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야는 예수님이 오시기 약 700년 전에 예수님의 탄생을 예언한다. 예수님이 오시면 흑암과 고통은 물러가고, 영원한 평화와 기쁨이 찾아오게 될 것이다. 빛으로 오신 예수님에 대한 이야기를 본문에서 하고 있다.
흑암에서 빛으로, 1-3절.
스불론과 납달리 땅? 흑암과 고통의 땅이었다. 하지만 그 땅이 의미 있게 된 이유는 바로 예수님 때문이다.
해변 길...>
요단 저편 이방의 갈릴리...> 고통의 땅, 멸시받던 땅이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그 땅이 축복의 땅이 되었던 것이다. 갈릴리는 그리 좋은 평판이나 인정받지 못하는 촌구석이었다. 촌동네였다.
예수님의 말구유, 베들레헴의 말구유는 정말 비천하고 가난하고 멸시받는 장소이지만 주님이 그곳에서 태어나심으로 말미암아 그곳이 바로 ‘성시’가 된 것이다. 거룩하게 된 것이다. 주님이 계신 곳, 주님이 함께하시는 곳이 바로 거룩하게 되는 것이다. 갈릴리 나사렛...예수님께서 자라나신 곳이다. 하지만 그곳은 나다나엘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라고 할 정도로 무시하고 인정받지 못하는 동네였다. 하지만 그곳은 성시가 되었고 예수님의 제2고향이 되었다.
광야도, 스불론과 납달리 땅, 해변 길, 이방의 갈릴리, 베들레헴...이 모든 성경의 장소들과 지명들이 가진 자신의 의미는 너무나 작고 보잘 것 없지만 하나님의 임재가 임할 때는 의미가 달라진다는 것이다.
예수님을 영접하는 가정,
예수님을 더욱 깊이 만나는, 하나님의 임재의 의미를 경험하는 가정...
흑암에서 고통당하던 사람들에게 큰 빛이 비췄습니다. 흑암은 죄로 인해 하나님께 받는 심판에서 오는 고통의 결과였고, 큰 빛은 그들에게 다시 베푸시는 하나님의 긍휼과 사랑이었습니다. 예전에 하나님은 스불론과 납달리 땅으로 하여금 멸시를 당하게 하셨는데, 이사야는 해변과 요단 저편 이방의 갈릴리를 하나님이 다시 영화롭게 하셨다고 선포했습니다. 흑암 후에 오는 빛이고, 고난 후에 오는 치유였습니다.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백성을 창성케 하시고, 그들을 괴롭히던 모든 대적을 물리치셨기에 다시 소망을 찾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분의 백성을 영원히 심판하시지 않습니다. 아무리 큰 잘못을 저질러도 회개하고 돌아서는 자들에게 은혜를 베푸십니다. 성탄절에 오신 예수님은 흑암 속을 비추는 큰 빛이셨습니다.
- 예수님을 믿기 전 나의 삶은 어떠했습니까?
예수님이 내 어둔 마음에 빛으로 다가오신 때는 언제였으며, 그때 어떤 감동이 있었습니까?
이방을 위한 하나님의 빛, 4-7절.
(6)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스불론 땅, 나사렛에서 자라셨던 아이...
하나님께서 이 땅에 아이로 오셨다! 아들로 오셨다! 우리와 성정이 같은 ‘아이, 아들’, ‘인간’으로 이 땅에 오셨다. 성육신하셨다.
흑암에 사는 백성들에게 있어서 가장 절실한 문제는 통치자 즉, 왕의 문제였다. 어떤 왕을 통치자로 만나느냐는 매우 중요하다. 이것은 모든 문제의 해결점이 되는 것이다. 이 네 개의 구체적인 타이틀이 그 왕의 신분을 말해주고 있다.
생명의 삶-----------------------------------------------------
어둠 속에서 고통당하는 백성에게 큰 빛으로 오신 메시아는 하나님이 보내 주신 특별한 분이셨습니다. 그분은 어깨에 정사를 메신 보혜사요, 전능하신 하나님이요, 영원하신 아버지요, 평화의 왕이셨습니다. 그분은 다윗의 왕좌에 군림해 그 나라를 굳게 세우시고 정의와 공의로 영원토록 다스리실 것입니다. 이렇게 될 확실한 근거와 보장이 있습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전능하신 하나님의 열심입니다.
인간의 열정은 불타오르다가도 쉽게 사그라집니다. 그래서 인간의 결심은 작심삼일이라 나흘을 못 갑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열심, 선하신 뜻을 이루시려는 그분의 열정은 반드시 이루고야 맙니다. 그분의 선하신 뜻과 열정이 우리를 붙잡고 있는 한 우리는 결코 실패하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로 하여금 반드시 승리케 하실 것입니다.
- 열심히 계획을 세웠지만 작심삼일로 끝난 일이 있습니까?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과 열정을 본받아 다시금 시작할 일은 무엇입니까?
묵상 에세이 / 평강의 왕
제1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어느 해의 성탄절 전날, 부드러운 눈이 내리고 젊은 병사들의 마음은 고향과 가족에게로 가 있었습니다. 한 젊은이가 ‘고요한 밤 거룩한 밤’을 조용히 콧노래로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다른 사람들이 따라 부르기 시작했고 마침내 참호 안에 성탄절 노래가 가득 울려 퍼졌습니다. 그들이 노래를 마쳤을 때, 최전선을 사이에 두고 무인 지대를 지나 건너편 참호에서 들려오는 노랫소리에 깜짝 놀랐습니다. 다른 편 병사들이 그들의 언어로 ‘고요한 밤 거룩한 밤’을 부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날 밤에 그들은 함께 평강의 왕이신 성탄절의 그리스도를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세상은 그리스도가 계시면 천국과 같을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가 가까이 계실 때 이 땅에 횡행하는 불일치는 평화로 바뀔 수 있습니다. 그분이 우리 안에 계실 때 한밤의 어둠은 대낮의 밝음으로 변할 수 있습니다.
온전한 평화는 그리스도가 다시 오실 때 찾아올 것입니다. 그날까지 우리는 그리스도께 헌신함으로써 그분의 평화를 누릴 수 있고, 또 세상에 그분의 평화를 알리는 메신저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 「희망」/ 빌리 그래함
...> 우리가 한해를 살아가면서 아니 더 나아가 우리의 인생을 살아가면서 늘 그리스도와 함께 동행한 삶이었는가? 그리스도가 함께하심으로 진정한 평화를 누리고 있는가?
한절 묵상
이사야 9장 2절 우리와 함께하시는 하나님은 우리의 어둠을 빛으로, 우리의 갈등을 샬롬으로, 우리의 상실을 풍요로, 우리의 절망을 기쁨으로 바꿔 주길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뜨거운 마음을 품으시고 하늘 천사들의 선두에 좌정하셔서 우리에게 좋은 일을 행하고자 열망하십니다. 복음은 이런 하나님이 영원토록 우리와 함께하신다는 복된 소식입니다.
- 존 오스월트/ 웨슬리 성경신학교 구약학 석좌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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