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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소선지서

하박국 2장 1-4절,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by Message.K 2022. 2. 27.

*.하박국 2장 1-4절의 본문을 가지고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라>란 주제로 설교한 포스팅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들은 기다리는 것을 좋아하는가? 커피 한잔 주문해놓고 커피전문점에 앉아서 기다리는 시간이 마냥 즐거운가? 식사시간이 다가와 식당에 갔는데 오늘 따라 사람도 엄청나게 많다. 배가죽은 등가죽에 달라붙으려고 하는데 식사는 나오지 않아서 애를 태운 적이 없는가? 제 이야기입니다.

  약속시간이 벌써 지났는데도 약속한 사람은 나타나지 않고 연락을 해도 연락이 되지 않는 상황에서 기다리는 것은 쉬울까? 또 약속시간은 지났는데 오지 않아 전화하면 오고 있다고, 다 와 간다고, 5분만 기다리라고 그래서 5분 이상을 기다렸더니 10분이 되어도, 20분이 되어도 오지 않을 때 여러분은 과연 더 기다릴 힘과 여유가 있을까?

 

 

 

  믿음은 기다림이다

  온다고 해 놓고선 오지 않을 때 더디 올 때 그 마음은 참으로 답답할 것이다. 오늘 하박국의 이런 기다림의 장면이 나타나고 있다. 하나님의 응답과 대답을 기다리는 하박국의 절실한 심경이 여기서 배어난다. 이스라엘 민족은 지금 심각한 위기의 상황에 봉착해 있다. 내적으로는 심각한 혼란과 불법이 판을 치고, 외적으로는 바벨론의 침략의 전운이 감도는 상황 가운데 하박국은 속이 타는 것이다.

 

내가 내 파수하는 곳에 서며 성루에 서리라 그가 내게 무엇이라 말씀하실는지 기다리고 바라보며 나의 질문에 대하여 어떻게 대답하실는지 보리라 하였더니

 

 기다림이 얼마나 절박했으면 성루/ 망을 보는 곳! 에 올라가서 기다리고 있는 것인가? 성루는 파수꾼이 적들이 침입하는지 안 하는지 동태를 살필 수 있는 최적의, 최고의 시야를 확보할 수 있는 장소이다. 그 곳에서 하박국이 서 있다. 이 시청각적인 그림을 한 번 보라!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지만 인간이 취할 수 있는, 가장 관찰하기 좋은 장소에 올라가서 하나님의 응답을 기다리고 있는 선지자의 모습이 너무나 놀랍지 않은가! 하박국이 얼마나 간절했길래 그랬단 말인가? 하박국은 지금 하나님의 응답하심이, 하나님의 대답이 간절한 것이다. 갈급한 것이다.

  하박국의 기다림은 하박국의 믿음에 대한 것이기도 하다(합 2:1, 3). 믿음은 기다림이다. 기다림의 내용은 악한 자의 멸망과 의로운 자의 승리에 대한 것이다. 하나님의 백성들을 맘껏 유린하고 짓밟는 패악 무도한 바벨론! 언제 이 고난의 마침표가 찍혀질지 참으로 한 숨조차 제대로 쉴 수 없을 만큼 답답한 고난의 시간들...그래서,  하박국은 급했다. 속이 타고 애가 탔다. 1절

 

 

 

 

내가 내 파수하는 곳에 서며 성루에 서리라

  오죽 답답하면 성루에 서서 이러고 있을까? 상황과 현실에 대해 하박국은 지금 애타하는 심정으로 하나님의 대답, 하나님의 응답을 기다리고 있는 상황이다. 하지만 1장에서도 보았듯이 하나님은 시종일관 침묵하시면서 의도적이든, 의도적이지 않든 간에 줄곧 "기다려라!" - 이것이 하나님의 대답이었다. 믿음은 기다림이다.

  마치 화장실이 급한데 아무리 화장실 문을 노크해도 조금만 기다려라고 하면서 염치없이 자기 볼일만 보고 있는 손님처럼 하나님의 모습이 그렇게 하박국의 눈에는 비쳐질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박국에게 있어, 하나님의 역사와 세계는 하박국의 시간표에 따라 움직이지 않았다. 하박국이 급하다고 하나님까지 급한 것은 아니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때론 다급하고 긴급한 문제로 인해 허둥대지만 하나님은 여러분의 리듬과 생각을 따라가지 않을 수 있다. 하나님의 우선순위는 오히려 딴 곳에 있을 수 있음을 염두해두라. 라디오가 나오는 주파수대에 주파수를 맞추어야 라디오가 나오듯이 우리의 주파수를 하나님의 주파수에 맞추어야 문제가 해결될 줄 믿는다. 하나님을 여러분에게 맞추지 말고 여러분의 주파수를 하나님께 맞추길 바란다.

