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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소선지서

하박국 3장 1-2절, 부흥을 기도하다

by Message.K 2022. 3.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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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성경 하박국 3:1-2의 본문을 가지고 <부흥을 기도하다>란 주제로 한 설교입니다.

 

 

오늘 하박국은 기도하고 있다. 하박국이 기도한 것이 지금 이 순간만이 아니었다. 그는 저항하고 항의하고 하나님께 불만을 표출하고 성루에 올라가서 하님께 쏘아붙이기도 하는 적극적이면서도 저돌적인 기도자의 모습을 보여줬다. 그만큼 하박국에겐 하나님을 향한 깊은 불만이 있었다. 갈대아(신 바벨론 제국)를 들어서 유대를 친다는 사실, 전쟁이 곧 일어날 것이라는 사실과 앞으로 벌어질 일들에 대한 이상한 조짐들이 굉장히 못 마땅했던 것이다. 그런데 오늘 본문, 비록 2구절이지만 여기서는 그러한 하박국의 드센, 거친 표현은 사라지고 오히려 잠잠하고 차분한 느낌이다.

 

 

 

특별히 시기오놋에 맞춘 기도라는 점에서 분위기가 사뭇 다르다. 시기오놋은Shigionoth은 음악용어이다. 시7편 제목인 식가욘(→)의 복수형으로서, 3:1에 인용되어 있다. [시기오놋]은 아카드어(바벨론 語)[셰구-shegu]에 관련된 말로, [슬픔의 노래] [만가](輓歌)의 뜻이 있고, 비탄으로 인해, 보통 리듬의 루울(rule)을 벗어난 파격적인 가락이라는 뜻으로 보는 학자가 있다. 이밖에도 라틴어역은 [무지의 죄로 인해]로 역하고 있는데, 그런 경우에 사하심을 구하여 부르는 시편의 가락을 뜻한다는 이도 있다. 확실한 의미는 불명이다. ❶슬픔의 노래라는 견해, ❷매우 빠르고 열광적인 노래(시 7편)라는 두 가지 견해가 있다.

 

 

 

여기서 아마도 '슬픔의 노래', '비가'의 형식을 띤 음악정도로 생각하면 될 것이다. 사람이 너무 격앙되고 흥분하면 음악이 눈에 안 들어온다. 소위 '눈에 뵈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느정도 마음의 중심이 서면 '음악', '리듬'이 눈에 들어오는 것이다. 마치 지금 하박국이 시기오놋에 맞추어 기도하고 있다는 것은 우리가 깊은 격정에 사로잡혀 하나님 앞에 기도의 자리에 나아갔을 때 배경음악으로 깔리는 반주음악이나 찬양의 배경음악의 기운에 맞춰 기도하는 정도? 아니면 슬픔이 가득찬 기도자가 하나님 앞에 모든 것을 내려놓고 '나 주를 멀리 떠났다', '천부여 의지없어서 손 들고 옵니다'라는 찬송을 부르면서 기도하고 기도하다가 찬송하고 뭐 이런 구도라고 상상해 보면 어떨까 싶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그가 음악적인 운율에 맞추어서 감정을 표현했다는 것이 아니고 '기도하고 있다는 것'이다. 물론 계속 기도했지만 지금부터 하는 하박국의 기도는 전의 기도의 내용과 분위기가 사뭇 다르다. 왜 그런가?

 

 

 

 

마틴 로이드 존스 목사님의 하박국의 기도에 대한 특징으로 '겸손'을 꼽았다.

왜 겸손을 운운하는가? 지금 하박국은 다 내려놓고 기도하고 있는 것이다. 갈대아가 어떻고 유대가 어떻고 나라가 어떻고 이방 민족이 어떻고 심판과 공의와 불법과 정의가 어떻고 그런 이야기를 다 내려놓고 겸손하게 기도하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기도할 때 마음 속에 불만이 많으면 자기를 돌아볼 수가 없고 자기 자신을 제대로 조명할 수가 없다. 그래서 '내 눈에 들보'는 보지 못하고 '남의 눈에 티'를 보는 것이다. 비교하고 비판하고 비난하고 비하하고 그러면서 기도가 기도답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지금 하박국은 갈대아 사람들을 통하여 유대 민족을 심판하는 계획을 취소하라고 하나님께 요청하고 있지 않다.

