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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시편

시편 100편 1-5절, 여호와가 우리 하나님

by Message.K 2022. 2.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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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포스팅은 시편 100편 1-5절을 가지고 "여호와가 우리 하나님"이란 주제로 한 설교입니다.



  

 

예배와 신학 측면에서 시편 100편은 하나의 준비찬송이다. 이 시편의 주제는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는 인간의 모습인데, 예배의 처음이자 근본적인 행위이다. 이러한 예배행위를 찬송으로 표현하는 것이 이 시편의 신학적 의도이다. 이 시편 100편은 예배를 시작하며 동시에 예배의 신학을 제시한다.

 

  1-4절까지는 명령형 찬송의 형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부를찌어다, -나아갈찌어다, -알찌어다, -송축할찌어다.

 

1-4절은 찬양으로의 부름을 담고 있다.

 

 그리고 5절은 이 찬양의 내용과 근거를 말한다. 이 시편의 초점을 찬양의 이유에서 찬양에로의 부름으로 옮기는 역할을 하고 있다.

 

 

  시인은 여호와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에 있어 우리의 감정상태를 이야기하기를 1절-즐거이, 2절-기쁨으로 라고 말하고 있다. 시인은 이스라엘을 향하여 찬양과 예배로 초대하고 있다. 부를찌어다, 나아갈찌어다...

그리고, 강하게 확증하는 사실이 있다.

 

바로 ‘여호와가 우리 하나님이신 너희는 알찌어다’고 말한다.

 

  이스라엘 시대는 ‘하나님이 존재하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누가 진짜 하나님이냐?’가 질문의 핵심이었다. 인간은 본질적으로 다신론적인 경향이 있다. 여러 가지 문화적인 차이가 있지만 고대 이스라엘 근동 지방의 모든 국가들은 다신론적인 색채가 강했고 이스라엘은 언제나 그러한 이방 우상문화에 영향을 받을 수 밖에 없었다. 시인은 이러한 시대적인, 세대적인 징후를 알기에 그들이 진정으로 섬겨야 할 참 하나님은 바로 ‘여호와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너희가 알찌어다! 라고 선포한다. 시인은 수많은 세상의 신들 가운데 참 신이신 하나님을 선택하여 그 분을 예배하는 것을 선택하라고 명령한다. 고대 근동의 수많은 이방 신들은 수호신들이었다. 수호신을 섬기는 사람들은 신에게 자신의 안전과 평안과 승리를 바라는 마음으로 수 많은 제물과 헌신을 강요하고 강조했다. 여호와 하나님은 그러한 수많은 수호신들과는 대별되고 차별되는 신이심을 3절에서 강조하고 있다.

 

 

(3)여호와가 우리 하나님이신 줄 너희는 알지어다

 

 

그는 우리를 지으신 자시오...하나님은 우리를 창조하신 분이심을 이야기하고 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작품이란 말이다. 수많은 진화론과 수많은 고대의 우주생성론에 대한 이야기가 오가고 있지만 여호와 하나님은 창조주이심을 밝히고 있다.

 

 

우리는 그의 것이니...창조하신 자가 계시기에 그의 피조물들은 그의 것이다. 그 소속을 뿌리칠래야 뿌리칠 수 없는 것이 우리가 그 소속을 거부하게 되면 우리의 우리됨이 없어지는 것이다. 하나님의 것이라는 것은 우리의 정체성을 말해주는 것이다. 고대 근동 지방의 신들은 신과 그의 백성들은 별개의 문제였다. 신은 신대로, 백성은 백성대로 따로 논다. 오히려 백성들이 신에게 자신들을 그의 소속으로 만들어달라고 외칠 지경이다. 하지만 기독교는 그 반대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선포하신다. ‘너는 내 것이라’

 

 

그의 백성이요...이 백성이라는 말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집트를 빠져나오면서 이전의 주권도 없고, 나라도 없이 바로의 지배하에 있던 바로의 백성이었다는 것을 상기시켜준다. 그 때는 바로의 백성이었기에 바로를 섬겼지만 이제는 하나님의 백성이기에 그들의 주인이신, 그들의 왕이신 하나님을 주인으로 섬기는 그의 백성이 된 것이다.

