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스겔 예언의 대부분: 1차 바벨론 유배가 일어난 주전 597년부터 유다가 완전히 멸망 당해 2차 바벨론 유배가 일어난 586년까지 선포된 말씀이다.
25살에 바벨론에 유배되어 5년차 되던 해, 30살에 자기 동족들이 포로수용소와 같은(언브로큰 영화처럼) 포로 수용소에서 운하건설공사에 동원되어 노동하는 그발 강가에서 에스겔은 “하늘이 열리는”이상(vision)을 경험한다(겔 1:1-2). 그가 하늘이 열리는 경험을 했던 그 그발 강가는, 유다의 바벨론 포로들이 민족의 멸망의 아픔과 상처 가운데 시온을 기억하는 노래(고라 자손의 시온 순례시)를 부르며 망국의 한을 삭였던 장소였다(시 137편 참조).
시 137:4 우리가 이방 땅에 있어서 어찌 여호와의 노래를 부를까
비통한 가운데서 울린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비전이었다.
포로난민 공동체의 영적 지도자 에스겔
답답한 포로생활의 5년차에 접어들 시기에, 서른 살 청년 에스겔이 하나님의 말씀이 그에게 임하였다. 불전차 보좌 위에 앉아계신 하나님을 목도한 것이다. 유다 왕실이 망하였다. 유다 왕의 보좌는 텅 비어 있었다. 하지만 하나님의 나라의 보좌는 아무 이상이 없음을 깨달았다!
여러분, 여러분도 마찬가지이다. 여러분의 가정환경은 열악하고 지갑에는 돈이 없고, 늘 무언가 부족하고 궁핍한 가운데 살아간다 하더라도, 하나님의 보좌는 부재중이 아님을 기억하라. 하나님의 나라의 보좌는 아무 이상이 없음을 기억하라. 유다 왕조는 지금 패망하였다. 하지만 나라가 기울어져도, 자신들은 바벨론 포로로 끌려 왔어도 하나님은 여전히 살아계신 하나님이시다.
여러분, 우리나라는 아직 건재하다. 우리나라에 IMF가 왔을 때, 정말 나라 경제가 엉망이었다. 경제위기에 태어나는 청소년들의 영적, 정서적 상황들을 지난번에 m목사님이 지적하셨는데, 정말 그 때는 우리나라가 부도가 났구나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유다는 지금 완전 경제부도가 아니라 나라가 패망하였다. 포로로 끌려와서 에스겔은 지금 12년째되던 날이다. 곧 있음 해방되겠지, 독립하겠지? 무슨 소리! 벌써 10년이 넘는 세월을 보냈다. 포로생활에 이력이 난 상태였다.
그런데, 에스겔은 하나님의 메시지를 들은 것이다.
그 메시지를 듣고 에스겔은 전쟁포로가 아니라 이젠 선지자로 거듭 태어났다. 그의 청년시기는 완전 절망적인 포로의 형국이었지만, 하나님은 그를 예언자로 세우셔서 메시지를 전하게 하신다. 그는 예루살렘에서 성전에서 완전 초토화된 유폐된 하나님이 아니라, 불전차를 타고 세계를 종횡무진하시는, 절대적으로 초월하시며 절대적으로 자유하신 하나님을 만나면서 자신의 소명을 발견하고 민족의 미래를 낙관하게 되었다.
에스겔서의 전반부 예언(1-24장)은 시드기야의 反바벨론정책을 규탄하는 데 할애된다. 주전 597-587년 사이에 예루살렘 성전에서 벌어지는 온갖 종류의 이방 종교 제의들이 판을 쳤다. 예루살렘 성전의 내부가 얼마나 가증스러운 우상숭배로 가득 차 있는지를 에스겔을 고통스럽게 목도하게 되었다. 에스겔서의 중심 주제 가운데 하나는 예루살렘 성전을 떠나는 하나님의 영광(쉐키나)과 회복된 성전(겔 40장: 시 46편)에 복귀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는 환상이다. 후반부(25-48장)는 예루살렘 성전을 떠났던 영광이 회복된 성전으로 되돌아오는 여정에 상응하는 회복과 갱신의 예언이다.
