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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야고보서

야고보서 1장 1절, 델마와 루이스

by Message.K 2022. 2. 25.

야고보서1장 1절를 가지고 <델마와 루이스>라는 제목으로 아주 오랜 전에 중고등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예배설교입니다.

 

 

 

설교 목표/

1.야고보와 예수님과의 관계를 살펴보면서 어떻게 ‘형제 관계’에서 ‘주인과 종의 관계’로 변하였는지에 대해 주목한다.

 

 

델마와 루이스

<델마와 루이스>라는 영화가 있다. 중년을 향해 가는 두 여자의 파란만장한 이야기이다. 매일 남편의 뒷바라지와 집안 일로 자신이 왜 사는지에 대한 아무 목적도 없이 힘겹고도 지루하게 살아가는, 너무 집안에만 쳐 박혀 있다보니 세상물정에 대해서 아무 것도 모르는 ‘델마’와 레스토랑의 웨이트리스라는 바깥일을 하면서 델마와는 다소 대조적으로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에 대해 조금은 아는 델마의 친구, ‘루이스’가 남편 몰래 주말 여행을 계획하고서 낚시를 떠나면서 영화의 막이 오른다. 또한 델마는 여자 둘이서만 떠나는 여행을 조금은 걱정해서인지 집안 서랍에 놔둔 권총도 가방에 함께 넣는다. 그들은 기다란 자가용을 타고서 음악을 아주 크게 틀어 놓고서 둘이서 흥얼거리면서 누가 보더라도 그들은 자신의 지금 상황이 엄청나게 기쁜 것임을 알게끔 하는 장면이다. 그러다가 델마는 루이스가 피우는 담배를 입에 물고는 담배를 피우는 시늉까지도 한다. 그러면서 둘은 한 바탕 웃는다. 일상적인 삶의 굴레에서 벗어난 델마에게는 이 여행이 엄청난 해방감을 안겨 주었던 것이다.

 

 

 

 

그러다가 어느 디스코 장에 가서 순진한 델마는 한 남자의 유혹에 넘어가 강간을 당할 뻔하지만 그 때 루이스는 델마가 가지고 온 권총으로 그 남자를 쏜다. 이른바 ‘살인’을 한 것이다. 둘은 총격 사건의 충격으로 침묵을 지키다가 후에는 델마는 루이스의 ‘살인’이 너무 지나친 행동이 아니었냐는 식으로 말하고 루이스는 델마의 세상물정도 모르고 디스코 장에서 남자에게 호락호락 넘어간 행동에 대해 불만을 표현한다. 근데 후에 둘의 대화를 통해서 알게 되지만 루이스는 텍사스에서 강간을 당한 아픈 경험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 현장에서 인내력을 잃고서 권총을 빼어든 것이었다.

 

 

 

 

하여튼 그들은 이 사건으로 말미암아 ‘도망자’신세가 되어버린 것이다. 길을 따라 그들은 끊임없이 도주여행을 벌이게 된다. 이렇게 길을 따라 끊임없이 달려가는 영화를 이른바 ‘로드 무비Road-Movie'라고 하는데 델마와 루이스는 길 영화, 즉 로드 무비의 표본격인 영화이다. 그들은 그렇게 도망을 다니다 델마는 강도에게 그들의 전 재산인 6천 7백달러를 아주 교묘하게 털리고 이를 통해 세상에 대해서 조금씩 눈을 떠가면서 슈퍼마켓의 돈과 물건을 훔치기까지 이른다. 이른바 ’강도짓’까지 하게 된다. 그들은 그러면서 서로에 대해 이해를 하게 되고 열린 마음과 공감대를 형성하게 된다. 델마는 루이스를, 루이스는 델마를. 둘의 만남은 조금은 자기들이 생각한 대로 펼쳐지진 않았지만 그래도 그들은 자신들의 삶을 긍정하면서 흡족해한다. 일평생 그렇게 자유롭고도 기쁜 순간은 없었기 때문인 것이다. 비록 그들이 살인과 강도 짓을 하여 도망자의 신세가 되었지만. 그 뒤의 이야기는 잠시 접어두자.

 

 

 

 

 

야고보와 예수 그리스도

오늘 우리가 간단하게 살펴볼 야고보서 1장 1절에서, <델마와 루이스>와 비슷한 한 광경이 펼쳐지게 된다. 그렇다면 델마는 누구이고 루이스는 누구인가? 우리 다같이 1장1절을 다같이 한 번 읽어보자.

