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우리는 시편을 보고 있다. 우리가 늘 텔레비전으로 대하는 드라마나 뉴스나 영화는 이야기고 소식들이기에 조금만 집중하면 금방 무슨 이야기가 나오는지, 무슨 소리를 하는지 알 수 있다. 그러나, 시편은 말 그대로 시(詩)이다. 시라는 형식이 때로는 우리들에게 그 의미를 잘 파악치 못하게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시인의 마음을, 시를 쓴 사람의 마음을 조금만 생각한다면 우리는 쉽게 시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구약성경의 시편은 ‘이스라엘의 시조’라고 해도 무방하다.
오늘 저와 여러분들은 시편 42편의 ‘시인의 마음’을 짧은 시간동안 같이 생각하고 묵상하고 나누면서 하나님을 찾는 귀한 순간이 되기를 바란다.
오늘 우리가 살펴볼 본문은 학자에 따라 성전의 찬양대였던 고라 자손들 중 한 사람이 지었거나 편집한 시일 것이라고 말한다. 어떤 사람은 다윗이, 아들 압살롬의 반역으로 예루살렘을 떠나 여러 곳으로 피신하고 다닐 때(삼하 15:13-16)의 서글픈 심정으로 지은 시(詩)를 고라 자손에게 주어 성전에서 부르게 한 노래라고 하기도 한다.
시편 42편과 43편은 원래 하나의 시(詩)였다. 많은 히브리 사본들에도 이 둘이 하나의 시편으로 되어 있다는 것을 증명해 주고 있다. 이러한 사실은 같은 후렴이 42편에서 두 번 반복되고(5절, 11절), 43편은 끝 부분에서도 반복되는 것이 그 증거이다(5절). 시편 42편은 고라 자손의 마스길이라는 표제가 붙어 있는데 고라자손(민 16장, 26:10-11)은 다윗왕 시대의 성전 문지기로서 성전에서 노래하는 자로 유명했다(대상 9:19, 대하 20:19). 시편 42편은 하나님께 대한 열망을 표현한 것이고, 43편은 하나님과의 완전한 교제를 기대하는 그의 찬양이다.
V.1...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아 갈급함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나이다.
한번은 왕이 포장마차를 타고 사막지대를 횡단하다가 심한 갈증을 느끼게 되었다. 물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그 메마른 땅은 무섭기까지 했다. 사막의 모래는 포장마차의 잔해와 목이 말라죽은 사람들의 뼈와 함께 휘날렸다. 그때 "물, 물! 물이 없다." 라는 외침이 들렸다. 공포가 몰아치는 순간이었다. 목은 타고 있다.
희망이 사라진 눈길은 저편 하늘의 구름을 향했다. 그러나 머리 위에는 뜨거운 태양이 내려 쬐일 뿐이다.
이 때 어느 누군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사슴을 풀어놓아야겠다."
사슴들은 사방으로 뛰어갔다. 사슴은 본능적으로 물에 대해 대단히 민감하다. 이리하여 샘물은 발견되었다. 그들은 아름답고 복된 우물가에서 휴식을 취하려고 앉았다. 이 때 왕은 서판을 내어놓고 다음과 같이 말하며 그 말을 서판에다 기록하였다.
"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나이다."
갈증에 시달려 허덕이는 사람의 심령을 가장 잘 표현해주는 동물이 바로 ‘사슴’이라는 것이다. 사슴은 본능적으로 갈증에 민감한 동물이고 물을 찾는 감각이 탁월한 동물이었던 것 같다.
