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C선교단체의 창시자인 C.T.스터드의 생애에 대해 짤막하게 포스팅하고자 합니다.
‘내 삶을 취하시어 감춘 당신을 드러내는 십자군이 되게 하소서’
영국소식 / 세계선교를 위한 헌신과 희생 - C.T. 스터드
“복음화되지 않은 세계를 위해 나의 목숨을 포기하겠습니다.”
‘케임브리지 7인’ 중 한 명인 C T 스터드(1860∼1931)는 부와 명예를 버리고 전 생애를 중국 미국 인도 중앙아프리카 등 세계선교운동에 바쳤다. 미국의 대학생선교자원운동(SVM)에 깊은 영향을 미친 그는 복음주의선교단체 WEC(Worldwide Evangelization Crusade)의 전신인 HAM(Heart of Africa Mission)을
설립한 선교동원가이자 현장선교사였다. 이는 오직 ‘내 삶을 취하시어 감춘 당신을 드러내는 십자군이 되게 하소서’란 이유 한 가지 뿐이었다.
스터드는 먼저 중국선교의 사명을 깊이 인식했다. 중국내지선교회(CIM) 대표였던 허드슨 테일러를 만난 뒤 CIM 협력회원이 됐다. 이어 그는 1885년 2월 소위 케임브리지 7인이라고 불리는 스탠리 P 스미스,M 비우챔프, 윌리엄 W 캐슬스,딕슨 E 호스트,아서 T 폴힐터너,세실 H 폴힐터너 등 동료 선교사들과 함께 중국으로 떠났다. 그러나 이는 순교를 각오해야 하는 고난의 시간이었다.
그는 매일 새벽 2시면 어김없이 일어나 촛불을 밝히고 성경을 읽었다.
4시면 선교여행길에 나섰다. 한곳에 머물러 있어야 할 경우 아침식사 후 중국어로 기도하고 점심식사 전까지 복음서를 3∼4시간씩 읽었다. 협소한 잠자리나 바로 옆이 돼지우리인 헛간 같은 방, 벌레들이 득실거리는 불결한 여인숙도 불평 대상이 되지 못했다.
그는 구세군 선교사인 프리실라 리빙스턴 스튜어트와 결혼한 뒤 아편중독자 요양소 사역에 힘썼다. 7년 동안 요양소에서 약 800명이 치료를 받고 그리스도를 영접했다. 그러나 예배당과 그의 집은 파괴되곤 했다. 심지어 생명의 위협도 받았다. 10년의 사역을 끝낸 뒤 영국으로 돌아왔지만 쉬지 않고 강연과 집회에 열중했다. 심한 과로와 영양부족에 시달렸다. 그러나 그에게 휴가란 임지의 변경을 의미할 뿐이었다. 이어 그는 D L 무디 초청으로 미국에서 18개월간 머무르면서 대학생들을 중심으로 집회를 쉴 틈 없이 인도했다.
허버트 케인은
“수천 명의 학생들이 그의 집회에 모여들었는데 때로는 하루에 6차례나 집회를 가졌다. 그리고 이러한 부흥회를 통해 수백 명의 학생들이 해외선교사로 자원했다”
고 당시를 술회했다.
1900년에 이르러 스터드는 사역지를 인도로 옮겼다. 심한 천식을 앓았지만 인도 북부 우타카문드 유니언교회에서 목회했다. 그러던 중 리버풀에서 그는 ‘식인종은 선교사를 원한다’는 벽보를 보고 아프리카로 떠났다. 1931년 7월 콩고 이밤비에서 숨을 거두기까지 ‘자기 부인’의 삶을 살았다. 진흙바닥에 대나무와 풀로 만든 초라한 오두막에서 거하면서
빛바랜 몇 장의 카키색 담요와 천막용 천으로 만든 베개가 그의 침구였다. ‘질병박물관’이라고 표현할 만큼 많은 병에 허덕였지만 그의 선교 열정에는 아무런 장애도 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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