37장은 주전 586년 바벨론 군대에 의해 예루살렘 성전이 불타고 예루살렘 성이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후, 에스겔이 선포한 희망적 예언의 일부이다. 25살에 바벨론 포로로 끌려온 그가 포로생활 중에 예루살렘의 몰락 소식을 듣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겔 33:21
우리가 사로잡힌 지 열두째 해 열째 달 다섯째 날에 예루살렘에서부터 도망하여 온 자가 내게 나아와 말하기를 그 성이 함락되었다 하였는데
포로된 지 12년째 10월 5일
겔 33:22
그 도망한 자가 내게 나아오기 전날 저녁에 여호와의 손이 내게 임하여 내 입을 여시더니 다음 아침 그 사람이 내게 나아올 그 때에 내 입이 열리기로 내가 다시는 잠잠하지 아니하였노라
나라가 몰락의 길을 걷게 될 것 같은 예감을 가진 에스겔에게 도망자가 아침경에서야 도착했을 즈음에 하나님이 그의 입을 열어주신다.
죽음과 부활을 주제로 구약 예언자들을 시기별로 정리하면,
●주전 9세기: 엘리야/엘리사 시대가 하나님의 백성 공동체 가운데 자라기 시작한 암세포 징후를 발견하는 단계,
●주전 8세기: 아모스/호세아/이사야/미가 시대는 암 3.4기로, 암세포 제거 수술의 필연성을 역설하는 단계,
●주전 7세기: 예언자인 예레미야와 에스겔은 암세포수술 제거가 소용없다고 사망선고를 내리면서, 동시에 죽음너머의 부활과 회복을 예고하는 단계이다. 본문에서 에스겔은 무덤 속의 마른 뼈들처럼 말라가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회복과 부활의 메시지를 대언한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군대로 부활하는 환상, 파괴되어버린 예루살렘 성전의 회복을 예기하는 환상을 본다.
에스겔의 희망, 이스라엘의 민족 부활과 갱생
1-24장: 유다(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 예언
25-32장: 열방에 대한 심판 예언
33-48장(특히, 33-39장): 이스라엘의 영적 회복과 갱생에 관한 예언과 약속
겔 37장은 이스라엘의 영적 갱신과 민족적 부활을 예언하는 보다 큰 예언 단락의 중심이다. 본문에 따르면, 아골골짜기의 마른 뼈들을 하나님의 군대로 부활시키는데 결정적인 세 요소가 있다. 그것은
하나님의 영,
하나님의 말씀,
말씀의 대언자 이다.
오늘날의 교회 갱신과 부흥도 이 세 가지 요소가 결합된 곳에서 일어날 것이다.
절망을 초월하는 신앙
1-14절: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부활하는 마른 뼈들의 환상을 다룸,
15-28절: 새 언약 아래 유다와 이스라엘이 통일되어 사는 미래상을 제시.
37장은 예루살렘의 완전 멸망소식을 듣고 하룻밤 동안 무거운 침묵의 시간을 거친 에스겔에게 임한 계시였다.
37:1 여호와께서 권능으로 내게 임재하시고 그의 영으로 나를 데리고 가서 골짜기 가운데 두셨는데 거기 뼈가 가득하더라
하나님의 손이 내 위에 임하자 그는 나를 야웨의 영으로(강권적으로 권능을 행사해) “이끌어 내었다”라고 직역할 수 있다. “야웨의 손이 임한다”는 표현은 에스겔서의 자주 사용되는 계시수납현상을 지칭하는 관용적 표현이다. 하나님의 ‘손’은 하나님의 ‘영’이라는 말로 바꿔 사용되기도 하는데, 이와 같은 의미이다(11:1, 5). 그보다 더 자주 사용되는 표현인 ‘야웨의 말씀이 내게 임했다’라는 표현도 동일한 계시수납작용을 표현한다(12:1,17). 예언자가 야웨의 영에 잠정적으로 지배당한 상태를 의미, 이때 예언자의 평소 판단력은 다소간 중지된 상태에서 하나님의 계시가 수납된다. 야웨가 [야웨의 영을 통해], 혹은 [야웨의 영 안에서] 에스겔을 이끌어 내었다는 말은 강권적으로 에스겔을 이끌었다는 말이다.
왜 하나님은 에스겔을 강권적으로 이끄셨는가?
