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형제들이여, 기독교의 희락주의를 깊이 생각하십시오.
하나님은 우리가 가장 만족할 때 하나님은 우리 안에서 가장 큰 영광을 받으신다.
-이것은 기독교 희락주의, 기독교 쾌락주의(Christian hedonism)로 번역할 수 있다.
행복지려는 욕망은 모든 선행의 적절한 동기이며, 자신의 기쁨을 추구하길 포기한다면 사람을 사랑하거나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다.
C. S. 루이스는 “알다싶이, 모든 사람이 자신이 행복할 수 있을 만큼 최대한 행복해야 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의무입니다.”라고 했다.
칸트가 34세 때 죽은 조나단 에드워즈(Jonathan Edwards)는 그가 젊을 때 쓴 결심문에서 이렇게 표현했다.
“나는 나 자신을 위해 내가 이용할 수 있는 모든 힘과 능력, 열정과 심지어 폭력을 동원해서라도, 또 내가 생각할 수 있는 모든 방법으로 다른 세상의 행복을 최대한 얻어내기로 결심했다.”
남부의 여류 소설가인 플래너리 오코너(Flannery O' Connor)는 자기를 부인하는 것에 관해,
“당신은 언제나 더 큰 선을 위해 더 작은 선을 포기한다. 그 반대는 죄다. 이를 악물고 기쁨을 추적하는 것이 바로 나의 모습이다. 이것은 매우 위험천만한 일이기 때문에 완전무장을 해야 한다.”
...인간은 참된 선에 가까워질수록 자연적으로 행복하게 선을 행하게 되어 있다. 성경에서 선한 사람은 선을 행하길 싫어하는 사람이 아니라 의무를 위해 참고 해야하는 사람이다.
칸트는 사심없이 주는 사람을 사랑한다. 그렇지만 하나님은 즐거이 주는 자를 사랑하신다(고후 9:7).
성경은 동기가 아닌 결과로 주의 깊게 이해되는 약속이 아니라 분명히, 대담하게, 희락적주의적으로 우리의 행동을 유발하려는 약속으로 가득하다.
...그러므로 칸트주의적 도덕원칙에 대해 계속 ‘아니오’라고 말하라. 회중석에서도 강단에서도 ‘아니오’라고 말하라. 예배가 단순히 하나의 의무로 드려진다는 생각은 마음이 예배에서 떠나게 만든다. 진정한 예배에는 두 가지 태도가 있다. 하나님을 기뻐하거나, 그 기쁨이 없는 것을 회개하는 것이다...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예배는, 그 임재에는 기쁨이 충만하고 그 손에는 영원한 즐거움이 있는, 하나님에 대한 희락주의적 추구이다(시 16:11).
(11)주께서 생명의 길로 내게 보이시리니 주의 앞에는 기쁨이 충만하고 주의 우편에는 영원한 즐거움이 있나이다
그리스도인들에게는 “하나님을 기뻐하는 것이 가장 고귀한 의무”이다.
8. 형제들이여, 기도하십시오.
기도는 제 1원인과 제 2원인을 결합하는것이다. 기도는 우리의 가는 전선을 번갯불에 연결하는 것이다.
영원한 열매를 맺을 능력이 자신에게 있다고 느끼는 목회자는 하나님도 모르고 자신도 모르는 사람이다. 절망과 해방의 리듬을 알지 못하는 목회자는 인간이 이룰 수 있는 것에만 시선을 두는 게 분명하다.
조직을 의지할 때 우리는 조직이 할 수 있는 것을 얻으며,
교육을 의지할 때 우리는 교육이 할 수 있는 것을 얻으며,
인간을 의지할 때 우리는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을 얻으며,
기도를 의지할 때 우리는 하나님이 하실 수 있는 것을 얻는다. -딕슨(A. C. Dixon)
하나님께서는 세상을 축복하시는 것보다 더 하고 싶으신 일이 있기 때문이다. 즉 그분은 기도에 대한 응답으로 세상을 축복하길 기뻐하신다.