 

 

 

한 때 한 선교사가 쓴 '내려놓음'이 왜 그렇게 인기가 있었을까? '더 내려놓음'도 또 인기가 있었다. 왜 그런가? 내려놓지 못하는 인간의 죄악된 본성 때문에 더 솔깃한 것이 아닐까? 미국의 유명한 대학의 교수의 자리를 포기하고 정말 나라들 가운데 변두리 나라라고 할 수 있는 대학으로 자신의 모든 기득권을 포기하고 갔던 그 선교사의 이야기가 우리의 가슴을 저미는 것은 우리에게 '거대한 집착', 우리의 '기득권'을 사수하고자 '고질적인 고집'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어릴 적 교회에 특별히 친한 친구 3총사가 있었다. 그런데 어머니는 종종 한 친구와 성적과 부모에게 하는 것, 집안일을 도와주는 것 등 비교하실 때가 있었다. 그 때 정말 싫었다. '비교하고 비교당하는 것' 만큼 사춘기의 애들이 싫어하는 게 또 있을까? 그런데 기성세대인 우리가 우리의 기도 가운데서, 우리의 신앙생활 가운데, 일상 생활 가운데서도 '비교한다'. 갈대아 사람이 자격이 있니? 유대사람이 자격이 있니? 그처럼 말이다. 지금 하박국은 그 비교의식에 집착하지 않고 하나님께 지금 집중하고 있다.

 

 

"이 모든 어려운 국면은 다 모두 나로 인한 것"임을 인정할 때 겸손의 바탕이 마련되는 것이다.

 

 

 

 

우리가 기도 많이 한다고 하면서 교만하다면 그 사람이 정말 기도하는 사람일까? 의심스럽다. 물론 하나님은 중심을 보시겠지만 기도하는 사람, 겸손가이어야 할 줄 믿는다.

 

 

 

 

자 그렇다면 하박국이 지금 기도하는 것은 무엇인가? 무엇을 기도하고 있는가?

2절을 다같이 한번 읽어보자. 너무나 익숙하고 좋아하고 특별히 교회 현수막에 걸리는 성구들 가운데 즐겨찾기 BEst 5에 들어가는 구절이기도 하다.

 

'여호와여 주는 주의 일을 이 수년 내에 부흥하게 하옵소서

이 수년 내에 나타내시옵소서'

 

 

 

무엇을 이야기하였나? 부흥이다. 부흥!

우리는 종종 어떤 위기의 상황이나 안타까운 절박한 상황에 다다랐을 때 '기적'을 바란다. 그리고 기적을 기대한다. 이를테면 불치병의 환자, 꺼져가는 생명의 불꽃을 다시 타오르게 해달라던가, 가정의 무너져가는 상황 가운데 하나님의 파격적인 회복과 은혜를 달라고 기도한다. 그것을 우리는 '기적'이라고 부른다. 여러분들도 살아오면서 기적을 한 번쯤을 경험하였을 것이다. 하박국 또한 지금 나라 안팎의 어둡고 갑갑한 상황 가운데 기적을 기도할 수 있었을 것이다. 나라의 완전한 회복과 부정부패의 척결과 갈대아의 물러감의 기적을 기도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기적은 기적일 뿐이다.

신앙은 기적을 낳지만, 기적이 신앙을 만들지는 못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복음서에서 사람들은 기적을 요구하고 바랬지만 예수님은 기적이 아닌 십자가를 말씀하셨다. 하지만 영적 현실을 진단하고 하나님의 시각을 회복한 하박국은 기적을 기도하지 않았고 기적을 바라지 않았다. 그가 기도한 것은 기적이 아니라 바로 '부흥'이었다.

 

 

 

부흥이란 단어는 90년대 말에 고형원 전도사가 찬양을 만들면서 급속도로 퍼진 용어중의 하나이기도 하다. 부흥 2000이라는 곡이 달아서 만들어질 정도로 '부흥'은 사람들에게 매혹적인 주제였다. 하지만 오늘날의 부흥에 대한 이야기들과 언급들로 인해 부흥에 대해서 식상해하는 경향이 없지 않아 있다(필자는 목사고시논문 주제를 미국의 1,2,3차 부흥에 대해 다루었기에 조금 익숙한 대목이 있다).