에스겔이 휴거되어 하늘 위에 둥둥 떠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보좌의 관점에서 역사와 인생을 해석하도록 고양된 것이다. 에스겔은 하늘로 치솟는 영적 고양과 부양만을 맛보는 것이 아니라 또한 성령의 강권적인 역사로 골짜기 아래로 이끌려 간 것이다.
아골 골짜기와 같이 낮은 곳은 사람들이, 인간이 선호하는 곳이 아니다. 사람들은 그런 비천하고 어렵고 절망적인 곳은 하나님의 영에 이끌린 사람만이 내려갈 수 있는 곳이다. 하나님의 영이 에스겔을 강권적으로 들어 올려 마른 뼈들이 나뒹구는 계곡으로 던져 넣으셨다. 이처럼 하나님의 손에 강력하게 이끌린 사람은 강력한 소명감에 사로잡힌 사람이다. 소명감에 사로잡힌 사람은 자신이 원하는 곳으로 마음대로 갈 수 있는 사람이 아니다.
내가 하고 싶다고 하고, 내가 하기 싫다고 하는 그것은 소명이 아니다. 소명은 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전도사때 찰스 스펄젼의 말이 참 좋았다. 노회 면접할때도 선배목사님들께 그 말을 인용했다. 소명이 무엇이냐? 나는 대뜸 스펄젼의 이야기를 했다.
“피할 수 있을 때까지 피해보라. 피할 수 있다면 소명이 아니다.”
그런데 그 소명이란 노래도 있지만, 소명이란 단어가 지금은 너무 무섭다.
하나님이 파송하시는 곳으로 내려가는 사람이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사람들을 광야로 몰아서 거기에서 훈련시키신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 전에 무려 40년 동안 그들을 훈련시키셨던 하나님! 그 광야길은 한달만 하면 충분히, 40일만 하면 들어갈 그 길을 무려 40년간 뺑뺑이 훈련을 시키신 하나님이시다! 다윗을 10대부터 훈련시키셨던 하나님! 요셉을 10대때부터 훈련시키셨던 하나님! 바로 이러한 원리로, 요단 강에서 세례를 받고 성령충만을 받은 나사렛 예수께서 광야로 내몰리신다.
성령이 곧 예수를 광야로 몰아내신지라(막 1:12)
여기서 ‘몰아내다’로 번역된 헬라어는 ‘에크발로’로 ‘집어던지다’에 가까운 단어이다. 하나님의 계획과 성령의 강권적인 역사에 의해 에스겔에 던져진 것이다.
예수님께서 광야로 던져지신 것이다. 왜? 자신의 소명을 이루는 첫 단추를 꿰기 위해서이다. 에스겔의 모습은 자원하는 마음으로 그가 선지자의 길을 걸어간 것이 아니라 징집당한 병사의 경험임을 다시 보여준다. 6.25사변때 우리나라의 젊은 청소년들이 남자가 없어서 학도병으로 전쟁에 투입되었다. 그들은 자원해서라기보다는 남자 성인이 없어서 결국 그들이 징집당한 경우이다. 더 강력한 강제성을 표현하자면, 일본군이 우리나라 젊은이들을 일본군으로 징집한 경우가 더 그럴 것이다.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부름받은 징집군대의 병사! 바로 그가 하나님의 사람, 에스겔이었다. 혹시나 수련회 올 때 이렇게 온 친구는 없는가? 에크발로! 내 의지와 상관없이 제주도수련회로 던져진 사람은 없는가? 주의 은혜가 임하길 원한다.
에스겔이 지나가게 된 곳은 바로 어디였는가? 마른 뼈였다. 2절을 보라.
나를 그 뼈 사방으로 지나가게 하시기로 본즉 그 골짜기 지면에 뼈가 심히 많고 아주 말랐더라
그는 아주 말라버린 많은 마른 뼈들과 마주치게 된다. 죽음의 권세를 느끼는 순간이다. 하나님께서 에스겔을 죽음의 권세 아래 시달리게 하신 후 부활을 꿈꿈꾸도록 유도하시는 것이다. 부활의 희망은 죽음의 한 복판에서 잉태되기 때문이다. 죽음의 현장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사람에게는 부활의 소망이 생성되지 않는다. 진정한 절망을 맛 본자 만이 순전한 갈망의 꽃을 피울 수 있다-김남준?