하나님은 이제까지, 지금부터 영원토록 여러분을 지켜보신다.

  

"하나님은 말씀하신다. 그 모든 일이 일어나는 시간을 내가 지정해 두었다. 그러나 그 시간은 즉각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하박국은, 우리 모두도 마찬가지로 '그 시대들 사이에서' 살아야 한다. 약속과 성취 사이 말이다."

 

두 눈을 부릅뜨고 기다려야 한다.

 

 

  미국에 유학을 다녀오신 분의 이야기이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남들이 1년 해야 할 공부나 과제나 기타 모든 것을 6개월이나 8개월 만에 끝냈다고 자랑합니다. 하지만 1년에 해야 할 일은 1년에 해야 합니다. 한 달 정도 빠를 수 있어도 그렇게 빨리 끝내니까 부실해지고, 삼풍백화점이 무너지고, 성수대교가 무너지는 거예요."

 

  맞는 말이다. 우리나라는 무엇이든지 '빨리 빨리'이다. 운전할 때도 드러나는 '빨리 빨리'! 평상시에도 힘든데, 고난의 시기에 고난이 지나가기를 기다리는 것은 '빨리 빨리'의 국민성과 습성 때문에 더더욱 쉬운 일이 아니다.

 

  제자들은 행 1:6에서 '주님,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때입니까?'라고 했다. 제자들은 그릇된 하나님 나라의 이해와 조급함이 엿보인다. 제자들은 하나님 나라를 민족주의적 국가로 축소하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 하나님보다 앞서서 하나님의 때를 하루라도 앞당기려고 재촉한다. 예수님 왈, "때와 시기는 아버지께서 아버지의 권한으로 정하신 것이니, 너희가 알 바 아니다"(행 1:7).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을 가르치려고 하는 제자들이 우리의 모습은 아닌가? 우리의 조급함을 내려놓자. 심리학자 칼 융(Karl Jung)은 “조급함은 마귀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라, 그 자체가 마귀다”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며 우리의 시간표를 하나님 앞에 내려놓자. 조급함도!

 그러할 때,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의 방법으로 하나님의 사람을 통해 하나님의 일을 하실 것이다. 그러기에 우리에게는 다소간의 기다림이 필요하다.

 

2:3 이 묵시는 정한 때가 있나니 그 종말이 속히 이르겠고 결코 거짓되지 아니하리라 비록 더딜지라도 기다리라 지체되지 않고 반드시 응하리라

  

  하박국은 하나님이 어떻게 처리하실지, 잠도 자지 않고 불침번 서듯 예의주시하고 있다. "하박국은 하나님이 어떤 언약을 수행하실지 그리고 바벨론의 야만적 폭력, 특별히 당신의 백성에게 가해진 폭력에 대해서 (어떻게) 심판하시는지를 주목하고 있다. 그는 하나님을 주시하고 있고, 기다리고 있다."

 

 

 

 

  기다린다는 점에서 하나님 편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우리는 기다리고 있다. 하나님도 기다리고 계신다."

  우리만 하나님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다. 누가복음은 기다리는 사람들 이야기로 가득 차 있다. 신약성경의 경우 집을 나간 탕자의 비유에서 그 이야기의 제목은 탕자의 비유가 아니라 '기다리는 아버지'라고 해야 한다고 한다. 집 나간 탕자가 주제가 아니라 한 없이 기다리는 아버지가 주인공이다.

  파수꾼의 상상력으로 그냥 가만히 기다리는 그것이 하나님을 돕는 일이고, 고난을 속히 통과하는 길이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반드시 어떤 승리의 조짐이나 원수들에 대한 심판의 전조는 전혀 없다. 오로지 기다림이 헛되지 않다는 약속뿐이다.

 

2:3 이 묵시는 정한 때가 있나니 그 종말이 속히 이르겠고 결코 거짓되지 아니하리라 비록 더딜지라도 기다리라 지체되지 않고 반드시 응하리라
(새번역) 이 묵시는 정한 때가 되어야 이루어진다. 끝이 곧 온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이것은 공연한 말이 아니니, 비록 더디더라도 그 때를 기다려라! 반드시 오고야 만다. 늦어지지 않을 것이다

.

