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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이사야

이사야 15장 설교, 심판은 꼭 필요한 것입니다

by Message.K 2024. 9. 5.

구약성경 이사야 15장을 가지고'심판은 꼭 필요한 것입니다'라는 주제로 설교한 내용이다. 심판의 결과인 지옥이 과연 필요한가? 지옥이 없으면 하나님은 거짓말쟁이라는 이야기를 하면서 용서가 너무 쉬운 시대에 모압을 향한 하나님의 심판, 인류를 향한 심판의 필수성을 이야기해 보자.

 

이사야 15장 설교, 심판은 꼭 필요한 것입니다 썸네일
심판은 꼭 필요한 것입니다-이사야 15장 설교

 

 

질문: 과연 지옥은 필요한가?

베스트셀러 기독교 작가인 맥스 루케이도는 그의 책 ‘곤고한 날의 은혜’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과연 지옥은 필요한가? 라는 질문을 던진다. 그러면서 그는 성경에서 만약 지옥을 제거한다면 어떻게 될까? 그는 그렇게 되면, 그와 동시에 의로운 하나님과 성경의 무오성이라는 개념도 모두 사라질 것이라고 답한다.

 

 

지옥이 없다면 하나님은 거짓말쟁이?

지옥이 없다면 하나님을 의로운 분으로 볼 수도 없고, 죄에 대한 처벌이 없다면 하늘은 강간범, 약탈범, 사회적 문란자, 학살자들에게 아무런 관심도 없는 것이 되고 만다. 지옥이 없다면, 하나님이 무고한 희생자들을 향해 눈을 가리실 뿐 아니라 구원을 갈망하며 기도하는 사람들에게 등을 돌리시는 것이 된다. 피해자들은 많은데, 가해자들은 나 몰라라 한다면, 그 피해자들의 흘린 피와 눈물에 대해선 과연 어떤 위로가 있겠는가? 그러기에, 악에 대해 진노하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으로 볼 수는 없다. 왜냐하면 사랑은 악을 미워하기 때문이다.

지옥이 없다고 말하는 것은 하나님을 거짓말쟁이로 모는 일이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의 말씀도 거짓말이 될 것이다. 성경은 단호하게 말한다. 역사에는 두 가지의 결말이 존재하는데 어떤 사람은 구원을 받고, 어떤 사람은 잃어버린 바 된다(심판받게 된다)는 것이다.

 

(단 12:2)땅의 티끌 가운데서 자는 자 중에 많이 깨어 영생을 얻는 자도 있겠고 수욕을 받아서 무궁히 부끄러움을 입을 자도 있을 것이며

 

 

영화 '밀양'의 유괴범의 충격적인 고백

여러분들도 보셨겠지만, 영화 ‘밀양Sunshine’에서 전도연의 아들, 준이를 유괴한 유괴범은 자신이 죄에 대한 처벌을 받아야 했다. 전도연이 교회에 갔다가 그 감옥의 유괴범을 용서하기 위해 찾아간다. 그런데 관객이 보기에 그 발걸음은 너무 감정적이었고 충동적이었다. 그런데 신애가 대면한 유괴범은 의외로 얼굴 때깔이 참 좋고, 수염도 깎았고, 윤기가 잘잘 흘렀다.

 

  • 신애가 “예수님 믿고 난 다음에 당신을 용서하러 왔습니다.”라고 말하자, 유괴범은 한 술 더 떠서 이렇게 말한다.
  • “아, 그러십니까? 사실은 나도 교도소에서 예수님을 영접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내 죄를 다 용서해주셨습니다.”
  • 그러고는 신애 앞에서 웃는다. 이에 덧붙여 유괴범은
  • “내 마음이 이렇게 평안한 줄 몰랐습니다.” 라고 말한다.
  • ‘이런 평안을 진작에 누렸어야 하는데, 이런 기쁨이 있다는 것을 과거에 몰랐다는 게 억울하다’는 뜻으로 말한 것이다.

 

영화는 이때부터 신애가 미치기 시작하고 방황하기 시작한다. 이런 모습을 보면서 수많은 사람들이 기독교에 대한 비판과 비난과 조롱을 했다는 것을 안다. ‘반기독교적인 영화’라고 핏대를 올리면 이야기하기도 했다.