하나님은 그래서 에스겔을 마른 뼈의 현장으로 보내신다. 그러므로 우리가 어디에 사는지가 중요하다. 에스겔이 말라빠진, 생명력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마른 뼈를 체험하고 누벼보아야, 생명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뼈저리게 알 수 있지 않는가! 여러분도 금식을 일주일 정도 해보면 밥이 얼마나 중요한지, 음식을 먹을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지 알 수 있을텐데...생기가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 그것이 얼마나 절실한가를 모르는 사람에게 생명력이나 생기가 무슨 의미가 있는가!
사실, 이 마른 뼈들은 절망에 빠진 유다의 포로들이었다. 마른 뼈들이 나뒹구는 골짜기에서 에스겔은 자신이 섬기는 포로민 회중들의 영적 환경을 직면한 것이다. ‘그 뼈가 심히 많고 아주 말랐다!’
주님께서 물으신다.
3절: 그가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이 뼈들이 능히 살 수 있겠느냐 하시기로 내가 대답하되 주 여호와여 주께서 아시나이다
-하나님께서 때때로 우리에게 질문하신다. 네가 하나님의 능력을 믿느냐? 생기를 믿느냐? 특별히 대상은 ‘정말 말라빠지고 많은 마른 뼈’인데, 너는 과연 생기를 믿느냐? 살 수 있다고, 부활할 수 있다고, 회복될 수 있다고 믿느냐? 여러분은 과연 하나님의 사역을 감당하면서 생기, 복음의 능력, 회복의 능력을 믿고 있는가?
마른뼈들이 살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지고 일하고 말하는가? 아니면 그런 확신도 없이 살아가는가?
4절: 또 내게 이르시되 너는 이 모든 뼈에게 대언하여 이르기를 너희 마른 뼈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어다
왜 마른뼈들이 여호와의 말씀을 들어야 하는가?
옛날에 도올 김용옥이 인기가 있을 때 사람들이 거기 가서 앉아 이야기를 듣고 있다. 신학대도 나오고, 불교대학도 나오고, 도도 많이 닦은 그 사람의 인생철학을 듣고 있다. 그러나 거기에는 생기가 없다. 일반대 편입을 했을 때, ‘카톨릭사상’이란 교양수업을 들었다. 그런데, 그 수업에 애들이 다들 자고 주의산만하고 들어도 지겨운 수업이었다. 그런 수업시간의 강의나 명제나 테제가 사람을 살리는 것이 아니다. 예언자 자신의 사상이나 인생철학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라고 다그친다는 점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능력이 있지, 다른 그 어떤 것은 아니다.
바로 5절에 그 답이 나온다.
5절: 주 여호와께서 이 뼈들에게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내가 생기를 너희에게 들어가게 하리니 너희가 살아나리라
6절: 너희 위에 힘줄을 두고 살을 입히고 가죽으로 덮고 너희 속에 생기를 넣으리니 너희가 살아나리라 또 내가 여호와인 줄 너희가 알리라 하셨다 하라
에스겔은 지금 예루살렘은 철저히 멸망당하였고, 다윗 왕조와 성전은 파멸되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죽음이 완성되었다. 심판이 성취되었다. 현대판으로 각색해보자. 대한민국이 3차세계대전이나 북한의 침략으로 초토화되어버렸다. 주권을 잃어버렸고 나라가 미국이나 일본이나 북한에 의해 점령당하였다. 그런 가운데, 한국교회의 모든 성전들이 초토화되어 폐허가 되었고, 우리교회의 성도들인 우리들의 보금자리인 우리교회 예배당과 교육관도 완전 폐회가 되어 돌무더기가 되어버렸다. 절망적이다. 그 시간이 벌써 12년이 지나버렸다. 희망의 기운도 찾을 수 없는 거기서!
그런데 여기서 하나님께서 무엇을 말씀하시는가?
생기를 불어주시겠다고 한다. 바로 민족의 주검을 앞에 두고 부활 갱생을 위한 대언 사역에 부름 받은 것이다. 조국의 멸망소식을 들은 에스겔은 실어증환자처럼 할 말을 잃어버렸다. 하지만, 부활과 민족 회복과 갱생의 메시지는 ‘하나님의 손’에 사로잡힌 후, ‘하나님에 의해 강권적으로 벌려진 입’에서 나올 수 있었다(겔 33:22).