기독교 사역의 본질은 그 성공이 우리의 손이 닿는 곳에 있지 않다는 것이다. 우리는 섬기면서 기쁨을 얻지만 그분은 영광을 얻으시는 것이 하나님의 목적이다.
하나님은 모든 은혜로운 일을 하실 때 “아무 육체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는 방법으로 하시며(고전 1:29), 대개 이것은 기도에 대한 응답으로 하신다는 것을 의미한다.
기도는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시 50:15)는 한 문장을 수많은 단어로 번역하는 것이다....기도를 제쳐 놓고 벌이는, 우리의 모든 허둥거림과 지껄임과 연구는 아무 것도 아닌 것에 해당한다.
우리의 육체와 문화는 서류가 잔뜩 쌓인 책상 곁에서 한 시간 무릎을 꿇는 것을 핏대를 올리면서 반대한다. 하루에 두 시간씩 기도와 묵상에 자신을 드린다는 것은 비실제적이며 시대에도 뒤떨어진 것처럼 보인다. 때로 나는 신학교들이 기도하고 성령을 의지하는 것은 그저 형식적으로 언급하면서, 수완과 술수를 일처리 방식으로 강조하는 이러한 치명적인 실용주의를 따르고 있는 게 아닌지 두렵다.
바울은 로마서 15장 30절에서
(30)형제들아 내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고 성령의 사랑으로 말미암아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기도에 나와 힘을 같이하여 나를 위하여 하나님께 빌어
-너희는 나와 함께 고뇌하며(strive together, 순아고니자스다이: sunagonizasthai) 나를 위해 하나님께 기도하여(KJV 직역). 이처럼 ‘함께 고뇌할 때’ 하나님은 눈물을 허락하실 것이다. 이러한 눈물이 없다면, 우리가 먹이는 양떼는 이 교회 저 교회로 떠돌 것이며 어둠에서 빛으로 나오는 사람도 거의 없을 것이다.
“하나님, 저의 기도에 본질적인 변화를 일으켜 주십시오!”
루터, 웨슬리, 버나드, 허드슨이 매일 기도하면서 보낸 시간이 지금과는 다른 시대에나 어울리는 이상적인 꿈이라 생각하지 말아 주십시오.
영국 의회에서 노예 무역 폐지를 위해 용감하게 싸웠던 윌리엄 윌버포스(William Wilberforce)는 ‘모든 선한 사람들의 경험’을 살피면서 자신의 영적 체온을 재어 보고는 이렇게 한탄했다.
사무와 사람 만나는 일로 항상 바쁜 생활은 내 몸은 아니라도 내 영혼을 망치고 있다. 보다 이른 아침에 혼자만의 시간을 더 가져야겠다! 내가 경건 훈련과 개인 기도와 묵상과 성경 읽기에 습관적으로 시간을 너무 적게 할애했던 것 같다. 그래서 나는 약하고 차가우며 강퍅하다. 매일 두 시간이나 한 시간 반 정도를 할애하는 게 좋겠다. 나는 너무 늦게 자는 버릇이 있고, 따라서 아침에 허둥대며 30분의 시간을 갖는 게 고작이다. 모든 선한 사람들의 경험에 따르면 합당한 만큼의 개인 경건의 시간을 갖지 않고는 영혼이 약해질 수 밖에 없다는 것을 확실히 보여 준다. 그러나 모든 게 기도-감히 말하건대, 능력 있는 기도-를 통해 이루어져야 하는데 왜 그렇지 못할까? 능력 있는 기도는 사랑 넘치는 진리이신 하나님의 은혜로운 기름부음을 통해서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기도하고, 기도하고, 기도하라!(E. M. 바운즈의 ‘기도의 능력Power Through Prayer’ 가운데서)
찰스 스펄젼의 기도를 소개한다.