 

영화 밀양의 주인공, 신애가 유괴범을 면회가서 만나는 스틸컷
밀양 명장면, 신애와 유괴범이 교도소에서 만나다

 

 

용서가 퇴색된, 용서를 남발하는 시대: '사람 죽이고 미안하다하고 하면 다야?'

영화 중에 보면 이런 장면이 있다. 운전하다가 횡단보도에서 웬 중년부부를 치일 뻔한 신애에게 던져진 말이었다.

“사람 죽이고 미안하다고 하면 다야?”

 

이 말은 오늘날 세상이, 영화 ‘밀양’이 기독교를 향해 질문하는 것이 아닐까?

용서가 너무나 쉽게 변색, 변질되어 오용되고 있는, 말 그대로 ‘용서가 땅에 떨어진’ 기독교의 자화상을 ‘밀양’은 지적해주고 있다고 생각한다. 유괴범은 ‘준이 어머니가 당한 아픔의 천분의 일, 아니 만분의 일도 안 되겠지만 나도 지금 괴로워하고 있습니다’라고 말하면서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여야 한다. “이 죄는 용서받을 수 없습니다.”하면서 통곡해야 한다. 그럴 때 그 어머니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당신을 용서합니다”라고 말해야 정상 아닌가? 그렇게 해도 유괴범은 자신에 대한 모든 죄에 대한 죄책감으로 더 깊이 회개하고 통감해도 모자라는 것이다. 죄가 얼마나 컸으면 죄의 삯이 사망(롬 6:23)이라고 했겠는가? 그런데 우리들은 기독교의 세계, 사랑의 하나님에 너무나 익숙한 나머지 ‘용서’를 너무 남발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제대로 심판 받은 모압

오늘 본문 또한 용서를 떠올릴 만큼 모압나라가 인간적인 눈으로는 충분히 심판 받았음을 볼 수 있다. 속된 말로 ‘하루아침에 쫄딱 망하게 된, 모압’이었다. 매를 이만큼 맞았음 이제 용서라는 단어를 떠올릴 수도 있는 타이밍이었다.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하룻밤에 황폐하리라

이사야는 13장-23장까지 열방을 향한 하나님의 예언을 담고 있다. 15장은 아브라함의 조카 롯의 후손인, ‘모압에 대한 경고’(1절)이다. 바벨론의 경우와 달리, 모압에 대한 조롱이나 풍자는 전혀 보이지 않는다. 아마 모압 백성이 당하는 고통이 이스라엘 백성의 눈에도 감당키 어려울 만큼 극심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로 인해 모압의 교만의 뿔은 순식간에 부러지고 말 것이다.

  • 모압의 주요 도시 ‘알’과 ‘가르’가 하룻밤에 망할 것이다(1절).
  • 그리하여 그들은 2절에, (2)그들은 바잇과 디본 산당에 올라가서 울며...종교적인 거점에 가서 울고 있는 모압.
  • 모압은 느보와 메드바를 위하여 통곡하도다
  • 그들이 각각 머리털을 없이 하였고 수염을 깎았으며
  • 지붕과 광장에서 울음소리가 나지 않는 곳이 없으며(3절),

사람들은 모두 굵은 베로 몸을 동이고 자신들의 슬픔과 비애를 표현하고 있다. 모압의 군사들조차 전의를 상실한 채-그들의 혼이 속에서 떠는도다-두려움에 떨면서 울부짖을 것이다.

그들이 당한 모든 비극은 지옥을 방불케하는 현장이다. 더욱 충격적인 것은 이것이 하룻밤 사이에(1절)에 벌어진 일들이기 때문에 더 그러한 것!

하나님은 개인 뿐 아니라 한 나라의 운명도 간섭하신다. 하나님은 세상 모든 나라의 흥망성쇠를 주관하시는 분이시다. 유다만을 다스리시는 것이 아니라 세상 모든 나라, 열방, 열국을 통치하시는 하나님이심을 기억하라!

 

사자獅子를 보내리라

이사야는 이방 민족인, 모압을 몹시 애처롭게 생각했다. 그들이 받게 될 하나님의 징계, 심판이 그만큼 끔찍하고 혹독할 것이기 때문이다.

