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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로마서

로마서 강해⑪ 4장1-25절, 유대인과 이방인의 조상, 아브라함-이신칭의의 모델

by Message.K 2021. 10.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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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1절: 육신으로 아브라함이 무엇을 얻었는가?
2절: 아브라함이 행위로 의로워졌으면 자랑할 게 있으나 하나님 앞에선 없다
3절: 성경의 답은? 아브라함의 믿음이 의로 여겨졌음을 밝히고 있다.
4절: 일하는 자에겐 삯과 보수는 당연한 것, 절대 은혜가 아니다.
5절: 일하지 않고 경건하지도 않은 자를 의롭다하시는 이를 믿는 믿음을 의로 여기신다.
6절: 일한 것이 없이 하나님께 의로 여김을 받는 자의 복: 다윗의 예
7절: 불법이 사하고 죄가 가리워짐을 받는 사람의 복
8절: 주께서 그 죄를 인정하지 않는 자의 복
9절: 이 복이 할례자냐 무할례자냐? 아브라함의 믿음이 의로 여겨졌다.
10절: 의로 여겨진 시점은 바로 무할례시다.
11절: 할례의 표는 무할례시에 믿음으로 된 의를 인친 것에 불과. 이유? 
     무할례자로서 모든 믿는 자의 조상이 되기 위해서이다.
12절: 또한 할례자의 조상이 됨은, 할례자, 무할례자 모두의 조상이 되기 위함
13절: 아브라함이나 그 후손에게 세상의 상속자가 될 언약은 오직 믿음의 의로 말미암음이다.
14절: 율법에 속한 자가 상속자들이 되면 믿음은 헛것이 되고, 약속은 파기된다.
15절: 율법은 진노를 이루게 하고, 율법이 없음 범법도 없다.
16절: 상속자가 되는 것이 은혜가 속하기 위해선 믿음으로 되어야 한다. 모든 후손에게 약속을 굳게 하려함이다. 율법이나 믿음에 속한 자, 아브라함은 모든 민족의 조상이시다.
17절: 내가 너를 많은 민족의 조상으로 세웠다!-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으로 부르시는 이
18절: 아브라함의 믿음: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람,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됨
19절: 아브라함이 자신의 나이와 사라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믿음이 약해지지 않음
20절: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치 않고 오히려 믿음으로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림
21절: 약속하신 그것을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
22절: 그러므로 그것이 의로 여겨졌다. 
23절: 그 의는 아브라함만을 위한 것이 아니요
24절: 의로 여기심을 받는 우리도 위함: 예수 우리 주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를 믿는 자
25절: 예수는 우리의 범죄로 인해 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게 하시기 위해 살아나신 것이다.

 

 

 


  바울은 지금까지 이신칭의의 진리-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얻는다-를 설명했다(3:21-31). 그런데 바울의 말을 듣고 있던 유대인들이라면 당연히 반론을 제기할 것이다. 그렇다면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았는가?

 


  로마서 4장의 전반부(4:1-12)는 다시 4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첫째, 아브라함이 어떻게 의롭게 되었는가를 설명한다(1-3절).
  둘째,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의롭게 되었다는 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뜻하는지를  설명한다(4-7절).
  셋째, 다윗이 어떻게 아브라함처럼 이 믿음에 의한 의를 받게 되었는가를 설명한다(7-9절).
  넷째, 아브라함이 의롭게 된 것은 그의 할례시가 아니라, 무할례시인 것을 강조한다(10-12절).

 

 


 첫째, 아브라함이 어떻게 의롭게 되었는가를 설명한다(1-3절).

아브라함은 유대인의 ‘조상’이다. 유대인의 역사를 통틀어 아브라함보다 더 중요한 인물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나님의 선민, 하나님께 구원받은 하나님의 언약 백성이 된다는 것은 곧 아브라함의 후손이 되는 것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아브라함이 하면, 유대인 전체가 하는 것이다. 


  수많은 유대 문헌에서는 아브라함의 행위가 완전하였음을 이야기한다. 하지만 바울은 여기서 아브라함이 행위의 완전함을 통해 구원받았다고 이야기하지 않는다. 아브라함을 우리는 무엇의 조상이라 하는가? 그렇다. 믿음의 조상이다. 믿음의 조상이지, 행위의 조상이 아니다. 

