고전 1:18의 말씀처럼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너무나 약해보였고, 연약해보였고, 없어보였기 때문에, 세상의 눈에는 미련하기 짝이 없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 십자가를 거절하고 거부했는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구원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적고 있습니다. 그 십자가는 바로 '하나님의 어리석음과 하나님의 약하심'(고전 1:25)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어리석음이 사람보다 지혜롭고 하나님의 약하심이 사람보다 강하니라'
고 적고 있습니다. 지금 예수님께서 조롱하던 무리들이 이야기한 것처럼 네 자신부터 먼저 구원해보라! 십자가에서 내려와 보라!고 했을 때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훌훌 털어버리고 십자가에서 자신의 육신을 쉽게 구원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사람의 강함과 사람의 지혜를 선택하지 않으시고 하나님의 어리석음, 하나님의 약하심을 선택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어리석음과 하나님의 약하심'의 선택은 십자가상에서 죽는 것이었습니다. 장엄하게 그것이 때로는 굉장히 비참하고 너무나 보잘것 없어 보이는 죽음이었지만 그것은 하나님의 지혜였고 하나님의 강함이었습니다. 능력이 많은 자는 능력이 적은 자 앞에서 굽신거리거나 자신의 능력을 알아달라고 잘난체하거나 자랑하지 않습니다. 살아계신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자신의 생각과 지혜를 알아달라고 세일즈맨처럼 굽신굽신거리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어리석음과 하나님의 약하심을 따라 십자가에서 자신의 마지막을 마치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살아가면서 얼마나 자주 하나님의 어리석음과 하나님의 약함을 선택합니까? 세상은 언제나 한방에 어떻게 해버리고 한꺼번에 보기좋게 해치우는 것을 좋아합니다. 멋도 있고, 폼도 나고, 보기에도 좋고, 먹기에도 좋고... 그러나 언제나 하나님은 아주 작은 것에서부터 하나님의 큰 능력을 키워가시기를 기뻐하셨습니다. 겨자씨만한 믿음을 통해 세상을 옮길만한 믿음의 능력을 보기를 원하십니다. 정말 세상적으로 볼 때는 때때로 포기해버리고 싶고 '정말 나 같으면 그 사람하고 일 안한다'고 하면서 두 손 털어버릴 수 있는 수많은 순간이지만, 우리를 참으시고 인내하시며 용서하신 예수님의 인격과 은혜를 생각하면서 다시금 한번 더 목장원을 품고, 성도를 품고, 직분자를 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다시금 한번 더 서로 서로를 품고 같이 걸어가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조직과 계획과 행정능력과 탁월한 수완능력으로 공동체의 모든 일을 철저하게 해결해 가는 그 어떤 대기업의 CEO의 카리스마로 교회를 이끌어 가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함을 선택하셔서 새벽마다 무릎 꿇는 그리스도인들을 통해 역사하시길 기뻐하십니다. 세상의 능력과 방법이 아니라 하나님의 방법으로 우리의 모든 문제와 인생을 접근합시다. 주님께 맡기고 신뢰하고 의뢰함으로, 기도함으로 우리를 하나님께로 더 가까이 접붙임 합시다!
그리하여 우리의 기도가 이러하길 원합니다!
주님! 저희에게 약함의 비밀을 가르쳐 주소서! 주님! 저희에게 하나님의 지혜를 알게하소서! 십자가의 비밀을 알게 하소서!
하나님은 저희를 강하게 하여 일을 시키기도 하시지만, 약하게 하여 주님의 뜻을 이루기도 하십니다. 하나님 안에서 저희가 진실로 강해질 때는 저희의 힘을 포기하고 자신을 비울 때임을 알게 하소서. 사도 바울은 이 비밀을 깨닫고, 약해질 때 오히려 더 기뻐하고 자랑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의 죽음으로 생을 마무리하지 않으셨습니다. 죽음 후에도 주님의 사역은 계속되었습니다. 주님의 죽음은 부활이라는 엄청난 사역을 위한 시작이었습니다. 우리 주님의 부활의 아침을 사모합시다! 기대와 함께 감격의 순간을 기대하며 소망합시다!
그리스도의 고난을 닮아 십자가의 삶을 살아가게 하소서. 그렇게 할 때, 마침내 저희의 때가 왔을 때, “아버지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맡기나이다”라고 기도하며 떠날 수 있을 것입니다. 주님, 고귀한 마지막을 우리에게도 허락하소서!
"아버지여, 당신의 뜻을 순종하며 따른 아들과 딸입니다. 이 고통스러운 십자가의 죽음까지 참고 따랐나이다. 이제 제 영혼을 아버지 손에 맡기나이다."
"내 영혼의 안식처는 바로 하나님 아버지 당신의 손에 있습니다."
예수님의 고백이 우리의 고백이길 소망하며 우리의 삶 또한 주님을 온전히 쫓은 후 미련과 후회없는 감사의 찬양만을 주님께 마지막으로 올려 드릴 수 있는 그리스도의 제자, 우리교회 동역자들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1) 오직 둘째 장막은 대제사장이 홀로 일 년에 한 번 들어가되 자기와 백성의 허물을 위하여 드리는 피 없이는 아니하나니
2)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로운 살 길이요 휘장은 곧 그의 육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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