 

  모든 것이 때가 있는 법, 그리고 모든 것이 다 지나가는 법, 서두를수록, 재촉할수록 우리 마음의 시간은 더디 간다. 우리가 먼저 하나님의 뜻을 기다릴 수 있는 믿음가가 되었음 한다.

 

"믿음은 잘 기다리는 것입니다. 믿음은 기다리는 것입니다"

 

 

 

 

  믿음은 말씀을 붙잡는 것이다

  교통사고로 인한 화재로 인해 전신화상 3도 화상을 입은 이지선씨의 인터뷰 기사에는 '어떤 말을 들을 때 가장 마음이 아프냐?'라는 질문에

'나 같으면 못 살았을 거다. 자살했을 것 같다.
그런데 당신은 살아서 참 대단하다라는 식의 말이다.'

 

 이지선씨와는 달랐겠지만 고통가운데서도 선지자 하박국은 하나님의 대답을 기다렸다. 그 대답은 2절-3절이었다.

 

여호와께서 내게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는 이 묵시를 기록하여 판에 명백히 새기되 달려가면서도 읽을 수 있게 하라 이 묵시는 정한 때가 있나니 그 종말이 속히 이르겠고 결코 거짓되지 아니하리라 비록 더딜지라도 기다리라 지체되지 않고 반드시 응하리라

 

  하나님은 하박국에게 새로운 묵시, 비전을 보여주셨다. 그것은 반드시 이뤄질 것임을 약속하시고 계신다.

 

시 105:19, 우리말 성경: 여호와의 말씀이 이루어질 때까지 말씀이 그를 연단했다
  곧 여호와의 말씀이 응할 때까지라 그의 말씀이 그를 단련하였도다(개역개정)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우리가 고난 가운데 있을 때 무엇을 붙잡아야 느냐? 바로 묵시, 즉 말씀이다.

 

너는 이 묵시를 기록하여 판에 명백히 새기되 달려가면서도 읽을 수 있게 하라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부여잡아야 한다. 믿음은 기다림이라고 했다. 우리가 기다릴때 바로 그 말씀을 붙잡고 기다려야 하는 것이다. 말씀의 위로가 없다면 우리가 어떻게 고난을 이겨낼 수 있단 말인가?

 그러나, 작가 이지선, "제가 사는 이유는 지금 숨 쉬고 있기 때문이예요" 하나님께서 주신 생명에 대한 감사와 만족으로 대변되는 이지선 자매의 발언이다.

 

 

 2011년 1월 22일에 죽은 소설가 故 박완서, 그가 생전에 자신보다 먼저 죽은 아들, 그 아들을 잃은 슬픔과 상실로 인해 일기에다 통곡의 언어로, 눈물의 언어로 도배를 한 것을 본 적이 있을 것이다. 자식에 대한 연민과 자신의 부덕함과 지지리 복도 없는 자신에 대한 한탄이 끊이지 않는다. 아들을 무참히 데려간 하나님에 대한 분노와 포악이 가슴 가득했다. 통곡 속에서 하나님께 구하였던 것은 단 '한 말씀'이었다고 한다.

 

"주님, 당신은 과연 계신지, 계시다면 내 아들은 왜 죽어야 했는지, 내가 이렇게까지 고통받아야 하는 건 도대체 무슨 영문인지,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한 말씀만 해보라고 애걸하리라."

 

  끝내 하나님은 침묵하셨다고 한다. 이해인 수녀의 권유로 들어간 수녀원에서 한 수녀를 통해 실낱같은 구원의 실마리를 얻는다. 수녀님은 평생 동생과 퍽 사이가 나빴는데 '왜 내 동생이 저럴까?'에서 '왜 내 동생이라고 저러면 안 되나?'로 생각을 바꾸니 관계가 호전되더라는 것이다. '하필 내 아들인가'에서 '하필 내 아들은 왜 안되는가'로 마음을 고쳐먹었다고 한다.

 

시 119:50 이 말씀은 나의 고난 중의 위로라 주의 말씀이 나를 살리셨기 때문이니이다

  

 우리가 고난 중에 부여잡아야 할 것은 바로 묵시, 비전, 바로 말씀이다. 하나님은 2절에 묵시를 기록하라! 판에 명백히 새기라! 달려가면서도 읽을 수 있게 하라! 말씀하신다. 왜? 주의 말씀이 나를 살릴 것이기 때문이다.