 


  아브라함이 구원받은 것은 1-8절에서 행위도 아니고, 9-12절에 할례도 아니고, 13-16절에 율법도 아니며, 17-22절은 오직 믿음이라고 밝히고 있다. 아브라함이 행위로 구원받았다면 자랑할 것이 있을텐데, 하나님 앞에선 없다고 고백한다(1-2절). 

아브라함이 의로 여김 받은 시기는 창 15장이다. 특별히 창세기 15:6에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 
Abram believed the LORD, and he credited it to him as righteousness. 


개역개정판에선 하나님을 믿은 것이 의롭게 된 것으로, 믿음 = 의 의의 공식처럼 자연스럽게 생각될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바울의 의도가 아니다. <여겨졌다>는 동사 ‘에로기스데’는 일종의 신적 수동태로서 하나님의 행동을 강조한다. 즉,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약속을 믿었을 때 하나님께서 이 믿음을 보시고, 하나님께서 은혜로 아브라함을 의롭게 하셨다는 것이다. 아브라함의 믿음이 의를 산출하는 수단이 되었더라도 믿음이 의를 산출한 것은 아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아브라함에게 의를 가져왔다. 아브라함을 의롭게 하신 주체는 하나님이지, 아브라함의 믿음이 아니다. 믿음은 하나님이 역사하시는 자리이며, 믿음은 하나님의 은혜가 작용하는 공간이다. 심지어 아브라함의 믿음도 하나님과 분리되지 않는다. 신실하신 하나님이 아브라함에 믿음을 불러일으켰다. 믿음이 행위가 아니라는 근본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처럼 바울의 강조점은 아브라함의 믿는 행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의로 간주하시는 하나님에 있다. 하지만 믿음이 없는 곳에는 하나님의 의가 작용할 수가 없다.  

 

 



  아브라함에게 대단한 믿음과 충성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은 창 26:5이다.
이는 아브라함이 내 말을 순종하고 내 명령과 내 계명과 내 율례와 내 법도를 지켰음이라 하시니라(하나님께서 이삭에게 아브라함에 대해 이야기하는 말이다)



  아브라함은 기근, 왕들의 부, 그의 아내, 할례, 이스마엘과 하갈과의 시험, 가장 어려운 시험인 독자 이삭을 제물로 바치는 것 가운데 하나님에 대한 충성이 드러났다. 그래서 유대교에선 이런 모든 행위가 아브라함을 의로 인정받게 했다고 한다. 하지만, 그의 칭의는 26장, 22장도 아닌, 17장도 아닌 바로 훨씬 전인, 15장에서라는 것을 명심하라! 

 

 


 여러분! 
  우리가 구원받은 것은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구원받고 의롭게 칭함을 받았음을 기억하라! 에로기스테! 하나님의 신적 수동태로 우릴 의롭다 해주신 은혜를 기억하라!
(거지와 왕자?)

 

 



 둘째,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의롭게 되었다는 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뜻하는지를  설명한다(4-7절).


  아브라함에게 의의 원천은 행위가 아니고 하나님의 은혜라는 사실이 4-5절에서 더 분명하게 나타난다. 4절에 바울은 이 점을 시장에서 적용되는 노동과 임금의 상관관계를 들어 설명한다. 시장에서 임금은 정당한 노동의 댓가이다. 노동자가 고용되어 일을 했다면, 고용주는 그 노동자에게 임금을 지불해야 할 의무가 있다. 그건 은혜가 아니라 당연한 보상이요, 의무이다. 하지만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의는, 노동과 임금의 관계처럼, 아브라함이 선한 일을 한 보상으로, 그 대가로 받은 것이 아니다. 그것은 아브라함의 믿음을 통해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진 것이다. 5절에 하나님은 우리의 일과 경건의 유무와 상관없이 의롭다고 하시는 분임을 믿는다면 하나님은 자신에 대한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신다고 서술한다. 신적 수동태! 아브라함에게 있어 의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의 선물이요, 값없이 주어진 복이다. 