사슴이 이토록 달음박질치며 이 곳 저 곳을 누빈 것은 다름 아닌 ‘갈급함’(V.1)이었다. 갈증으로 인해 목이 바싹바싹 타 들어갔기 때문이다. 여러분들은 갈증을 심각하게 느낀 때는 언제인가? 갈증으로 인해 견딜 수 없는 그 지경, 그 한계를 시인은 ‘사슴의 갈급함’으로 표현하고 있다. 그런데 시인은 여기서 그런 목마름의 경지를 자신의 영적인 갈급함으로 말하고 있다. 하나님에 대한 갈급함, 하나님을 찾고자 하는 갈급함, 하나님의 응답을 기다리고 사모하는 갈증...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나이다’
V.2 내 영혼이 하나님 곧 생존하시는 하나님을 갈망하나니 내가 어느 때에 나아가서 하나님 앞에 뵈올꼬
시인은 지금 자신이 하나님을 대단히 찾고자 한다는 사실을 피부로 느끼고 있다. 그것은 시인이 자신의 인생에 있어 심각한 문제가 있어서인지 아니면 하나님을 순수히 만나고자 하는 열정에 의해서인지는 몰라도 시인은 지금 사랑하는 연인이 자신의 연인을 만나고자 하는 바램처럼-‘내가 언제 그(그녀)를 만날 수 있을까?’-‘내가 어느 때에 나아가서 하나님 앞에 뵈올꼬’라고 말하고 있다. 그만큼 시인에게 있어 하나님을 만나는 것은 기쁨이었다. 만나면 꼴 뵈기 싫고 상처만 받고 얼굴만 붉히는 그런 관계 속에서는 다시 만나고픈 기대나 갈망을 찾을 수가 없다. 그러나, 오늘 우리가 보는 시인은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 자신의 존재의 기쁨이었다. 하나님이 그의 삶에 어떻게 역사하셔서 시인의 불치병을 고쳐주셨는지 아니면 벼랑 끝에 서 있던 자신의 사업을 회복시켜주셨는지 아니면 풍지박산이 난 가정에 평안을 허락하셨는지...어떠한 이유에서든지 간에 지금 시인은 하나님을 만나기를 기대하고 있다. 단순한 기대가 아니고 갈망하고 있다.
요즘 애들은 모르겠다. 예전에 저희들은 초등학교 시절에 우리들은 ‘소풍’이나 ‘운동회’같은 날이 되면 그 날을 얼마나 기다리고 고대하는지 모른다. 그러면서 소풍 가서 먹을 과자랑 음료수를 가방 안에 조심스럽게 넣어놓고, 운동회에서 뛸 머리띠와 체육복과 운동화(실내화-특히 나는 100M달리기나 계주를 참 기대했다.)를 소중하게 챙겨놓고 잠자리에 들지만 쉽게 잠이 오질 않는다. 그것은 ‘그 다음날’ 있을 모든 것들을 생각하고 상상을 하니 마음이 졸여서 그런 것이다. ‘내일 비가 오면 어쩌지? 비가 오면 안 되는데...’ 비가 오지 않도록 기도하고 잤던 경험이 여러분들에게 있을 것이다. 그러한 초등학생의 자그마한 기대와 갈망...오늘 이 시편에 나타난 시인의 하나님을 만나고자 하는 기대는 초등학생의 그러한 기대 이상의 것이었을 것이다.
얼마나 간절하였으면 그 간절함을 사슴에다 비유하였을까? 그러나, 오늘날 하나님을 믿는 우리들은 이 초등학생의 바램 만큼 하나님을 찾고 있나요? 우리의 갈망의 수준은 초등학생 수준 이하는 아닌가? 여러분들은 하루하루를 살면서 하나님을 기대합니까? 하나님이 주신 하루를 기대하십니까? 하나님이 오늘 하루는 어떻게 만나주실까? 이번 일주일은, 이번 달은, 올해는 어떻게 만나주시고 어떤 은혜를 보이실까? 그러한 기대감이 여러분에게 있는가?
‘오늘 주실 그 분의 은혜’를 기대하자. 아버지, 오늘도 당신의 은혜를 내게 부어주소서!
시인이 어떤 상황에 처해있는지를 3절을 통해서 우리는 어렴풋이 알 수 있다. 그가 평상시와는 다른 환경에 처해 있음을 알 수 있다.