  윤동주는 늘 자기가 좋아하는 시는 달달달 외웠다고 한다. 달달달 시를 외우니깐 그렇게 좋은 '서시'가 탄생할 수 있었던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 묵시의 말씀을 우리의 마음판에 새길 때 우리의 고난도 아침 안개처럼 쉽게 지나갈 줄 믿는다.

이 말씀을 기억하라!

이 말씀은 나의 고난 중의 위로라 주의 말씀이 나를 살리셨기 때문이니이다

  우리가 치열한 고난 가운데 고군분투하며 살아갈 때 하나님께서 주신 그 생명의 말씀과 약속이 우리를 영원한 천국으로 인도하며 우리의 인생을 물 댄동산, 기름진 영적 오아시스로 인도할 지 어찌 알겠는가? '주의 말씀이 나를 살리셨기 때문'이다!

 

"믿음은 말씀을 붙잡는 것입니다. 믿음은 말씀을 마음판에 새기는 것입니다"

 

 

 

 

  믿음은 인내이다

  믿음은 기다림이다. 믿음은 말씀을 붙잡는 것이다. 더 나아가서 믿음은 '인내'를 포함한다. 인내하는 것이 바로 믿음이다!

 

...비록 더딜지라도 기다리라 지체되지 않고 반드시 응하리라 보라 그의 마음은 교만하며 그 속에서 정직하지 못하나 의인은 그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여기서의 믿음은 의인이 부여잡은 그 무엇을 말하는데 그것은 바로 기다리고, 말씀으로 부여잡고, 인내했던 그 결과물을 말한다. 그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산다!

  하박국이 사용한 믿음이란 단어는 '신실함'이다. 어떤 상황에서도 변개치 않는 견고함이다.

 

 히 10:36 너희에게 인내가 필요함은 너희가 하나님의 뜻을 행한 후에 약속하신 것을 받기 위함이라

 

 

그런 다음 하박국을 인용합니다.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또한 뒤로 물러가면 내 마음이 그를 기뻐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믿음은 뒤로 물러나지 않고 소망으로 인내합니다. 70인역은 이 구절을 "만일에 그가 뒤로 물러가면 내 혼이 그 속에서 기뻐하지 아니하리라"고 했다. 하박국이 믿음을 신실함으로 이해했다면, 히브리서는 신실함의 요체를 인내로 풀이하고 있다. 지금 하박국에서 믿음의 기본이란 다름 아닌 인내라는 것을 가르치고 계신다.

 

 

   고난은 반드시 지나간다. 하나님의 의가 승리한다. 그것이 하나님의 계시이고, 우리의 비전이다. 악인의 형통과 의인의 고난, 그리고 악인의 종말과 의인의 승리 사이에서 하나님의 정한 때를 기다리고, 약속을 신뢰하고, 그 날이 오기까지 인내한다. 그것이 믿음이다.

 

"그것은 하나님에게서 난 사람은 다 세상을 이기기 때문입니다. 세상을 이긴 승리는 이것이니, 곧 우리의 믿음입니다."(요일 5:4)

 

의인은 믿음으로 고난을 이긴다.

 

 

 

  저는 인내를 생각할 때마다 최근에 접한 윌리암 윌버포스의 생애를 이야기하지 않을 수가 없다.

  윌리엄 윌버포스는 21세에 정계에 진출한 이래 74세까지(53년 동안!) 한 번도 낙선하지 않은 정치인이었다. '정치를 위해 태어난 인물'이라고 해도 좋을만한 대영제국의 심부름꾼이었다. 하지만 그는 아프리카 노예무역과 노역제도라는 엄청난 장애물에 대항했다.

 

  그는 1787년 10월 28일 일기에 이렇게 적었다고 한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내 앞에 두 가지 위대한 목적을 주셨다. 그것은 노예무역을 금지하고, 도덕적 개혁을 이루는 것이다."

  그는 그리스도인, 그리스도인 정치인으로서 이 목적을 위해 46년 동안 이 투쟁에 소진했다(1787년-1833년). 한 번도 낙선을 경험하지 않은 그가 노예제도 폐지운동에서 1807년에 법안이 통과되기까지 열 한번이나 패배를 맛보아야 했다.

또 법안이 통과되었지만 그 법안이 온전히 시행되기까지 많은 시행착오가 있었다.

그러나 그는 46년 동안 이 목적(노예무역금지, 도덕적 개혁)에 온전히 헌신했다.

그의 대적들은 "윌버포스는 때려눕힐 때마다 다시 뛰어 오른다."고 했다.

 

그리고 노예제도 자체에 대하여 결국 1833년, 그가 죽기 3일 전에야 결정적인 승리를 보게 되었다고 한다.