 

 


 의는 일과 함께 가는 것이 아니라 믿음과 나란히 간다. 칭의=무죄선고, 법적 선언 이상의 의미이다. 이것은 새로운 창조이며, 불경건한 자를 의로운 자로 만드는 하나님의 역사이다. 왜냐하면 최종 재판장으로서 법적인 선언을 하시는 분이 또한 창조자이시며, 구속자이시기 때문이다.

 

 

 
여러분! 우리의 구원은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임을 기억하라! 
  우리가 일을 많이 한다고 해서, 봉사와 섬김의 양으로 우리의 구원을 확신해선 아니된다. 그것은 구원받은 자의 결과이고, 열매이지, 증거는 아니다. 일을 하지 않아도, 경건하지 아니한 우리를 주님은 구원하신 것이다. 감사하자!

 

 

 


셋째, 다윗이 어떻게 아브라함처럼 이 믿음에 의한 의를 받게 되었는가를 설명한다(7-9절).


  아브라함과 마찬가지로,  다윗도 하나님의 의가 일의 대가가 아니고, 하나님을 믿는 자에게 주시는 은혜의 선물이자, 축복이라고 고백했다. 다윗은 이스라엘 국기의 별의 주인공이자, 유대 왕국의 건설자이다. 바울의 이신칭의가 사실이라면 다윗의 경우도 어떠한가가 굉장히 중요한 문제이다. 그런 다윗도, 자신의 범죄(간통죄, 살인죄)에 대한 하나님의 용서를 체험하고, 6-8절에서 시편 32:1을 인용하여 이와 같은 고백을 한 것이다. 여기서 등장한 ‘복’은 단순히 물질적이거나 정신적인 복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아브라함의 경우에 언급한 ‘의’처럼 종말론적인 복을 지칭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다시 한번 바울에게 ‘칭의’는 단순한 법적 선언 이상의 의미임을 확인할 수 있다. 당대 유대교의 아브라함의 해석 VS 바울의 해석

롬 5:8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바울은 이스라엘 역사에 있어, 가장 중요한 두 인물인 아브라함과 다윗을 예를 들어, 그들도 행위가 아니라 믿음에 의해서 의를 누리게 되었다고 한다. 


 이로써, 구약이나 신약이나,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구원받은 방법은 하나밖에 없다. 오직 하나님께 의롭다 함을 받는 것은 ‘행위’가 아니라‘믿음’이라는 것이다. 그러기에 아브라함은 모든 민족, 모든 열방의 믿음의 조상이 되는 것이다.

 


  넷째, 아브라함이 의롭게 된 것은 그의 할례시가 아니라, 무할례시인 것을 강조한다(10-12절).

 

  유대인은 할례받은 사람만 유대인으로 인정했고, 아브라함의 후손으로서 구원받은 사람으로 간주했다. 이는 역사는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으시면서 아브라함과 아브라함의 후손은 할례를 받으라고 명령하셨기 때문이다. ‘할례는 목숨보다 중요해!’그래서, 이 할례는 유대인과 이방인을 구별하는 경계선, 분명한 증거물이 되었다. 유대인의 논리라면 이방인은 구원받지 못하는 셈이다. 그러나 바울의 이신칭의의 복음은 유대인의 이런 주장을 뒤집어엎는다. 구원은 할례가 아니라 믿음에 의해서 좌우되기 때문이다. 


:부르심을 받은 사건(창12장)
나이 75세
:믿음으로 의롭다하심을 받은 사건(창 15장)
나이 86세
:아브라함이 할례를 받은 사건(창 17장)
나이 99세

:문제의 핵심은 아브라함이 의롭다 함을 받은 것이 할례전인가 아니면 할례 후인가? 바울은 한마디로 아브라함이 의롭다 함을 받은 것이 할례시가 아니라 무할례시(10절)라고 말한다. 

 

 


  아브라함은 할례를 받기 14년 전에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았다. 그러므로 의롭다함을 받은 것은 믿음이지, 할례가 아니다. 

