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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히브리서

히브리서 10장 19-25절, 그리스도인 공동체의 운동 방향

by Message.K 2022. 3.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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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포스팅은 히브리서 10장 19-25절을 본문으로 한 <그리스도인 공동체의 운동 방향>이란 주제로 설교한 내용입니다.

 

 

 

 

이 세상에는 참으로 많은 사람들이 살아가고 있다. 그 많은 사람들이 서로 끼리끼리 모여 무리를 이루고, 집단을 이루어 동호회 활동이나 동아리나 공동체를 만든다. 세상의 무수한 공동체들 가운데서 교회, 즉 그리스도인의 공동체도 그 많은 공동체 들 중의 하나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인 공동체를 다른 공동체와 비교해서 볼 때 구별되는 것이 있을까? 뭔가 다른 집단과 교회라는 무리가 다른 점이 뭐가 있을까? 만약 있다고 생각한다면 다른 세상의 공동체와 비교해서, 그리스도인 만이 갖고 있는 특별한 활동은 무엇이 있는가? 

 

 

 

 세상의 모든 공동체, 계 모임이나 동창회나 동아리나 서클이나 친목회나 동호회 등은 ‘먹고 마시고 즐기고 서로의 이익을 같이 도모하면서 저축도 하고 그리하여 이윤을 남기는’ 그러한 것이 목적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를테면, 조기 축구회 같은 모임은 스포츠를 통해 건강의 유지와 체력단련이 그 모임의 나름대로의 이윤과 이익일 것이다. 

 

 

 

세상의 많은 공동체의 목적은 ‘뭔가를 남기기 위해서’ 모인다는 것이다. 그것이 때론 육체적이거나 아니면 정신적이거나 아니면 물질적이거나 아니면 인간 관계적인 차원에서 나타날 것이다. 그러기에 모든 공동체는 뭔가를 남기기 위해서는 그들의 힘이 분산되어선 아니 된다. 올림픽에서는 금메달을 따기 위해서는 다른 것에 신경 쓸 겨를이 없이 오직 하나, 금메달을 따기 위한 노력과 수고와 훈련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것이 대표팀이 가져야 할 자세가 아닌가? 바로, 공동체가 무언가를 남기기 위해서는고로 반드시 ‘한 목적, 한 방향, 한 관심사’를 가지고 나아간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공동체는 어떠한가? 하나님의 이름으로 모인 교회라는 공동체, 선교단체나 기타 많은 기독교 모임들은 어떠한 특별한 목적과 활동이 있겠는가? 하나님의 공동체, 주님의 공동체인 교회도 ‘한 목적, 한 방향, 한 관심사’로 뭉쳐지고 모인다는 것을 오늘 본문이 말해주고 있다. 그것은 바로 첫 번째 ‘하나님께 나아감’이라는 목적에 있다.

 

 

 

1. 하나님께 함께 나아가자(19-22절)

 히브리서 기자는 지금 독자들을 어떻게 부르고 있는가? 19절…’형제들아’ 이렇게 부르고 있다. 그리고 또한 ‘우리가’라는 지시대명사를 사용하고 있다. 세상의 그 어떤 공동체들도 자기의 회원이나 멤버나 같은 무리를 결코 이렇게 부르진 않는다. ‘형제들아’…왜냐하면 <형제>라는 단어는 피를 같이 나눈 혈육일 때만 사용하는 단어이기 때문이다. 세상의 뭍 집단은 그러한 피를 나누지 않았다. 의형제를 맺는다면서 피로 약속을 하거나, 혈서를 쓰는 행위도 하긴 하지만 진정으로 피를 나누지는 않은 것이다. 그런데 히브리서 기자는 지금 그리스도인 공동체의 사람들에게 ‘형제들아’라고 부르고 있다. 이것은 듣기 좋으라고 하는 이야기가 아니다. 귀를 즐겁게 하기 위해서 이런 호칭을 쓰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왜 이런 ‘형제들아’라는 말을 사용하는가? 왜냐하면 진짜 교회는 피를 나눈 공동체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것은 누구의 피를 나눴다는 말인가? 교회 신자 각 개개인이, 그 많은 사람들이 어떻게 피를 나눈 형제들이 될 수 있단 말인가? 어떻게 한 혈육이 될 수 있단 말인가? 우리가 팔뚝을 걷어 칼로 우리의 피를 다같이 커다란 대야나 양푼이에 담아 700여명이 되는 우리 교회 성도들이 다 돌려가며 마셔야 의형제가 되는 것이 세상 사람들의 방식이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이 나눈 피, 그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피 때문이라는 것이다. ‘예수의 피를 힘입어’.