‘내 눈물이 주야로 내 음식이 되었도다’
시인은 지금 대단히 힘겨운 삶을 살아가고 있는 듯하다. 늘 눈물을 안고 살아가는 시인의 맘과 지금 심각하게 마음이 상해있음을(V.4) 나타내고 있다. 그런데 그 이유가 아마도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오는 듯하다. 그의 주변의 사람들이, 아니면 대단히 절친하고 가까운 사람들이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뇨?Where is your God?’라고 반박하는 것이다. 그것은 단순한 논쟁의 꺼리가 아니라 서로가 서로를 상처주고 마음을 심하게 상하게 하는 문제였던 것 같다. 오히려 교회 다니지 않았다면 듣지 않았을 소리들!!! 예수 믿지 말껄!!!껄껄껄~
아니면 4절에 나오는 내용으로 미루어보아 자신과 함께 하나님을 찬양하고 예배를 인도하고 하나님의 집에서 봉사하였던 사랑하는 친구나 가까운 사람이 모든 것을 포기하고 모든 것을 전폐하고 신앙을 버린 후 오히려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라고 비아냥거리는 상황인지도 모른다. 자신이 인도하였던 사랑하는 무리들이 자기를 버리고, 하나님을 버리고 불신앙의 굴레로 떨어져가서 더 이상 하나님에 대한 거룩한 기대는커녕 오히려 ‘하나님께 대한 불경건한 조소와 욕설’로 되돌아왔던 것이다. 그런데 이런 비아냥거림을 우리는 어쩌다가 한 번씩 당하는데 시인은 ‘사람들이 종일 나더러 하는 말’이었던 것이다.
날마다 그에게 그들의 말이 가시가 되어, 비수가 되어 그의 가슴을 찔렀던 것이다. 그게 시인의 마음에 더 큰 상처가 되었던 것 같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으로,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으로 오히려 비방의 대상이 되었던 시인의 모습이라고 추측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시인의 상황이 정확히 어떤 상황인지는 결론지을 수 없지만 그의 영혼이 심하게 흔들리고 주위의 친인척이나 지인들이 절대 자신을 어떻게 할 수 없는 그런 상황임을 암시 받을 수 있다. 누굴 의지하던지 간에 자기에게 돌아오는 것이 결코 유익하지 못함을 시인을 뼈저리게 느낀 사람인 듯하다.
“내 영혼이 내 속에서 낙망이 되므로”(V.6)-
그러기에 그는 하나님을 찾는데, 하나님을 만나는데 이토록 안달하고 있다. 사슴의 몸부림처럼 그 자신 또한 하나님 앞에서 몸부림치기를 원하는 것이다.
V.5 Why art thou cast down, O my soul? and [why] art thou disquieted in me? hope thou in God: for I shall yet praise him [for] the help of his countenance
시인은 자신이 ‘낙망’하고 ‘불안’하는 것을 피부로 느끼고 있었다. 5절 한 절만 보더라도 그는 심하게 흔들리고 있음을 알 수 있다. 3-4절에 나오는 그의 ‘눈물’의 이유가 단지 사람들과의 관계, 불신자와의 관계든지 아니면 신자들과의 관계든지 간에-사람들로 인한 낙담-그는 지금 자신의 심하게 흔들리는 감정과 영혼을 주체하지 못해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의지를 가지고 ‘너는 하나님을 바라라’라고 외치고 있다.
‘나는 낙망하고, 좌절하여 상처받고, 억울하고 두렵고 불안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한다! 나는 하나님을 바라보자! 나는 하나님을 바라본다’
고 그렇게 울부짖고 있는 것이다. 그는 스스로 자신에게 그렇게 선포, 선언하고 있다.
우리들에게 시인처럼 이러한 경우는 없는가?
모든 것들로부터 우겨쌈을 당하고 더 이상 숨을 쉴 수 없을 정도의 답답함과 도저히 회복되지 않을 것 같은 사람들과의 관계, 가정, 사업, 믿음, 상황들...우리들에게는 시인처럼 ‘내 눈물이 주야로 내 음식이 된’ 그런 순간은 없었는가? 그런 순간이 있었다면, 지금 그런 순간이라면 우리는 시인의 마음, 시인의 삶의 태도를 한 번 묵상해 보기를 원한다. 한 번 그 시인의 마음을 헤아려보았음 한다. 그가 그토록 짓눌려 좌절감의 늪에서 헤어 나올 수 없는 그런 지경에서 절망하고 낙망하고 스스로 위축되어 불안하고, 사람들은 점차 자기 곁에 머물러 있지 않고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고 하면서 지탄과 욕을 퍼부을 때, 심지어 같이 신앙생활을-마음을- 하였던 이들이 하나님을 비방하면서 등을 돌릴 때 시인의 마음은 찢어졌을 것이다. 그러나, 시인은 하나님을 기억하고 있다. ‘생존하시는 하나님’(V.2)을 찾고 있다. 그가 죽은, 화석화된 싸늘한 시체의 하나님이 아니라 지금도 살아 계셔서 역사하시는 ‘역사의 주인공’이신 하나님을 찾고 있다.