 

 

 

아주 쉬운 질문을 하나 하자. 야고보서의 저자, 지은이는 누구인가?

여기 나오는 <야고보>다. 그렇다면 야고보는 누구인가? 그가 도대체 어떤 사람이며 어떤 인물인가? 그를 간단하게 소개하자면 바로 ‘예수님의 형제’라는 것이다. 예수님이 마리아의 태를 빌어 성령으로 잉태하셨지만 정말 요셉과 마리아 사이에서 태어난 사람은 몇 있다. 그들은 어쨌든 형제였다. 배 다른 형제라는 말을 사용할 수도 있겠다. 그는 예수님과 혈육적인 관계를 가진 형제였지만 자기를 소개하는 이 짤막한 1장1절에서는 그렇게 자신을 소개하지 않는다. 형과 동생이나 형님, 아우의 이런 관계가 아닌 <주인과 종의 관계>를 나타내고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종 야고보

형제지간에 그런 주인과 종의 관계는 흔치 않다.뭐 대기업 같은 경우에는 이와 비슷한 경우가 있지 않겠는가? 현대그룹 같으면 정주영씨가 명예회장을 하고 정몽구씨가 회장, 정몽헌씨가 부회장,정세영씨가 자동차 명예회장 등 이렇게 형제지간에 권력과 명예를 나눠먹는 경우는 있어도 형이 주인이 되고 동생은 종이 되는 경우는 찾아 볼 수 없다. 그 뿐만 아니라 형제지간에 동업을 하거나 일을 같이 하는 것도 별로 좋은 것으로는 보지 않는다. 동업을 하더라도 형제라는 혈육의 정이 끼여있기 때문에 ‘돈’을 주고받는 것도 쉬운 일만은 아닌 것이다. 괜히 ‘돈’ 때문에 의리가 상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기서 야고보는 예수그리스도와의 관계를 주인과 종, 노예로 표현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 야고보가 지금 겸손한 척 위선을 떨고 있는 것인가? 아니면 우리에게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인가? 아니다.그가 지금 내뱉고 있는 말들은 전부 진실이다. 왜냐하면 그는 예수님을 만난 후에 이 서신을 기록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가 예수님을 진정으로 만나지 못 했을 때는 어떠했는가? 야고보는 주님의 형제로서 예수님의 공생애 기간동안-30~33년-인간적인 기대를 가지고 예수님을 대했다. 초막절에 야고보가 예수님을 만난 사건은 그가 그 때까지 불신자였다는 것을 보여준다.

 

         요한복음7:5,이는 그 형제들이라도 예수를 믿지 아니함이었더라

 

이렇듯 야고보는 예수님을 자신의 구세주로 믿지 못했던 것이다. 왜 그러했을까? 예수님이 나타나는 장소와 시간마다 사람들은 몰려들었고 이적과 기적이 행하여졌지만 정작 그 가족들은 왜 믿지 못하였단 말인가? 그것은 간단하다.‘일종의 선입견, 편견’ 때문인 것이다. 이것은 아주 무서운 것이다. 그래서인지 프란시스 베이컨은 이를 ‘우상’이라 하면서 4가지 종류로 분류하지 않았는가? 고등학교 교과서에 나오는 내용이 아닌가? 그렇다면 예를 한 가지 들어보자. S와 S1-둘은 형제이다-가 있는데 S가 갑자기 나타나서는 우리 학생회 회원들에게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자는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요 어쩌구 저쩌구’했다 치자. 그 광경을 본 성률이가 그 사실을 보고 믿을 수 있겠는가? 근데 신기하게도 S가 그 말을 하고 나서 사람들이 몰려들었고-그것도 엄청나게-이상한 기적, 이를테면 유독 또래들보다 몸집이 작은 M의 작은 키가 자라나서 180cm가 되었다는 작은 기적부터 시작해서 병을 앓던 친구가 병이 낫게 되면서 사람들은 S를 추켜세우면서 매일 매일 그의 설교와 말씀과 치유의 능력을 체험하기 위해 온 동네 방네에서 사람들이 다 몰려왔다고 치자. S의 입에서 나오는 말을 헛소리라고 했던 S1이 기적적인 일을 목격한다. S1가 그러면서 S를 ‘나의 주 나의 하나님’이라고 고백할 수 있겠는가? 눈으로 그 광경, 믿기지도 않는 광경을 보았지만 그는 감히 S를 구세주로 믿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런 상상의 나래를 펼쳐 본다면 이 야고보라는 인물의 마음을 추측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성경의 저자들은 야고보와 그의 형제들이 예수님을 어떻게 대하였으며 어떻게 바라보았는지 잘 설명해 주고 있다.