히브리서 기자는 교회의 성도들이,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공통된 기반이 바로 ‘예수의 피’라고 말하고 있다. 우리가 물리적으로 예수님의 피를 마시지는 않지만, 이미 우리는 상징적으로 십자가의 피를 같이 마시고 먹고 나누었다고 볼 수 있다. 또한 예수의 피가 있기에 하나님께 나아갈 담력이 생기게 되었다는 것을 시사해주고 있다. 이 말은 곧 예수의 피가 없으면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다, 예수의 피가 없으면 절대로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없다는 말이다.

 

 

 

  여러분, 정말 그러한가? 우리가 예수님의 피가 없으면 절대로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는가? 예수님 없이도 교회에 와서 죄용서와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할 수 있는가? 결코 그럴 수 없다. 오직 예수의 피만이 절실하다. 그렇다. 성소에 들어가는 이 길은 20절에 나오는 것처럼 ‘우리를 위한 새롭게 산living 길’인 것이다. 이 ‘예수의 피 라는 이 길’이 없으면 우리는 절대 성소에 들어갈 수 없고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없다는 것이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시기 전가지는 일반 예배자들은 성소-너무나 성스럽고 거룩해서-에 접근조차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최초의 성 금요일에 성전의 무거운 휘장이 위에서 아래로 찢어졌던 것처럼, 그리스도의 순결하고 흠 없는 몸은 우리 자신들을 위해 찢겨지신 것이었다. 우리를 위해 자신의 내어 준 예수님의 피, 그 예수님의 보혈 때문에 전능하시고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게 된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구약의 제사와 신약의 제사의 차이점 을 살펴 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1>구약의 제사제도는 하나님의 명령에 의해 제정된 것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그리스도의 제사에 의해 대치되었다. 구약의 제사는 ‘대제사장이며 동시에 대제사장이 직접 제물 된 그리스도’에 의해 드려진 참되고 유일한 제사의 그림자에 지나지 않는다(히 7-9장, 10:1-8).

 

2>구약의 제사는 임시적인 곧 계속해서 반복적으로 드려야만 한다. 제사장은 백성들이 죄를 지을 때마다 그것은 하나님 앞에 희생제물을 가지고, 짐승의 피를 가지고 나아가야만 했다. 언제나 성전에는 짐승들의 피비린내가 끊이지 않았다. 생선가게에 비린내가 떠나지 않는 것처럼. 그리고 고기 타는 냄새와 연기가 성전에는 떠나지 않았다. 떠날 수가 없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계속 죄를 짓기 때문에 계속해서 반복적으로 제사를 드려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제사는 영원하고 일회적인 제사이다(9:25, 26).

 

3>구약의 제사장은 죽을 수 밖에 없고 죄 된 인간이었으나, 그리스도는 죄 없는 하나님의 아들이었다(7:11-8:6). 이것은 또한 그리스도의 제사가 영원하고 일회적인 이유이기도 하다.

 

4>그리스도의 피는 짐승의 피와 비교될 수 없다(9:12). 하나님의 독생자의 보혈의 피는 매번 반복적으로 드려지는 무수한 짐승의 피와는 비교할 수 없는 존귀함이다.

 

5>신약의 성소는 이 땅 위의 성전이 아니라 하늘이다(9:1,11,24)[1].

 

 

 

 

자기를 단번에 제사로 드려 죄를 없게 하신(9:26) 그리스도의 일회적인 제사는 믿는 자들로 하여금 이제는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갈 수 있다는 확신을 넣어 주는데 가치가 있다. 이제는 더 이상 일 년에 단 한 차례 대제사장에 제한되지 않고 믿는 모든 사람들에게 활짝 열렸다. 우리는 하나님의 집, 즉 교회를 다스리는 “훨씬 더 좋은 제사장, 더 큰 제사장”을 모시고 있다. 그 분의 부르심을 좇아 우리 앞에 들어가신 그 성소 안으로 따라 들어간다. 그 분은 세상의 가치관과 가치와 생활에 의해 죄와 죄책으로 시달린 우리 양심에 물을 뿌리사 깨끗하게 씻겨주시고(V.22, cf, 겔 36:35[2]) 우리로 하여금 깨끗한 양심(참 마음, cf 마 5:8)과 확신(온전한 믿음 cf, 4:16)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도록 해 주셨다.