그것은 로마 교부 가운데 하나였던 제롬의 당당한 행동이었다. 그는 모든 긴급한 일을 제쳐 두고 하나님이 그에게 주신 소명, 즉 성경 번역에 전념했다. 그의 교회는 오늘날 많은 대형 교회보다 더 컸다. 그러나 그는 교인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성경 번역은 반드시 필요합니다. 다른 목회자를 찾아보십시오. 저는 들판에 가서 제게 주어진 소명을 마칠 때까지 돌아오지 않겠습니다.”
그는 교회를 떠나 수고하고 기도하면서 라틴 벌게이트를 완성했으며, 이 성경은 지금까지도 전해지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친구들에게 이렇게 말해야 한다.
“난 어디론가로 가서 홀로 기도하는 시간을 가져야 해”.
그러면, 우리가 라틴 벌게이트 성경을 쓰지 않았다 하더라도 우리 일은 영원히 하나님께 영광이 될 것이다.
9. 형제들이여, 신성한 대체물을 조심하십시오
목회 그 자체가 목회의 적이다.
목회를 넘어뜨리는 것은 세상의 크고 악한 늑대가 아니다. 목회가 스스로를 무너뜨린다.
쉴 새 없이 들리는 노크 소리와 끝없이 이어지는 한가한 사람들의 방문은 우리의 경건한 열정에 수 없이 찬물을 끼얹는다. 우리는 어떻게 해서든 방해받지 않는 묵상 시간을 가져야 하며 그렇지 않으면 능력을 잃고 말 것이다. -찰스 스펄젼
우리가 기도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는데 큰 위협이 되는 것은 훌륭한 목회 활동이다.
“당신의 영적 성장을 저해하는 가장 일반적인 장애물은 무엇인가?"
가장 많은 대답은 분주함과(83%) 훈련 부족과(73%) 방해였다(47%). 이러한 방해와 분주함의 대부분은 우리의 사역과 관련이 있는 것이지 ‘세상적인’ 게 아니었다. 우리가 기도하고 말씀을 묵상하는 데 큰 위협이 되는 것은 훌륭한 목회활동이다.
[행 6:2-행 6:4]
(2)열 두 사도가 모든 제자를 불러 이르되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제쳐 놓고 공궤를 일삼는 것이 마땅치 아니하니(3)형제들아 너희 가운데서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 듣는 사람 일곱을 택하라 우리가 이 일을 저희에게 맡기고(4)우리는 기도하는 것과 말씀 전하는 것을 전무하리라 하니
집중적이며 구별된 기도가 없다면, 말씀 사역은 시들어버리고 열매를 맺지 못한다. 120명이 기도에 전념할 때(행 1:14) 성령이 임했으며, 이들이 전할 때 3천 명이 회심했다(행 2:41).
말씀사역이 쇠퇴할 때, 믿음과(롬 10:17; 갈 3:2, 5) 거룩함도 쇠퇴한다(요 17:17). 활동은 계속되겠지만 생명과 능력과 열매는 사라진다. 그러므로 무엇이든 간에 기도를 막는 것은 사역 전체를 막는 것이다.
사도들도 기도하기 위해서는 방해받지 않는 시간이 필요했음을 절감했다. 기도는 시간을 요하는 노동이며 기도하는 동안에는 다른 의무를 내려놓아야 한다.
우리는 사역으로 지쳐 있을 때 “한적한 곳에서 기도해야” 한다(눅 15:16). 목회에 중요한만남을 가지기 전에 홀로 기도해야 한다(눅 9:18). 예수님과 사도들에게 있어 기도는 상당한 고독을 요구하는 일이었다.
(막 1:35)새벽 오히려 미명에 예수께서 일어나 나가 한적한 곳으로 가사 거기서 기도하시더니
(행 6:4)우리는 기도하는 것과 말씀 전하는 것을 전무하리라 하니
....‘전무하리라’로 번역된 단어(proskarterevw)는 기도 시간을 지키려는 사도들의 확고한 결의를 강조한다. 이 단어는 ‘고집하다’(to persist at) 또는 ‘유지하다’(remain with)라는 뜻이다. 여기에는 자신이 맡은 일에서 확고한 자세를 보이고 흔들리지 않으며 그 일을 고집한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행 10:7).