“(만일 네가 나의 권능을 믿는다면) 너는 이 마른 뼈들에게 설교하라.”
에스겔은 앙상한 뼈들에게 예언하도록 명령을 받았다.
4절: 또 내게 이르시되 너는 이 모든 뼈에게 대언하여 이르기를 너희 마른 뼈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어다
마른 뼈들: 무생물이 아니라 결단해야 할 인격적인 존재! 무기력하게 나뒹굴기만 하지 말고 하나님의 말씀을 의도적으로 들어야 한다. 왜? 하나님의 명령을 듣는 자만이 소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무에서 유를 만든 창조의 말씀, 말씀의 언어를 들어야 소생과 회복의 역사가 일어난다.
그런데, 왜 그들이 마른뼈인가?
에스겔이 하늘의 묵시를 경험하기 전에 제한적인 의미에서 포로난민들과 함께 목회를 했음을 볼 수 있다. 그가 포로난민 목회에서 주로 겪었던 상처는 자신의 예언에 대해서 청중들이 야유와 냉소를 보냈음을 알 수 있다. 냉소와 냉대, 실패의식과 패배의식, 무너진 조국과 비탄한 현실가운데서 스물스물 올라오는 깊은 절망감이 포로수용소의 사람들에겐 더 뿌리 깊게 내려져 있었던 것이다. 12년이 넘은 포로생활기에서 유다포로들의 바로 진정 ‘마른 뼈’인 것이다.
여러분은 자신을 <마른뼈>로 생각하는가?
여러분, 말씀을 들어야 한다. 어떤 사람들은 간증을 좋아한다. 어떤 사람들은 예화를 좋아한다. 설교 듣고 나면 예화만 남고 말씀을 아무런 흔적도 없이 지워져버린다. 마른 뼈는 말씀을 질기게 들어야 한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실 때 말씀사역으로 창조하셨기에 부흥도 말씀으로부터 오는 것이다. 죽은 자의 부활은 오로지 하나님의 말씀으로만 가능하다. 온전한 말씀을 제대로 들으면 역사가 일어난다.
EX) 선교단체 수련회때 성경 한권씩 PBS하고 저녁에 설교듣고 마칠 때 성경고사를 쳤다. 말씀의 액기스를 받아 먹을 필요가 있다.
7.이에 내가 명령을 따라 대언하니 대언할 때에 소리가 나고 움직이며 이 뼈, 저 뼈가 들어 맞아 뼈들이 서로 연결되더라
말씀, 즉 로고스가 임할 때 역사가 일어난다. 말씀이 육신이 되신 그리스도! 말씀이 임할 때 마른 뼈가 연결되는 역사가 일어났다.
8.내가 또 보니 그 뼈에 힘줄이 생기고 살이 오르며 그 위에 가죽이 덮이나 그 속에 생기는 없더라
:뼈들이 연결되고 힘줄이 생기고 살이 오르고 가죽이 덮이는 역사가 나타났다.
뼈와 힘줄과 살갗만 구비되고 생기가 없는 모습...현대 정신의 피상성을 이야기한다. 오늘날 외모지상주의, 물질만능주의는 두말하면 잔소리이다. 면접할 때도 외모가 엄청 비중을 차지하고, 몸매도 하나의 사람을 보는 기준이 되었다. 성형수술, 다이어트, 박피제거수술... 한국의 성형수술의 열기는 대박이다.
그러나, 모세가 하나님의 얼굴을 뵙고 시내산에서 내려왔을 때, ‘얼굴에 광채가 났다’고 했다. 다니엘과 세 친구가 우상제물에서 나온 고기 먹기를 포기하고, 채식만을 감행했어도 윤택한 얼굴빛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은혜이다. 속사람이 생기가 넘치면 겉사람도 당연히 윤택하기 마련이다.