  한편 양심을 정결케 하신 일을 몸을 씻는 일과 연관 짓는 것이 얼른 보기에는 이상하게 느껴질지 모르나, 세례(본문은 그것을 가르치는 듯 하다)는 어떤 내면적인 실체를 보여주는 외면적인 상징이 있다(벧전 3:21).

 

이상의 5가지의 그리스도의 사역은, 장엄하신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의 업적이며 성취이다.

 

 

 

여러분들은 하나님께 나아갈 담력이 있는가? 하나님께 나아갈 용기가 있는가?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가는데 있어 가장 기초적인 바탕은 ‘나의 나됨’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예수님의 피’라는 것을 잊지 말자.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 구원의 확신이 분명히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따금 하나님께 나아가는데 상당히 주저할 때가 있다. 여러분들도 그런 경험이 없는가? 여러분을 붙잡고 얽어 매고 주저하게 만드는 심한 죄책감에 사로잡힐 때가 바로 그런 순간이 아닐까? 여러분들이 실로 크나큰 곤궁함과 좌절감과 절망감을 느낄 때는 어떠한가? 도저히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없다는 죄인됨을 뼈저리게 느낄 때가 있을 것이다.

 

 

 

 

  그 때 우리의 해결책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하나님께 나아갈 담력을 얻어야’ 하는 것이다. 우리 안에는 더 이상 선한 것이 없을뿐더러 자꾸 우리 자신을 들여다 보기만 하면 실망과 좌절의 상처만이 남을 뿐이다. 우리는 여기서 인간이 도저히 하나님께로 이를 수 없는 그 죄의 크나큰 간격과 거리감을 메우신 예수님을 기억해야 한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서 교량, 다리 역할을 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상기해야 한다.

 

 

  여러분, 여러분들은 진정으로 하나님께 나아가는 유일한 길이 예수님임을 고백하는가? 예수님만이 나를 새롭게 하시고 나의 죄의 저주를 끊을 수 있는 유일한 분이심을 고백하며 하나님께 나아가는가?

히브리서 기자는 지금 우리에게 하나님께 나아가는데 있어 우리가 가져야 할, 성도가 가져야 할 마음의 자세, 구비조건을 이야기하고 있다. 그것은 바로 ‘양심의 악을 깨닫고,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표준새번역]히 10:22

그러니 우리는 확고한 믿음을 가지고 참된 마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갑시다. 우리는 마음에다가 예수의 피를 뿌려서 죄책감에서 벗어나고, 맑은 물로 몸을 깨끗이 씻었습니다.

[현대인의성경]히 10:22

우리가 이미 마음에 피뿌림을 받아 악한 양심이 깨끗해졌고 우리의 몸도 맑은 물로 씻었으니 이제부터는 진실한 마음과 확고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갑시다.

 

 

 

  여러분, 그리스도인의 공동체가 왜 존재하는가? 각양 부서와 조직과 공동체, 바로 교회가 왜 존재하는가? 그 존재목적은 바로 ‘함께 하나님께 나아가는 일’ 때문인 것이다. 우리는 교회라는 공동체 속에서 함께 하나님께 나아가는 노력에 전심전력해야 한다. 우리는 너무나 연약한 그릇이기에 혼자 나아갈 수 없을 때, 같이, 함께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다. 혼자 하면 힘들지만, 같이 하면 그 힘을 반으로 줄일 수 있다. 우리는 하나님께 나아가는 일에 주일학교 학생부터 시작해서 노년의 어르신까지 모두 다 각자의 부서와 처소와 모임에서 힘써야 할 것이다. 우리가 교회에서 일 대 일의 만남이나 교제를 가질 때에도 하나님께 나아가는 일에 신경 써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 인간은 서로 서로에게 무언가를 채워줄 만한 능력도, 힘도 없기 때문이다.