'~대해 진지하다', (어떤 것에 대해)인 내하다, 끈질기게 성실하다, (한장소에서)모든 일에 있어서'근실하게 일하다', (한 사람에게)아주 가까이서'지지하다'(종처럼) <행 1:14>동. to be earnest towards;
1)고집하다, 집착하다, 몰두하다, 계속하다
2)변함없이 상냥하다, 끊임없이 돌보다
3)한 장소에서 내내 계속하다
4)희미해지지 않고 계속하다
5)용기를 보여주다
6)변함없이 준비하다, 계속해서 기다리다
사도들의 변: “우리의 시간을 선한 일을 하는데 써야 한다는 압력이 아무리 강하더라도, 우리는 우리의 우선적인 일을 버리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그 일을 고집할 것이다. 우리는 기도하는 일을 소홀히 하지 않을 것이다.”
기도에 전혀 힘쓰다...행 1:14, 행 2:42, 롬 12:12, 골 4:2, 엡 6:18.
성령과 지혜의 충만을 요구하는 사역의 기회들도 기도를 위협한다. 기도에 전념하기 위해서는 이런 것 까지도 포기해야 한다.
마틴 루터의 이발사가 그에게 물었다.
“루터 선생님, 선생님은 어떻게 기도하십니까?”
루터는 이발사 피터 베스켄도르프를 위해 40페이지에 달하는 답변서를 썼다.
착하고 똑똑한 이발사라면 면도기와 수염에 생각과 마음과 눈을 집중하면서 어느 부분을 면도하고 있는지 잊어서는 안 된다. 잡담을 하거나 한 눈을 팔거나 다른 생각을 하다가 손님의 입이나 코를, 심지어 목을 벨 수도 있다. 그러므로 잘 완결되어야 하는 일은 그 일을 하는 사람의 기술과 지체를 포함하여 그의 전부를 요구한다. 많은 것을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 것도 생각하지 않는 사람이며 아무 유익도 이루지 못한다. 좋은 기도를 하려면 독점적이고 완전히 마음을 집중해야 한다는 것은 더더욱 당연하지 않겠는가?
아침의 첫 시간과 저녁의 마지막 시간에 기도하는 것이 좋다. “잠깐만! 한 시간쯤 있다가 기도할거야. 이 일을 먼저 끝내야 해.” 이렇게 속삭이는 거짓되고 기만적인 생각으로부터 자신을 지켜라. 우리는 이런 생각을 할 때 기도에서 멀어지며, 우리를 매는 다른 일들을 하게 되고 결국 하루 종일 전혀 기도할 수 없게 된다.
존 파이퍼는 보나르(A. A. Bonar)의 호소를 듣고 자리에서 번쩍 일어나 나의 기도 벤치로 가서 한참 동안 기도로 주님과 교제한다.
오 형제여, 기도하라. 사단의 방해에도 불구하고 기도하라. 몇 시간씩 기도하라. 기도를 소홀히 하느니 차라리 친구를 소홀히 하라. 기도를 잊느니 차라리 금식하고 아침과 점심과 저녁을 잊으며 잠자는 것을 잊어라. 우리는 기도에 관해 많이 말하지 말아야 하며, 대신에 열심히 기도해야 한다. 주님이 가까우시다. 그분은 처녀들이 잠든 사이에 살며시 오신다.
형제들이여, 신성한 대체물을 조심하십시오. 기도와 말씀 사역에 전념하십시오.
10. 형제들이여, 여러분의 자유를 위해 싸우십시오
영적 양식과 묵상이 빈약한 상태에서 빚어진 격앙된 행동이 낳는 메마른 만큼 나를 강하게 위협하는 것은 거의 없다.
학생은 완전히 마스터한 한 권이 수박 겉핥기식으로 대충 훑은 스무 권보다 자신의 정신 세계에 더 많은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찰스 스펄전
새로운 책을 한 권 읽은 후에는 오래된 책을 한 권 읽고 그 다음 또 다른 새로운 책을 읽는 게 좋은 독서 습관이다. -C. S. 루이스
로이드 존스는 책 읽을 시간을 내기 위한 싸움은 자신의 생명을 위한 싸움이라고 했다.