  • 모압의 피난민들은 살아남기 위해 군대의 힘이 미치지 않는 곳으로 도망할 것이다(5절). 모압의 성읍들이 모두 황폐해질 뿐 아니라 수원지인 느므림도 풀 한 포기 살 수 없는 폐허가 될 것이다(6절). 모압 땅 곳곳에서 통곡 소리만 들릴 것이다(7-9절).
  • (9)디몬 물에는 피가 가득함이로다 그럴지라도 내가 디몬에 재앙을 더 내리되 모압에 도피한 자와 그 땅의 남은 자에게 사자를 보내리라

살육당한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를 짐작케 한다. 피바다가 된 강물을 보라!

그러나 모압을 향한 하나님의 심판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이사야는 분명 5절에서 모압을 위한 연민과 동정이 있었지만, 하나님의 심판을 계속적으로 예언할 수 밖에 없다. 왜냐하면 그는 하나님의 선지자이기 때문이다. 자신의 심정과 감정과는 상관없이 하나님의 심판을 계속적으로 이야기하는 대목은 우리 그리스도인이 어떻게 인생을 누구 중심으로 살아가야 하는지, 무엇이 우선순위가 되어야 하는지를 보여준다. 하나님은 살아남은 모압인들을 멸하시려 사자를 보내실 것이다. 우리는 모압의 심판을 통해 악인을 긍휼히 여기시지 않고 끝까지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성품과 속성을 엿볼 수 있다. 모압의 현재의 처절한 비극은 정말 마음이 너무나 아프지만 하나님은 그들의 죄력, 과거의 죄된 모습을 기억하셨고, 그에 대해 아파하지 않고, 회개하지 않고, 하나님께로 유턴하지 않았기에 그들에게 이 심판은 필수적인 것이었다. 사랑의 하나님은 지금 여기서 ‘용서’를 섣불리 말씀하시지 않는다. 용서가 얼마나 절실한지를 모르는 자에게 용서를 해주었다간 그 가치가 너무나 값싸고 천박하고 가벼워질 수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심판에는 반드시 이유가 있다

모압의 심판에는 반드시 이유가 있을 것이다. 하나님의 심판에는 반드시 이유가 있고 적절한 것이다. 우리가 심판이나 지옥이나 형벌에 대해서 두려워할 줄 아는 마음이 있어야 하나님의 사랑이 그 경외감에서 꽃 피우는 것이 아닐까?

오늘 하루를 살아가면서 하나님을 사랑하되, 하나님을 두려워할 줄 아는 믿음의 자세를 달라고 기도했음 좋겠다.

‘사람 죽이고, 사람에게 상처주고 맘 상하게 해놓고선, 미안하다는 말만 하면 다야?’

 

그것이 기독교의 용서는 아니지 않는가?

오늘날 교회가, 우리가 말로만 모든 것을 커버하려는 경향이 있었다면 회개하자!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피와 희생과 용서가 소중하고 가치 있는 것을 안다면, 우리의 용서의 무게도 분명 무거워질 것이다.

하나님의 심판에 대해 두려워하자.

모압을 하룻밤 사이에 멸망시키신 하나님의 심판은 필요한 것이었고, 온 나라가 피바다가 되었지만 또 다시 심판을 하시는 데에는 하나님의 사랑이란 뒷면과 아울러 하나님의 공의의 앞면이 있다는 것을 기억하자.

 

 모든 성도들! 하나님 앞에 두려움으로 살아가며 심판받아 마땅한 죄인중의 괴수인 우리를 용서하신 값비싼 은혜에 감사하는 생활이 되었음 한다. 

 

 

이사야 15장의 모압을 향한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이야길 하면서 심판, 지옥이 왜 필요한지, 그에 반하여 기독교의 용서가 너무나 퇴색한 현실을 지적하면서 하나님의 성품에는 사랑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공의도 존재한다는 것을 강조한 설교이다.

 

 

 

이사야 6장 1-13절,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INDEX 왕의 출현(6:1-2) 선포(6:3-5) 치료: 정화(6:6-7) 왕의 출현(6:8)과 선포(6:9-12) 치료: 정화(6:13) 오늘 본문은 이사야의 소명장면입니다. 학자들 간에 왜 이사야의 소명장면이 6장에서야 등장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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