 

    마가복음3:21,예수의 친속들이 듣고 붙들러 나오니 이는 그가 미쳤다 함일러라

 

 

여러분 생각해 보라.

예수님은 야고보와 함께 어린 시절을 보내었을 것이다. 목욕탕에도 같이 갔을 것이다. 밥도 같이 먹고 잠도 같이 자면서 잠꼬대와 잠버릇을 다 알고 있었을 것이다. 둘이서 아버지 요셉의 목수 일을 하는 가게에 가서 장난치다가 꾸중도 같이 듣고 했을 것이다. 그러다가 나이가 들어 철이 들고 아버지의 목수 일을 같이 도왔을 것이고 일 하다가 쉬면서 어머니 마리아가 준비한 새참, 중참도 같이 맛있게 먹었을 것이다. 그런 30년의 시간을 같이 생활해 오다가 갑자기 예수가 ‘사역’이라러니 ‘소명’이라러니 하면서 유대의 이곳 저곳을 돌아다니면서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워 왔다.’라는 말을 들었을 때 동생 야고보의 마음과 생각은 당연히 의아한 반응과 기이한 반응으로 일관되었을 것이다. 그래서 야고보와 그의 친척들은 그를 미쳤다. 정신 이상이다.라고 판단했던 것이다. 그런데 그러한 그가 변화되었던 것이다. 그가 예수님의 형제가 아닌 종이라고 표현할 수 있는 관계에까지 이른 것을 우린 보았다. 그렇다면 그 변화의 동력, 변화의 원인은 무엇인가?

 

 

 

 

기적, 이적, 신비로운 체험___ 그 한계의 지평.

이른바 기적인가? 이적인가? 야고보가 예수님을 형으로서가 아닌 구세주요 하나님의 아들임을 진정으로 느끼며 체험한 계기는 무엇인가?

그것은 앉은뱅이가 일어나고, 눈 먼 자가 눈을 뜨고 하는 그런 체험으로 말미암아 이뤄진 것이 아니다. 물론 이러한 것들이 야고보에게는 예수님에 대한 ‘새로운 관점’을 제공했을 것이다. 자극제가 되었을 것이다.‘어 예수 형님이 이상한데? 어디서 저런 이상한 능력과 기적이 나오지?’라고 말했을 것이지만 정작 예수님을 가슴 깊숙이 만나지는 못했다. 사람들은 그런 말을 종종 한다.‘하나님을 보면 믿는다. 보이지도 않는 하나님을 우예 믿노?’라는 식으로 ‘안 보니깐 아느냐?’라고 말한다. 하지만 그런 사람들은 봐도 믿지 않는 사람들이다.

 

 

 

어떤 이들은 불치병이나 고질적인 병, 이를테면 암 같은 것을 앓다가 기적적으로 나아서 예수님을 믿는 이들이 종종 있다. 그런 것은 <기적>이다. 요 근래에 들은 이야기인데 우리 고모 교회에 나오던 개인택시 운전하시던 분이 3일 동안 간절히 기도해서 이마에 있던 암, 5년이나 되어서 이젠 머리전체로 번지고 있던 암세포가 죽었던 사건을 간접적으로 들었던 것이 기억이 난다. 이런 것을 기적이라고 한다. ‘미라클miracle’인 것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이런 사실들을 보아도 안 믿고 보지 않아도 안 믿는다. 야고보의 마음에도 그러한 마음들이 없지 않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기적이나 이적은 그것을 직접 당한 사람이나 가까이 있던 사람들에게는 영향력이 있을지 모르지만 다른 이에게는 별다른 영향력이 없다. 그것이 기적, 즉 물리적인 변화, 정신적인 체험의 한계이다. 그런데도 적지 않은 기독교인들은 기적적인 일을 늘 바라고 있고 은근히 그런 일들이 일어나길 고대하고 있다. 하지만 그런 것들은 <능력>이 없다.<일시적인 체험>일 뿐이다.<순간적인 체험>에 지나지 않는다. 저도 교통사고를 당해서 기적적으로 살아났던 사람 중에 하나이다. 그 증거는 내 뒷통수에 확연히 자리잡고 있는 흉터이다. 하지만 그 체험, 그 기적적인 체험이 ‘능력’을 발휘하지는 않는다. 아무리 예수님이라고는 하지만 그런 이적들로 인해 야고보는 변하지 않았던 것 같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