  그렇다면, 이미 믿음으로 구원받은 아브라함에게 왜 할례를 받으라고 했을까?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은 아브라함에게 할례는 바로 표지(sign)이자, 도장(seal)이었다. 할례는 표지이다. 즉 할례의 외적인 표지는 바로 ‘믿음으로 의롭게 되었다’는 것이다. 마산 -> 서울 200km라 치자. 그 표지판은 실제 서울이 아니다. 그러나 그 길을 따라 가면 서울이 나온다. 할례는 구원받음의 표지이다. 또한 할례는 도장이다. 서류에 도장을 찍으면 진짜라는 표시이다. 할례는 하나님의 도장이다. 
  그러기에 의롭다하는 것은 할례라는 표지와 도장으로 이뤄지는 것이 아니다. 순서상 반대이다.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은 사람에게 표지해시고 도장을 찍는 것이다. 아브라함의 생애가 그것을 보여줌.
  아브라함이 할례를 받기 전에 이신칭의가 일어난 이 사건은 유대인이든지 이방인이든지 믿는 사람은 모두가 아브라함의 후손이며, 아브라함은 그들의 참된 조상임을 밝혀준다. 

 


  
  왜 바울이 아브라함의 경우를 들면서, 이처럼 할례가 의를 얻는 수단이 아님을 강조하는가? 바울 당대 어떤 부류의 유대인들은 할례를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종말론적인 구원을 얻어 메시야 왕국에 들어가는 마지막 보루로 여기고 있었기 때문이다.
  


4:13-16 언약과 율법과의 관계, 
4:17-22, 아브라함의 믿음의 내용, 
4:23-25 아브라함의 믿음, 후대 신자들, 예수 그리스도와의 관계를 설명한다. 

 

 

 


믿음과 신념의 차이


샌프란시스코의 한 은행에서 어떤 남자가 은행 용지에 ‘내게 총이 있다. 이 가방에 돈을 넣어라!’라고 쓴 뒤 창구 줄에 서서 차례를 기다렸다. 혹시 누군가 그 글을 보지 않았을까 걱정이 된 그는 용지를 들고 길 건너 다른 은행으로 갔다. 창구 직원에게 은행 용지를 내보였다. 여직원은 순간 당황했지만, 은행 강도가 어설퍼 보여 이렇게 말했다.

“이건 AA은행 용지여서 돈을 줄 수 없습니다. 우리 은행 용지에 다시 쓰든지 아니면 AA은행으로 다시 가야 합니다.”

 

그러자 은행 강도는 알았다며 다시 길 건너 은행으로 갔다. 여직원의 신고를 받고 경찰이 AA은행으로 갔을 때 그는 창구 앞에 줄을 서서 자기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가 신앙생활하는 모습도 이렇지 않은가? 어리석은 은행 강도처럼 말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아브라함이 자신들의 조상이고, 자신들이 후손인 것을 굉장히 기뻐하고 흥분했지만 정작 그들은 아브라함에 대해 아무것도 알지 못했던 것이다. 바울은 아직도 행위의 율법에 빠져 길을 잃고 헤매는 이스라엘에게 ‘신아브라함론’을 제시했다. 아브라함과 율법과 할례와 믿음의 관계를 정리했다. 

 

 



  어떤 할머니가 있었다. 가재를 삶아 먹으면 간디스토마에 좋다는 이야길 듣고 손자가 간디스토마에 걸린 데에다 가재를 삶아 먹였다. 결과는 아이가 죽어버렸다. 분명 잘못된 정보에 기초한 접근이다. 할머니가 너무 정보를 여과 없이 가져오는 바람에 손자의 생명을 앗아간 꼴이 되고 말았다. 이것은 믿음이 아니다. 잘못된 정보에 근거한 믿음, 헛된 정보에 기초한 믿음이라고 할까? 할머니의 믿음이 잘못되었기보다 지식이 잘못되었기에 결과는 비극적이었다고 할 수 있다. 

 


  최근에 벌어진 무슨 기도원장이라고 하면서 72세의 할머니가 벌인 사건을 뉴스를 통해 들었을 것이다. 자신을 예언자라고 하면서 모든 것을 통달하는 것처럼 신도들에게 속이고는 금품과 현금을 갈취한 도둑의 우두머리가 있었다. 잘못된 믿음이다. 대상이 잘 못된 것이다. 