하나님은 이런 에스겔에게 생기를 향하여 대언하라고 하신다. 생기야 사방에서부터 불어와 마른 뼈를 살아나게 하라고 말한다. 예언자는 하나님의 생기를 고취시키는 사람이다. 창 2:7에 하나님은 흙덩이에 불과한 아담에게 생기를 불어넣어주신다. 생기(the breath of life)를 불어넣어주신다. 창세기 2장의 창조사역을 여기서도 지속하신다. 그런데, 어디를 향해, 누구를 향해 그 생기를 불러내고 있는가?
살해당한자들에게 불고 있다. 살해당한 자들이란 바벨론 포로 경험을 통해 살해당한 이스라엘과 유다의 동포들을 가리킨다. 살해당한 자들이란 자연스럽게 죽은 사람이 아니라 역사의 재난과 전쟁으로 죽은 사람들이다. 에스겔은 바로 그런 살해당한 회중들을 향해 생기를 불러내고 있다. 어떤 의미에서 , 설교단은 사방의 생기로부터 하나님의 생기를 불러내는 작업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생기 곧 신바람, 희망의 바람을 불어오는 수레이다. 하나님의 생기, 살리는 생기, 기운, 에너지는 하나님의 능력이다.
9.또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너는 생기를 향하여 대언하라 생기에게 대언하여 이르기를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생기야 사방에서부터 와서 이 죽음을 당한 자에게 불어서 살아나게 하라 하셨다 하라
10.이에 내가 그 명령대로 대언하였더니 생기가 그들에게 들어가매 그들이 곧 살아나서 일어나 서는데 극히 큰 군대더라
심히 많은 마른 뼈가 하나님의 생기에 노출되자말자 지극히 큰 군대로 부활한다. 이스라엘을 하나님의 군대라고 지칭하는 구약책은 가나안 땅을 향한 이스라엘의 행진을 다루고 있는 민수기이다. 바벨론 포로들이 하나님의 군대로 부활했다는 말은, 불원간 또 하나의 출애굽과 또 하나의 가나안 복귀 행진이 시작될 것임을 통고하는 셈이다.
마른 뼈들이 바벨론에서 사멸되지 않고 무덤 속에서 궤멸되지 않고 다시 부활해 가나안 땅을 향해 복귀 행진을 시작할 것이다. 이 기적의 창조자는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의 말씀이시다. 생기-대언자-마른뼈
11.또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이 뼈들은 이스라엘 온 족속이라 그들이 이르기를 우리의 뼈들이 말랐고 우리의 소망이 없어졌으니 우리는 다 멸절되었다 하느니라
여러분은 너무나 오랫동안 고통이 지속되면 그 고통의 끝에 대해 회의하게 된다. 그리고 지치고 낙심하게 된다. 유다의 포로들이 그랬다. 그들은 스스로를 마른 뼈라고 칭했으며 소망이 없다고 했다. “고국으로 돌아갈 소망이 끊어졌다. 우리는 바벨론이라는 무덤 속에서 백골이 되어 죽어갈 것이다.” 우리나라도 36년동안 일제의 지배하에 있었다. 유다는 바벨론 포로 70년의 세월을 보내야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런 소망없는 마른 뼈들을 향해 에스겔을 통해서 소망의 메시지를 주시길 원하신다.
12.그러므로 너는 대언하여 그들에게 이르기를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내 백성들아 내가 너희 무덤을 열고 너희로 거기에서 나오게 하고 이스라엘 땅으로 들어가게 하리라
“내가 너희들로 무덤에서 나와 고국으로 돌아가게 하겠다”는 뜻이다. “내가 너희들 속에 성신으로 충만하게 하겠다.”는 뜻이다.
13.내 백성들아 내가 너희 무덤을 열고 너희로 거기에서 나오게 한즉 너희는 내가 여호와인 줄을 알리라
14.내가 또 내 영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가 살아나게 하고 내가 또 너희를 너희 고국 땅에 두리니 나 여호와가 이 일을 말하고 이룬 줄을 너희가 알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하나님은 당신 자신의 역사의 주재자 되심을 입증하기 위해 먼저 약속을 주신다. 그 다음에 그 약속을 성취하신다. 약속-성취 도식은 하나님이 역사의 주관자이심을 입증하는 탄탄한 공식이다.