“아내나 다른 사람이 당신 대신 메시지를 받게 하고, 전화 받는 사람에게 당신이 지금 전화를 받을 수 없다는 것을 미리 일러두라.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말 그대로 자신의 생명을 위해 싸워야 한다.”
...가족의 고통, 교회의 결정,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신학적, 도덕적 딜레마로 인한 소진은 말할 것도 없다. 나는 저절로 채워지는 샘이 아니다. 나의 두레박은 새고 있고, 물을 퍼올리지 않을 때도 마찬가지이다. 나의 영혼은 되살아나고 있지 않다. 내 영혼은 차근히 읽고 생각할 시간도 없고 설교 준비 때문에 늘 중압감에 시달리다가 위축되고, 목회적 죽음이라는 망령이 고개를 내민다.
지금 나를 짓누르는 것은 생산적인 관리자가 되라는 요구이다....목회자들이 업무를 위한 만남 중에라도 영원한 실체의 무게와 영광을 느껴야 한다는 것이다...여러분의 영혼과 섬기는 교회의 생명을 위해, 풍성한 독서와 여러분의 영혼을 먹일 시간을 내기 위해 싸우십시오...여러분이 위대하고 영광스러우며 아름답고 영원한 것에 대해 살아 있길 간절히 원한다면 하나님과 사귐이 있었던 사람들의 눈을 통해 보고 시간을 내고자 싸워야 할 것입니다.
...나는 하루 20분씩 집중하여 책읽기하는 훈련을 하면 엄청나게 많은 책을 읽을 수 있다는 유익한 사실을 발견했다. 1분에 250단어, 20분이면 5천 단어를 읽을 수 있다. 보통 책 한 권이 페이지당 400단어 정도 된다. 20분이면 12.5페이지를 읽을 수 있다. 하루에 20분, 일주일에 엿새 동안 특정한 저자나 주제에 관련된 책을 읽는 훈련을 1년 동안 계속해보라. 매일 12.5페이지를 312일 동안 읽으면 3,900페이지를 읽을 수 있다. 보통 책 한 권이 250페이지라면 1년에 15권의 책을 읽을 수 있다.
그렇다면 25주 만에 기독교 강요를 읽을 수 있다. 어거스틴의 ‘하나님의 도성’, B.B. 워필드의 ‘성경의 영감과 권위’를 1년 내에 읽을 수 있다.
많은 시간을 들이지 않고도 1년에 대작 세 권은 읽을 수 있다. 한 주에 6일씩, 하루에 20분만 내면 된다. 이른 아침에 20분, 점심에 20분, 잠자리에 들기 전에 20분을 내어 자신의 영혼과 지성을 위해 다양한 분야의 책 읽는 훈련을 하는 게 상상할 수조차 없을 만큼 힘들 일인가? ...보통 두께의 책 36권을 읽을 수 있다. 존 스토트는 ‘가장 바쁜 목회자라도 연구를 위해 내야 하는 절대적인 최소한의 시간’이 한 시간이라고 했다.
많은 사람들이 더 많은 것을 성취할 것이다. 하루에 한 시간, 매주 하루 아침이나 점심이나 저녁, 매달 온전한 하루, 매년 온전한 일주일은 최소한의 시간이다. 이렇게 정해 보라. 보기에는 아무 것도 아닌 것 같다. 사실, 너무나 적다. 그러나 이것을 실천에 옮기는 사람이라면, 이렇게 훈련된 틀을 적용할 때 얼마나 많은 책을 읽을 수 있는지를 알고 모두가 놀랄 것이다. 1년이면 거의 600시간이 된다.
...짧은 시간에 규칙적으로 책을 읽는 훈련을 한다면 자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위대한 마음을 품으며 살아갈 것이다. 여러분이 연구나 설교 준비를 위해 따로 정해 둔 시간보다 훨씬 더 많은 시간을 그렇게 사용할 수 있다.