 

 



여러분, 믿음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아브라함은 하늘의 별처럼 후손이 많아질 것이라고 하나님이 말씀하셨을 때, 이 약속을 믿었다. 많은 사람들이 이 사건을 보면서 믿음을 합리적이라고 오해한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믿음은 결코 ‘맹목주의’가 아니다. 이해되지도 않는데 무조건 믿는 것이 아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약속에 대해 자신이 무엇을 믿고 있는지 분명히 이해했다. 

“하나님은 무에서 유를 창조하시며 죽은 자를 살릴 수 있는 분입니다!”

 또한 자신이 지적으로 이해하는 약속의 내용을 지성적으로만 아니라 감정적으로 동의하며 의지적으로 신뢰했다. 아브라함의 믿음은 한 마디로 전인적인 믿음이었다. 참된 믿음은 이처럼 전인적인 것이다. 지적인 이해와 감정적인 동의와 의지적인 신뢰가 함께 결합된 것이다. 

 



18절
믿음은 이런 것이다
내 생각과 전혀 맞지 않는 것을 믿는 것이다. 자신에 대해 ‘아니오’를 믿는 것이다.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대로 하면 망할 것 같고 죽을 것만 같은 것을 믿는 것이 바로 믿음이다

 

 


믿음이라는 것? 도저히 나의 능력으로는 이 세상을 성공적으로 살 자신이 없어 인생을 몽땅 하나님께 맡겨 버리는 것을 말한다. 

 


오늘 본문에 보면, 아브라함은 18-19절에 아기를 잉태할 수 없는 상황이고 도저히 불가능한 태인데도 믿음이 약해지지 않고 20절에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하지 않았다고 했다. 

 



  우리 영화 ‘타짜’같은 것을 보면, 마지막에 정말 한방 큰 것을 잡았다 싶으면 ‘올인’이라고 하면서 자신을 가진 것을 다 밀어 넣습니다. 그거에 가진 모든 돈을 투자하는 것이지요. 만약 이기게 되면 성공이지만, 지게 되면 실패인 것이죠. 쪽박 차게 되는 것이다. 그 한 패에 자신의 모든 재산을, 판돈을 거는 것이다. 올인! 



  하나님께 찾는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에 모든 인생을 올인하는 사람을 예수 그리스도와 바꿔치기 해버리시는 것이다. 즉 그 사람이 지은 모든 죄는 예수님이 가져가시고 예수님이 가지고 가신 의가 그 사람에게 넘어가게 된다. 



  믿음은 가만히 있는다고 저절로 생기진 않는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약속, 말씀을 붙드는데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 



  가장 큰 어려움은? 그 당시 사람들의 사고방식이었다. 당시 사람들은 본처가 아이를 낳지 못하면, 후처를 들이면 되는 것이다. 후처가 아이를 못 낳으면 첩을 또 두면 되는 것이다. 그게 세상의 방식이다. 고대근동에는 이런 일부다처제의 분위기가 물씬 풍긴다. 사무엘의 아버지 엘가나, 어머니 한나도 그랬고, 다윗왕도 부인이 많았다. 사울의 딸 미갈과 결혼했던 다윗이었지만, 장인어른인 사울은 사위를 너무나 미워한 나머지 나중에는 미갈을 다른 남자에게 시집(재혼)보내버린다. 이 시점에 다윗은 나발의 아내, 지혜로운 여인 아비가일과 결혼하게 된다. 그 당시에는 그게 풍습이고 관습이고 다윗은 왕이기에 더 그러했다. 솔로몬은 더했다. 1천명의 부인을 거느렸다. 