마른뼈들의 부활은 하나님의 거대한 회복 역사의 서론에 불과했다. 포로들의 영적 갱생은 고토 복귀와 북이스라엘-남유다의 평화 통일로 이어졌다. 본문은 회복된 포로들이, 하나님의 백성들과의 적대적 과거를 청산하고 새로운 연합과 일치를 주도할 주체 세력이 될 것임을 예고한다. 실상 에스겔이 바벨론 포로들의 고토 복귀와 남유다와 북이스라엘의 통일과 연합을 꿈꾸고 있었던 주전6세기는 북이스라엘이 멸망한 지 이미 150여년이 경과한 시점이었다. 주전 721년에 북이스라엘이 앗수르의 속주로 강제 편입되고, 열 지파는 정치적 독립을 대부분 상실했다. 북 이스라엘의 영토에는 앗수르가 강제 이주시킨 이민족들이 살게 되었고, 많은 귀족과 왕족들이 메소포타미아 지역으로 유배되었다. 따라서 북 이스라엘의 열 지파는 잃어버린 양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남유다의 민족주의적인 왕들과 예언자들은, 잃어버린 열 지파의 회복과 남유다와 이스라엘의 통일과 연합에 대한 희망을 포기하지 않았다. 에스겔 자신도 남북 겨레의 연합과 일치에 대한 희망을 절대 버리지 않았다. 그는 예언서 전체에 ‘유다’라는 칭호보다 ‘이스라엘’이란 칭호를 더 자주 사용했다. ‘이스라엘의 온 족속’이라고 했다. 그에게 남북 북단이란 아예 존재하지 않았던 일이기 때문이다.
에스겔에게 있어 하나님의 백성의 부활은 다음의 네 가지 요소를 포함하는 미래를 의미한다.
첫째, 유다와 이스라엘 포로들의 고토 복귀이다.
둘째, 남유다와 북이스라엘의 통일과 연합니다.
셋째, 고토에서 율법을 준수함으로써 번영과 안전 확보와 평화와 민족적 화해의 경험이다.
넷째, 다윗 왕과 같은 이상왕에 의한 계약 공동체성의 회복이었다.
하지만 그가 그리던 이런 네 가지 미래상은 그 앞에 놓여 있던 현실과 정반대였다. 나라는 북이스라엘, 남 유다로 분열되었고, 민족의 주도세력들은 이방땅에서 포로생활을 하고 있었다. 본토에서나 이방땅에서나 백성들은 율법준수에 실패했다. 내부의 분열과 외부의 압박, 무엇보다도 슬픈 것은, 유다와 이스라엘의 남은 백성들이 거짓된 지도자들에 의해 노략질당하고 있었던 사실이다(겔 34장).
그런데 하나님께서 15-28절까지 이스라엘과 유다의 통일을 다루는 막대기 비유를 이야기하신다.
민수기 17:1-13에서 나무판에 이스라엘 조상 두령들의 이름을 적는 장면이 나온다. 에스겔에서 나오는 ‘막대기’는 민수기에서 말하는 ‘지팡이’와 같은 물건을 지칭하는 것 같다. 두 경우 다 글자를 쓰는 나무 막대기를 의미한다. 또한 막대기는 이차적으로는 목자의 막대기로서, 다윗 왕과 같은 이상왕의 영도력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
15.여호와의 말씀이 또 내게 임하여 이르시되
16.인자야 너는 막대기 하나를 가져다가 그 위에 유다와 그 짝 이스라엘 자손이라 쓰고 또 다른 막대기 하나를 가지고 그 위에 에브라임의 막대기 곧 요셉과 그 짝 이스라엘 온 족속이라 쓰고
17.그 막대기들을 서로 합하여 하나가 되게 하라 네 손에서 둘이 하나가 되리라
...
에스겔은 한 나라가 망할 때 그 안에 속해 있는 한 개인이 얼마나 대책없이 산산조각 나는지를 뼈저리게 경험한 인물이다. 하지만, 하늘의 열림을 경험함으로써 땅의 절망을 초극했다.
마른뼈와 같은 상황 가운데 하나님께서 생기를 불어주시도록! 말씀으로 우리의 영혼에 생기가 살아나도록!
▮찬양
부흥 1907
성령의 새바람(이 땅의 동과 서 남과 북)
할렐루야 할렐루야(모든 민족과 방언들 가운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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