사실, 신학교 다닐 때는 교수님들이 읽을 책을 너무 많이 정해줌으로써 학생들이 피상적인 독서 습관을 갖게 만든다는 것이 나의 가장 큰 불만 가운데 하나였다. 나는 스펄젼의 말에 동의한다.
수박 겉핥기 식의 독서를 통해 ‘존스 목사처럼 되고 싶은’ 유혹에서 벗어나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하실 것이다. 그런 유혹은 잊어버리라. 교만을 부추기고 영적 메마름을 초래할 뿐이다. 대신에 구멍을 뚫고 더 깊이 들어가는데 전념하라. 대작들은 우리의 영혼을 새롭게 하고, 마음의 깊이를 더해 주며, 지성을 확장시키는 진리들로 넘쳐난다! 여러분의 양떼는 여러분이 거장들과 함께 걷고 있는지(워렌 위어스비의 말처럼)아니면 그저 텔레비전만 쳐다 보고 있는지 알 것이다.
아침에 기도한다는 게 어렵게 느껴질 때가 많았다...기도할 수 있는 틀과 상황에 자신을 두는 법을 배우는 것이 다른 무엇보다 더 중요함을 발견했다...일반적인 경건 서적을 읽는 것은 큰 유익이 된다. 내가 말하는 경건 서적은 감성적인 게 아니라 그 속에 진정한 예배의 요소가 있는 것을 의미한다....당신의 영혼을 따뜻하게 해 줄 책을 읽기 시작하라...당신은 자신의 영혼의 불꽃을 어떻게 지피는지 스스로 배워야 한다...당신은 영적인 초크 밸브를 어떻게 사용하는지 배워야 한다(로이드 존스, ‘목사와 설교’ 중에서).
그에게 있어(그리고 내게 있어) 이것은 일차적으로 청교도와 관련된 책을 의미한다.
C. S. 루이스는 오래된 책에 대한 편견을 극복하도록 도와준다.
이상한 생각이 널리 퍼져 있다. 모든 주제에서 오래된 책은 전문가들이나 읽는 것이지 아마추어는 신간에나 만족해야 한다는 것이다...신간에 대한 잘못된 편애와 고전에 대한 외면이 가장 심한 분야가 바로 신학이다. 내가 보기에 이것은 뭔가 거꾸로 된 것 같다. 나 자신이 작가이기 때문에, 나는 독자들이 신간들도 살펴보기를 자연스레 바란다....시간을 한 권 읽은 후에는 고전을 한 권 읽고 그 다음에 다시 신간을 읽는 게 좋은 습관이다. 이것이 힘들다면, 새 책을 세 권 읽을 때마다 옛 책을 적어도 한 권씩은 읽어야 한다...우리 모두는...우리 시대의 특징적인 잘못을 바로잡아 줄 책이 필요하다. 이것은 고전을 의미한다...확신컨대, 20세기의 특징적인 무지는...우리가 결코 생각하지 못했던 부분에서 나타나는 법이다...우리 가운데 그 누구도 이러한 무지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없다....그것을 완화시키는 유일한 방법은 수백년 간 계속된 깨끗한 바다 바람이 우리 마음에 계속 불게 하는 것이며, 이것은 고전을 읽음으로써만 가능하다.
Banner of Truth Trust나 Soli Deo Gloria의 청교도 서적을 참고하라.
J. I. Packer는 “지금 어디서나 쉽게 구할 수 있는 청교도 도서를 읽는 신자는 많지 않아 보인다. 나는 이러한 무관심이 우리를 심히 가난하게 한다고 믿으며, 이런 모습의 끝을 보고 싶다.”
말하고 싶은 핵심은 책을 많이 읽으라는 게 아니다. 당신의 영혼을 살아 있게 하며, 활력이 넘치게 하고, 월요일에 불길이 붙어 토요일 밤까지 타오르게 하는 그런 책을 읽으라는 것이다.
허비되는 순간들을 모아 시간을 내어 20분씩 고전을 읽는 훈련을 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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