 



  그래서 실제로 아브라함도 그렇게 했었다. 부인 사라의 여종 하갈이 후처로 들어간 것이다. 그런데, 사라가 못했던 일을 하갈이 해낸 것이다. 올레! 아들 이스마엘을 낳게 되자, 하갈이 기세가 등등하여 본처를 깔보고 무시하고 갈등을 유발하게 되는 것이다. 여자들은 다 그렇다! 씨를 통한 주도권 싸움이 시작된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이스마엘이라도 상속자로 삼고자 한 마음을 거절하신다. 하나님의 말씀은 오직 사라의 씨를 통해서만 약속을 성취하시겠다는 것이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명령대로 후처인 하갈과 이스마엘을 집안에서 추방시킨다. 인간적으로는 굉장히 야속하기도 하고 매정한 처사이지만, 하나님은 더 이상 씨에 대한 갈등의 싹을 잘라버리기를 원하셨다. 

 


  솔직히 생각해보라. 누가 잘못했는가? 하나님이 주문을 해서 아브라함이 하갈과 관계를 한 것이 아니었다. 사라가 인간적으로 도저히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니깐 가문의 가계나 씨를 이어가야하니깐 아브라함을 꼬셨고, 아브라함도 자신의 나이는 점점 늙어가고 아내 사라도 임신하고 출산할 나이에서 점점 멀어져가니깐 인간적인 생각으로 좋다고 넙쭉 하갈과 잠자리를 같이 한 것이 아닌가? 그런데, 이것은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불순종이었다. 하나님은 이런 아브라함 커플의 불순종에 대한 후유증, 사라와 하갈의 갈등에 대한 문제까지도 해결책을 제시해주신다. 두 모녀를 쫓아 보내버려라는 것이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약속을 더 간절하게 붙잡아야 하는데, 그것이 힘드니깐 인간적인 방법으로 그 약속의 변형을 요구한 것이다. 인간적인 한계에 부딪히니 인간적으로 그 불가능을 가능으로 바꾸기 위해 시도한 것이다. 그것은 믿음이 아니다. 우리의 인간적인 생각과 기교로 불가능한 상황을 인위적으로 조작하거나 기계적으로 만들어서 불가능이 가능처럼 보이게끔 변형하는 것은 믿음이 아니고 불신이다. 아브라함에게도 불신은 있었다. 

 



우리는 어떠한가? 하나님의 말씀을 붙잡고 나아가려는데 어려움을 느끼는 대목은 없는가? 캠퍼스에서, 교회에서, 직장에서 믿음생활이 결코 녹녹치 않다. 밥먹을 때 기도하는 것부터 술자리, 회식자리...뇌물과 비리...모든 것이 녹녹치 않지만,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제2의 아브라함이 되길 소원한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약속을 끝까지 붙드는데 어려움은 역시 육신이었다. 아브라함과 사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기다리는 동안 서서히 늙어가고 있었다. 아브라함은 백 살이었고, 사라는 구십 살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은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치 아니하고 오히려 믿음에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 

 


19절은 인간의 관점에 볼 때, 아브라함의 현실은 완전히 절망적인 상황이었다. 그러나 그는 희망이 없는 전무한 상황(바랄 수 없는 상황)에서도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는’ 부활의 주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 같이 부르시는(곧, 무에서 유를 창조하시는) 창조주시라는 사실을 믿었다. 



17.기록된 바 내가 너를 많은 민족의 조상으로 세웠다 하심과 같으니 그가 믿은 바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으로 부르시는 이시니라 
18.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으니 이는 네 후손이 이같으리라 하신 말씀대로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사실 무와 죽음보다 인간을 더 절망시키는 것은 없다. 그러나 하나님께는 무와 죽음이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오히려 하나님은 무에서 유를, 존재를 만들어내시고, 죽음에서 생명을 주신 분이시다. 아브라함은 이런 능력을 믿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약속을 받았을 때는 그는 믿음이 약해지지 않고 견고해져서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을 능히 이루실 것을 확신했던 것이다. 



19.그가 백 세나 되어 자기 몸이 죽은 것 같고 사라의 태가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믿음이 약하여지지 아니하고 
20.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하지 않고 믿음으로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21.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으니 


 
 여기서 이야기하는 것은 단순히 아브라함의 이야기가 아니다. 아브라함은 소재이고, 앞에 4:10-12에서 이야기한 할례 또한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의 의를 받는데 조건이 될 수 없다고 했다. 그리고 13-16절에선 행위문제를 들먹인다. 언약은 율법으로 된 것이 아니라 오직 믿음의 의로 된 것이라고 다시 한번 못박고 있다. 율법에 속한 자이든, 속하지 않는 자이든지 간에 의로울 수 있는 조건은 바로 ‘믿음’인 것이다. 그 실례가 바로 아브라함이다. 