 

 

그의 기르시는 양이로다...이전까지는 다소 권력지향적인 면이 많다. 창조주이시고, 너는 내 것이고, 너는 나를 섬기는 백성이라는 문구가 말이다. 그러나, 다른 이방신들과 가장 특별하게 다른 점은 바로 이스라엘은 ‘그의 기르시는 양’이라는 사실이다. 목자가 양을 기르는 것은 ‘목양적인 관점’에서 나오는 것이다. 우리는 팔레스타인의 환경에 익숙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 느낌이 바로 오진 않는다. 하지만 이스라엘에게 목자와 양의 관계는 특별하고도 친밀한 관계성을 띤다는 것은 신약성경 요한복음 10장에 잘 드러나 있다. 하나님은 우리를 그의 부리는 노예나 종이나 하인으로 취급하지 않으신다. 그 분은 우리의 목자이시고, 우리는 그의 양인 것이다. 끊임없이 돌보지 않으면 언제 한 눈을 팔아 딴 짓을 할지 모르는 순하디 순한 양! 바로 이스라엘이 그러한 것이다.

 

 

  시인은 이러한 사실을 우리가 알찌어다 고 말한다. 우리가 찬양을 하고 예배를 할 때에는 이러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있어야 함을 말해준다. ‘야다’라는 말은 경험적, 체험적인 지식을 말한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나오는 관계적인 경험적 지식, 관계를 계속적으로 알아가야 한다고 말한다.

 

 

 

  시인은 1절의 ‘즐거이’, 2절의 ‘기쁨으로’, 그리고 4절에 와서 ‘감사함으로, 찬송함으로’전에 들어가길 원한다. 예루살렘에는 두 개의 건물이 나란히 서 있었다. 하나는 이스라엘의 왕의 궁전이고, 또 하나는 거룩한 왕의 궁정이다. 이스라엘은 역사 동안 진정한 질문은 종종 ‘누가 진짜 왕인가?’하는 것이었다. 시인은 여기서 진정한 왕이신 여호와 하나님, 그 여호와 하나님의 궁(성전)의 문에 들어가면서, 궁정에 들어가면서 찬양하기를 명령하고 있다. 이스라엘의 왕궁에 들어갈 때도 분명 화려하고도 성대한 세러모니가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세상의 왕과는 대별되는 유일하신 여호와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리에 나아갈 때는 ‘기쁨’으로 나아가는 것이 예배자의 자세임을 보여주고 있다. 이것은 우리의 배후에 든든한 백이 바로 하나님이신 것을 늘 기억하며 주지하는 예배자에게는 그 유일한 반석과 피난처이신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이 ‘즐거움’일 수밖에 없고, ‘기쁨’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시인은 마지막으로 이런 찬양의 이유를 간략하게 적고 있다.

 

(5)대저 여호와는 선하시니 그 인자하심이 영원하고 그 성실하심이 대대에 미치리로다

 

  인간은 그들이 인생에서 겪는 경험에 대해 그것이 ‘좋다, 나쁘다’ 라는 평가의 표현을 한다. 하지만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모든 부분에서 행위와 말씀을 통해 절대적인 의미의 선으로 나타나셨다

.

(시 34:8)너희는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지어다 그에게 피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우리는 좋다/ 나쁘다로 우리의 모든 것을 우리 나름대로 평가하면서 살아간다. 그것은 상대적이다. 내겐 좋아도 다른 이에게 나쁠 수 있다. 하지만 하나님의 선하심은 상대적인 선함이 아니라 절대적인 선함을 말하는 것이다. 시인은 시편 전체에서 나타나는 ‘인자하심과 성실하심’(헤세드와 헤므나)을 이스라엘에게 보여주신 하나님의 대표적인 성품이 영원토록 계속될 것임을 찬양시를 통해 표현하고 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시 100편을 통해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지를 알 수 있고, 왜 그 하나님께 찬양을 드려야 하는지를 제대로 알고서 예배드리라는 메시지를 우리에게 던지고 있다. 이 메시지를 따라 우리들도 ‘여호와가 우리 하나님’이심을 제대로 알고 그를 영원토록 예배하며 주의 인자와 신실이 떠나지 않는 귀하고 복된 인생 되었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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