야고보가 형님을 구세주로 모신 것은 ‘부활 후’였다고 사람들은 보고 있다.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신비한 체험을 찾아다니는 그런 자들이 아니라 예수님의 십자가의 그 사건과 부활하셨다는 그 사실을 믿는 자들이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능력의 원천이다. 그 예수님이 우리를 구원하실 수 있는 이유는 그 분이 우리의 병을 고치고 믿기지 않을 정도의 기적을 베푸셨기 때문이 아니라 그 분이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피를 흘려주셨기 때문이다. 그가 우리를 너무나 사랑한 나머지 하나님 아버지의 거룩한 뜻을 순종하여 자신을 낮추어 인간의 형상으로 오셔서 십자가에서 죽어 주셨기 때문이다. 그런데 죽은 데서 그치면 아무 소용이 없다. 그 분이 다시 부활하셨다는 것이다. 죄와 사망의 권세를 벗고서 다시 사셨다는 것이다. 그것이 <능력>인 것이다. 야고보에게 믿음이 생긴 것도 이 ‘부활 사건이후’인 것이다.

 

 

 

 

 

체인지 -주인과 종...

아무리 허울이 없고 친분이 두터운 친구 사이라도 한 사람이 주인이 되고 종이 되는 것은 쉽지만은 않은 것이다. 그 뿐아니라 형제간도 그러할 것이다. 하지만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은 야고보와 예수님과 관계를 새로이 정의하고 있다.‘주인과 종’의 관계로 말이다. 예수님의 사랑은 이처럼 혈육적인 관계도 변화시킨다. 강한 편견과 선입관으로 가득 차 있던 야고보를 변화시켜 자신의 사역자로 부르셔서 사용하시는 하나님을 보라. 그는 성령님의 강림 후에 예루살렘 교회의 중심적인 인물로서 활동하였다.(행12;17.15;13,19.21;18.갈1;1,9-10)

 

 

 

 

영화 ‘델마와 루이스’의 마지막은 그랜드캐년에서 펼쳐진다. 십여 대의 경찰차가 델마와 루이스를 에워싸고 기동대의 저격수들이 무장을 한 채 총을 겨누고 있다. 델마와 루이스의 대화이다.

 

 ‘난 더 이상 예전의 그곳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아’
‘나도 그래’

 

그러면서 그 둘은 차를 몰아 그랜드캐년의 낭떠러지로 달려간다. 그러면서 그들은 그들만이 가진 소중한 자유를 간직한 채 영화는 끝이 난다. 델마와 루이스의 자유의 그 길을 따라 달려온 그 여정을 통해-살인,강간,강도....- 둘의 관계는 깊은 이해로 여성만이 만끽하는 공감대를 형성하는데 이것과는 차원이 다른 야고보서의 주인공 야고보와 예수님과의 관계는 바로 주님의 죽으심과 부활로 이뤄졌다. 단지 물리적으로 같은 집에서 자라났다는 혈육의 차원에서가 아닌 “영적인 가족”이 된 것이다.  더 이상 야고보에게 있어 예수님은 형님이 아닌 자신의 죄를 대속 하기 위해 제단에 올려지는 어린양인 것이다. 우리 학생회 여러분에게 혹시 이런 예수님에 대한 편견이 있는가? 야고보가 가진 그런 색안경이 있는가? 야고보가 변했다. 여러분도 변할 수 있다. 여러분의 삶도 예수님이 개입하시면 변화될 수가 있다. 여러분에게 있어 예수님은 도대체 어떠한 분인지 한 번 생각해 보길 바란다. 여러분의 주인이 되시는가? 아니면 여러분의 소원을 들어주는 도깨비방망이는 아닌지 스스로 물어보길 바란다. 주님은 여러분의 주인이시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죄의 원수에게 값을 지불하고 사망의 자리에서 생명의 자리로 여러분을 옮기셨다. 여러분에게 영생을 주시는 그 분이 ‘우리의 주인’이 되신다. 지금도 여러분을 부르고 계신다.

 

  야고보를 변화시키신 그 분이 여기 이 자리에 우리와 함께 계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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