 

 



  갈 3:16에 따르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한 후사는 바로 그리스도이다. 그러나 여기서 아브라함의 ‘씨’는 곧 아브라함의 후손, 유대인과 이방인을 포함하여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자들을 가리키는 집합 명사가 사용되었다. 이처럼 의는 하나님의 약속, 곧 언약의 최절정인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과 관련되어 있을 뿐,  후대에 주어진 율법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주신 언약을 믿어서 의로워졌다. 율법은 언약 이후 430년 이후에 모세를 통해 주어졌기 때문에, 율법도 할례와 같이 하나님의 의를 받는데 조건이 될 수 없음을 밝힌다. 

 

 

 


  아브라함만 그런 것이 아니라 아브라함의 영적 후손인 우리도 마찬가지라고 바울은 이야기한다. 23-25절의 이야기이다. 아브라함이 모든 시대의 믿는 자들의 패러다임임을 보여준다는 것을 강조한다. 아브라함의 믿음의 내용은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약속으로 남아 있었던 것에 비해, 우리의 믿음의 내용은 이미 역사 안에서 성취된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이다. 

 


25절 예수는 우리가 범죄한 것 때문에 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시기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 


  바울이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분리시켜 전자는 우리의 속죄를 위한 사건이고, 후자는 우리의 의를 위한 사건으로 여긴다고 보면 안 된다. 바울에게 양자는 분리된 사건이 아니라 단일 사건이다. 속죄와 의가 분리될 수 없는 것처럼,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은 동일하게 우리의 속죄와 의, 곧 우리의 구원을 위한 사건이다.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이 바로 우리를 위한 구원의 사건임을 믿는 자는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누구든지 아브라함처럼 하나님에게서 의로운 자로 인정받는다. 



여기에서 흥미로운 사실은 예수님의 죽음보다 예수님의 부활이 칭의의 기초로 제시되어 있다는 점이다. 이것은 의로 인정된 아브라함의 믿음이 죽은 자를 살리시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라는 사실과 연관되어 있다. 



  만일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주시지 않았다면 아브라함의 믿음은 헛것이 된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살리지시 않았다면, 그리스도인의 믿음은 헛된 것이 되고야 만다. 부활이 없었다면 그리스도의 죽음은 새 창조(새 시대의 도래)를 가져올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부활이란 아브라함 안에서 역사하셨던 하나님의 생명의 능력이 이제 그리스도인 안에서도 역사하고 또한 마지막에는 그들에게 부활 생명을 주실 것을 증명하는 사건이다. 

 


  이 이삭을 탄생한 아브라함의 사건은 후에 아브라함이 이삭을 모리아산에서 번제물로 바치고자 하는 사건에서 아브라함의 부활의 신앙을 엿볼 수 있다. 불가능을 가능으로 바꾸시는 하나님을 신뢰했기에, 모리아 산 제단에다 자기 아들을 묶고 칼을 뽑아 들 수 있었던 것이다. 자신의 모든 것을 올인해서 받은 믿음이기에 자신의 모든 것이 하나님으로부터 왔음을 알았고, 독자 이삭 또한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임을 앎으로 그렇게 처신할 수 있었던 것이다. 

 

 

 


 로마서 1:18-4:25의 핵심 메시지는 이것이다

 

아담 안에서 모든 인간은 죄의 노예로 전락하여 하나님께 죄를 범했다. 이방인은 창조주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고 우상 숭배를 했고, 유대인은 하나님이 주신 율법에 불순종했다. 그러나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언약에 신실하심을 나타내셨다. 구약의 많은 약속대로, 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하여 세상의 죄를 처리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누구든지 죄용서함을 받고 하나님의 언약 백성이 된다. 아브라함은 구속사의 초두에 할례와 율법과는 상관없이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은 자로서 모든 믿는 자들의 조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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