그에게는 하나님만이 자신의 편이시며 하나님만이 자신의 힘이라는 사실을 깊이 체험하였던 흔적이 있다. 그러기에 그는 5절에서 ‘그 얼굴의 도우심을 인하여 내가 오히려 찬송하리로다’라고 적고 있다. 그는 이런 폭풍우 후에 하나님의 고요함과 평안이 분명히 보장될 것이라는 미래를 자신의 현실로 만드는 믿음의 사람이었다. 비록 보이지는 않는 미래였고 장래였지만 믿음으로 기도의 첫발을 내디딘 시인의 심령이다. 비록 눈에 보이는 것이 없고 손에 잡히는 것이 없다손 치더라도 하나님으로 인해 한 발자국 더 발걸음을 내디디는 그 것이 바로 믿음의 삶이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은 자신의 친척과 본토를 떠났다. 자기가 그 곳을 떠난다는 것은 자기의 목숨이 언제 달아날지 모르는 위협 속에 자신을 던진 것이다. 오직 하나님만이 그를 돌보아 주실 것이다. 하나님이 주변의 족속들과 부족들 사이에서 자신의 가족들의 생명을 보장하실 것이라는 불안한 미래 위에 믿음으로 갈대아 우르를 떠났던 것이다. 믿음의 사람들은 다 이러했다. 노아는 상상할 수 없었던 그 엄청난 홍수와 폭우를 보고 배를 지었는가? 믿음으로 방주를 지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믿음으로 자신의 외동아들 이삭을 죽여 제사를 드릴 려고 했고, 야곱은 얍복강 가에서 자신의 모든 재산들과 자손들과 부인들의 목숨과 안전에 두려움을 느꼈다. 그는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었을 때 믿음으로 하나님을 바라보았다. 요셉은 하나님이 주신 푸르른 꿈을 믿었고, 그러기에 자신을 팔아버린 형들과 보디발의 아내를 용서하며 그 기나긴 시간동안 인내하였다. 그러기에 요셉은 ‘그리스도의 모형’이라 일컬음을 받는다. 믿음으로 홍해에 발을 들여놓은 모세는 바다를 육지같이 건넜고, 여호수아는 여리고 성 앞에서, 적국 앞에서 목숨을 담보로 한 할례를 하나님을 믿음으로 시행하였고 계속된 그 분의 약속을 믿음으로 여리고를 정복하였다. 믿음으로 양치기 다윗은 사자와 곰의 위협으로부터 안전을 보장받을 수 있었고, 그러한 믿음은 후에 거인 블레셋을 말도 안 되는 무기로 무찔렀던 것이다. 이것이 바로 믿음의 사람들의 흔적이다. 이것이 ‘바로 믿음의 사람들의 역사이며 이야기story'이다.
이들처럼 오늘 시편 42편에서 시인인 그는 하나님의 도우심을 좀 더 시적으로 표현하고 있는데 바로 ‘그 얼굴의 도우심’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그 손의, 그 팔의 도우심’이라고 하면 더 역동적으로 들릴텐데 시인은 ‘그 얼굴의 도우심’이라고 이야기한 이유는 무얼까? 아마도 이것은 하나님께서 마치 자기 자식의 얼굴을 들여다보는 친아버지의 얼굴처럼 친히 얼굴을 보이시면서 시인의 맘과 영혼을 돌아보시는 구체적인 하나님의 맘을, 세심하게 돌아보시는 하나님의 심장을 그리고 있는 것이리라. 그 얼굴의 도우심으로 인해 찬양할 수 있는 하나님의 증거가 시인에게 있을 것임을 시인은 믿음으로 개척하고 있다.
오늘 지금 우리들이 고통과 슬픔과 비탄 가운데 놓여져 있다면, 우리는 시편기자, 시인의 하나님의 갈망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이 바로 ‘믿음의 사람의 자세’이기 때문이다. 여러분에게 시인의 이러한 간절한 영적 갈증이 삶 속에 풍성하시기를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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