 

 

 

그래서인지 이안 머레이의 저서에서, 카일러(Theodore Cuyler)는

 

 

“형제여, 충고하건대 ‘부흥’에 대해 너무 많이 말하지 마시오. 당신이, 바로 그 부흥이라는 말의 의미를 퇴색시켜 버릴지도 모르기 때문이오.”

 

 

라고 말했다.

 

하버드 대학교 신학부 학장인 윌리엄 스페리(William Sperry)교수는 50여 년 전에 쏘아 부친 말이 “이제 부흥에 대하여 싫증난다”였다. 50여 년 전에 벌써 이런 이야기가 나왔던 것이다. 카일러 박사가 우려했던 대로 이 단어는 식상해져 버린 셈이다. 이안 머레이는 '부흥'에 대해서 ‘용어남용에 대한 경고’(A Caution over Terminology)를 적고 있다.

부흥은 이제껏 한국적인 상황에서 너무나 많은 흥함을, 회복을, 왕성함, 활개침의 측면을 강조한 경향이 없지 않은 것 같다. 이안 머레이의 저서에서 이야기하는 것처럼 '부흥'이 너무 많이 남용된 것도 있는 탓이다.

부흥 안에는 흥함과 쇠함이 동시에 존재한다.

 

 

 

 

 

구약성경에서 ‘부흥’( hy:j;;; to live, have life; 살다, 생명이 있다)이라는 의미의 말은 그 어원이 “살다”라는 의미를 가진 말이다. 특별히 구약에서 자주 나타나는 ‘소생(蘇生)’이라는 단어가 바로 부흥에 맞먹는 용어라고 할 수 있는데, 이 말과 함께 ‘부흥’을 가리키는 히브리어가 “살다”의 강의형(intensive form)인 ‘히야’(היה)로 쓰여진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즉, 부흥은 문자적으로 “갑자기 살리다”, “확 살아나게 하다”라는 의미이다.

부흥이라는 히브리어 단어 ‘하야’(hy:j;)는 또한 어려운 환경에서 다시 ‘회복되다’의 의미, 성을 중수하고 무너진 것을 다시 일으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부흥은 ‘쇠퇴하였던 것이 다시 일어나는, 또는 그렇게 되게 하는’ 그 무엇을 의미한다. ‘부흥(復興)은 말 그대로 약하게 되었던 것이 전처럼 다시 힘이 생기거나 생기게 하는 것’이다

 

 

 

 

‘부흥’의 사전적인 의미는 생명의 회복으로 사람의 마음이나 영을 북돋고, 생각을 살아나게 하고 새롭게 하고 생명과 열정과 힘이 충만하게 하고 침체로부터 회복시키는 것이다. ‘부흥’이란 헬라어 단어는 anazao로, 그 의미는 ‘다시 사는 것’이다(롬 14:9, 눅 15:24). 이 말은 말 그대로 깊은 침체나 절망의 나락으로 떨어지는 현실적인 상태가 있고 난 후에 다시 일어서는 것을 말한다. 이런 것들을 조합해 볼 때 부흥은 ‘다시’라는 의미가 강하다. 부흥을 revival 이라고 하지 않는가? 이전에 화려한 영광을 다시 재현하는 느낌이 강하다. 이 부흥은 흔히 ‘대각성(awakening)’이란 단어와 같이 쓰인다.

 

 

 

하박국이 지금 부흥을 외치는 것은 단순한 발전과 진보와 비상과 업그레이드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말 그대로 '다시 살기 위해서는 죽어야 하는 과정이 필요한 것이다'. 질병이나 사고로 인해 수술대 위에 누워있는 환자를 다시 살리기 위해서는 질병이 있는 그 질병덩어리 부위를 잘라내고 덜어내고 제거하고 치료하는 과정이 필요하듯이, 사고부위를 자리고 찢고 째고 짚고 하는 과정이 필요하듯이 수술대에서의 찢겨지는 아픔은 어쩔 수 없는 하나의 통과의례인 것이다. 거기에서 아프다고, 죽을 정도로 힘들고 고통스럽다고 개복을 하지 않는다거나 칼과 메스를 대지 않는다면, 찢고 째고 깁는 과정을 생략하자고 한다면 거기에는 아무런 효과도, 결과도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부흥은 바로 이러한 '개복, 찢고 자르고 깊고 하는 제거의, 자름의 과정'이 필수적이다. 유다가 그러했다.