 

 

  믿음은 인내입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고 바라시고 성경적 원리에 입각해 옳다고 배운 것에 확신하며 그것을 위해 헌신하는 것, 참는 것, 바라는 것이 바로 믿음이다.

 

 

  인내는 고통 속에서 자라고, 소망 속에서 자란다. 인내를 뜻하는 영어 patience는 '고통받다'는 뜻을 가진 단어에서 왔다고 헨리 나우엔은 이야기한다. 그리스도처럼 고통 속에서 소망을 간직하고 인내를 배움으로 상 받는 자가 되는 것, 그것이 인내의 중요한 가치이며 고난이 가져다주는 뜻밖의 선물중 하나이다.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는 것, 비전의 말씀을 붙잡는 것, 소망으로 인내하는 것, 그것이 바로 믿음이다.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느니라"(히 11:38). 믿음이 세상을 이긴다. 기다림과 말씀과 인내하는 믿음이 고난을 이긴다. 오직 믿음만이.

 

 

  특별히 하박국 전체 내용을 요약해주는 구절은 2장 4절, "의인은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이다. 이 구절은 가히 구약성경 전부를 집약한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바울의 복음은 단 하나의 단어로 압축하면 믿음이다. 구약에 기반한 유대교라고 예외가 아니다. 탈무드의 한 구절이다.

 

"모세는 이스라엘에게 613개의 계명을 주었다. 다윗은 그것을 11개(시 15편)로 줄였고, 미가는 3개(미 6:8), 이사야는 두 개(사 56:1)로 줄였다1). 그러나, 하박국은 단 하나로 요약하였다. '의인은 믿음으로 살 것이다.'"

 

 

   믿음은 기다리는 것입니다.

   믿음은 말씀을 붙잡는 것입니다.

   믿음은 인내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믿음의 선물로 승리하는 우리 교회 모든 동역자들 되시길 주의 이름으로 축복한다.

 

 

 

1 ) 시편 15편

여호와여 주의 장막에 머무를 자 누구오며 주의 성산에 사는 자 누구오니이까

정직하게 행하며 공의를 실천하며 그의 마음에 진실을 말하며

그의 혀로 남을 허물하지 아니하고 그의 이웃에게 악을 행하지 아니하며 그의 이웃을 비방하지 아니하며

그의 눈은 망령된 자를 멸시하며 여호와를 두려워하는 자들을 존대하며 그의 마음에 서원한 것은 해로울지라도 변하지 아니하며

이자를 받으려고 돈을 꾸어 주지 아니하며 뇌물을 받고 무죄한 자를 해하지 아니하는 자이니 이런 일을 행하는 자는 영원히 흔들리지 아니하리이다

 

미가 6:8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은 오직 정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

 

 

 

*.  믿음은 성서의 핵심이며 역사변혁의 능력이다. 중세 천년의 질서가 송두리째 흔들렸다. 바닥부터 무너져 내렸다. 한 수도사가 믿음을 재발견하고 재정의했다. 바로 마르틴 루터이다. 그는 어떻게 해야 은혜로우신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지를 물었다. 그에 대한 대답은, 믿음이란 '인간의 의'가 아닌 '하나님의 의'라는 것이다. 예전에는 인간의 행위를 공로로 여긴 나머지 구원의 조건으로서의 숱한 고행과 공적을 쌓으려고 몸부림쳤는데, 십자가로 구원의 전제조건을 하나님 스스로 충족시켰다는 것을 알게 되니 구원이 은혜요 선물임을 깨닫게 된다. 이것이 루터에게 한없는 실존적인 위로를 주었고, 사회적으로는 기독교의 개혁과 근대로의 전환에 결정적인 동인이 되었다.

  바울의 믿음, 침신대 이형원 교수는 바울은 아직 신자가 되지 못한 이들에게, 하박국은 이미 신자인 이들에게 믿음을 이야기하고 있다고 한다. 바울에게 믿음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지 못한 죄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신앙고백이다. 하박국의 믿음을 이형원 교수는'이미 하나님의 백성이 된 사람들이 그 신앙고백이나 지식적 이해를 넘어서서 고난과 핍박이 넘치는 매일의 삶 속에서도 변함없이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의지하고 그분을 신뢰하는 가운데 인내하는 삶을 살아가도록 권하는 믿음의 실천적 적용을 강조하는 개념이다.'

 

 

 

 

*본 포스팅은 김기현의 <하박국, 고통을 노래하다>(복있는 사람)를 참조하였음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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