 

 

 

특별히 하박국은 '수년 내에' 부흥케 하소서, '수년 내에' 나타내시옵소서 라고 기도하였는데, 이 기도는 정확히 문자적으로 수년내에 기도가 응답된다. 물론 이 수년내에 라는 말을 '빠른 시간 안에, 빠른 시간 내에' 치료해달라는 말도 되겠지만 어떻게 보면, 문자 그대로 '수년 내에' 이 하박국의 부흥의 기도는 성취되어진다.

 

 

 

하박국은 B.C 621-609까지 활동하였다. 그런데 B.C 605년에 다니엘과 많은 귀족들이 포로로 끌려가고, B.C 597년에 다니엘이 끌려가고, B.C 586년에 바벨론의 마지막 포위 공격에 의해 예루살렘과 성전은 훼파되어지게 된다. 하박국의 겸손한 기도, 부흥의 기도는 이렇게 응답되고 있다.

 

 

특별히 하박국의 부흥의 기도의 특징은 '진노 중에라도 긍휼을 잊지 마옵소서'라는 문장에 드러난다. '진노 중에라도 긍휼'!

 

긍휼이란 의미는 여성의 자궁을 의미한다. 이는 곧 어머니의 극진한 사랑과 깊이를 가늠조차 할 수 없는 절절한 연민을 가리키는 단어이다. '신은 세상의 심부름을 감당하기 위해 어머니라는 천사를 보내셨다'는 말이 있듯이 자녀를 향한, 자녀를 품은 어머니의 자궁! 애가 타고 애가 끊어지는 아픔! 이것은 마치 어린 아이가 '엄마, 용서해주세요! 다시는 안 그러겠습니다'라고 하거나, '다섯 대 맞아야 하지만 한 대만 맞게 해 주세요!'라고 요청하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중요한 것은 심판이 얼마나 무서우냐가 아니라 그 심판의 동기가 바로 '사랑'이라는 것이다.

 

 

 

자취생활을 했는데, 막내 동생이 말을 너무나 안 들었다. 예술한답시고(예고생이었다!) 친구들이랑 어울려 다니는게 너무나 맘에 안 들어서 한 번 벼르고 벼루어 긴 자로 종아리를 때린 적이 있는데 한 번씩 때릴 때마다 피멍이 들었다. 근데 그 매를 때리는 내가 기분이 좋았겠는가? 얼마나 때렸을까? 결국은 막내동생을 껴안고 둘이서 울었던 기억이 있다. '내가 사랑해서 때리는 것이라고'

 

 

 

남매간의 관계에서 나오는 사랑과 부모와 자녀간의 관계에서 나오는 사랑과는 정말 천지차이일 것이다. 이 보다 더할 것이다. 부모가 자녀를 징계할 때, 부모의 마음은 결코 편하지 않다. 오히려 더 가슴이 아프고 마음이 미어진다. C.S. 루이스는 '고통의 문제'라는 저서에서 조지 맥도널드의 글을 이렇게 인용했다.

 

 

 

"하나님의 아들은 인간의 고난을 면해 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들의 고난이 자신의 고난과 같은 것이 되게 하기 위해 죽기까지 고난받으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 우리를 심판하시고 징계하신다고 해서 하나님의 가슴에는 심판에 따른, 심판을 받는 우리의 아픔에 따른 고통이나 감정에 아무런 변화가 없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고통 받으시며, 같이 마음 아파하시며 우리의 고통 가운데 동참하시고 거기에 계신다는 것을 기억하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부흥을 위해 기도하고 있는가? 부서와 전도회와 교회의 부흥에 관심이 있는가? '도려내는 아픔과 고통이 있어야' 부흥이 올 줄 믿는다. 진정한 부흥이 어떤 것임을 우리가 같이 나누었다. 하박국의 기도가 우리의 기도가 되었음 한다. 그리고 우리의 각자 부르신 곳에서, 부흥을 기도하는 주의 백성들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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