 

 

 

현대인들은 마치 ‘모래알’과 같다. ‘진흙’은 너무나 잘 뭉쳐진다. 그러나 모래알은 잘 뭉쳐질 것 같지만, 뭉쳐져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절대 잘 뭉쳐지지 않는다. 그것은 현대가 그만큼 ‘개인성’은 강하지만 ‘공동체성’은 약하다는 것을 반영해주는 것이다. 이렇게 개인성이 강하고 자기 중심성이 강한 시대에 공동체에서 1대 1로 만날 때 서로에게 집중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집중해야 한다. 우리들은 남들에게 뭔가 줄만한 ‘꺼리’와 ‘여력’이 존재하지 않는다. 또한, 우리가 소그룹이나 대예배나 기관별 모임을 가질 때조차도 하나님께 나아가는 일에 총력을 기울여야 한다. 환경을 탓하고 상황을 탓하면서 자신만의 문제에 함몰되어 있어서는 아니 되며, 방관적인 자세로, 팔짱을 낀 채 아무 생각 없이 교회문턱만 들락날락하는 것은 결코 교회를 위한, 공동체를 위한 길이 아닌 것이다.

그리스도인 공동체의 운동방향의 그 첫째는, 하나님께 함께 나아가자 는 것이다.

 

 

2. 소망을 함께 붙잡자(23절)

우리 말 성경의 ‘우리가 믿는 도리의 소망’의 정확한 의미는 ‘우리가 고백하는 소망이다’ .

그렇다면 그 소망의 내용은 무엇인가?

우리가 믿는 도리의 소망을 움직이지 말고 굳게 잡아-움직이지 말고 요동치 말고 굳게 붙잡아야 할 소망에 대해서 여러 가지로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오늘날의 사회처럼 세상이 그리스도를 사랑하지도, 존중하지도 않을 뿐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널리 무시되고 기독교 신앙이 믿지 못할 것 혹은 매력적이지 않은 것으로 여겨지는 곳에서 ‘소망’은 바로 우리가 믿는 ‘기독교, 그 자체’를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아니면 다른 표현으로 예수 그리스도 혹은 성경의 가르침일 수 있을 것이다. 혹자는 25b의 ‘그날이 가까울수록’이라는 말을 생각하면서 우리가 믿는 도리의 소망을 ‘예수님의 재림’을 이야기한다. 여기서 소망을 꼭 집어서 이야기할 수는 없지만, 히브리서 기자가 말하고자 하는 그 의미를 우리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우리의 입술과 삶으로 고백하고 내뱉는 그 모든 믿음의 소망을 우리는 움직이지 말고 붙들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 소망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태도는 소극적으로는 움직이지 말아야 한다-소망의 자세에 대한 부동성(不動性)-. 적극적으로는 그 소망을 굳게 붙잡아야 한다-소망에 대한 확고한 결의(?), 의지적인 결단과 일상 가운데서의 노력함이 있어야!-.

  공산주의자들,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유물사관에 기초하여 미래는 계급도, 불평등도, 소외도, 가난도 없는 공산사회, 곧 유토피아를 향해 나아간다고 굳게 믿고 있다. 그래서 영광스러운 미래를 앞당기기 위해서 현재의 모순과 투쟁하는 중에 고난 받는 것을 영웅시한다. 미래에 대한 소망이 그들에게 투쟁정신을 고양시키는 것이다.

공산주의자들처럼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의 유일한 소망으로 삼고 그것을 굳게 붙잡고 있는가? 오늘날의 이기적이고 개인주의적이고 자기중심적인 세상에서 우리가 붙잡아야 할 것은 사람도, 돈도, 명예도, 권력도, 이 세상의 그 어떤 것도 아닐 것이다.

 

 

 

우리가 붙잡아야 할 소망은 때론 우리가 사는 세상에 아무런 의미도, 아무런 가치도, 아무런 영향력도 없는 것처럼 느껴질 지 모른다. 그러한 유혹과 시험이 우리에게 미칠 때, 주님에 대한 소망이 흔들릴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곤고한 날에는 그 소망을 붙잡았다가, 형통한 날에는 그 소망을 쓰레기 취급하지는 않는가? ‘소망을 붙잡아도, 직장생활 가운데서 믿음으로 살려고 아무리 발버둥쳐도 다 그게 그거더라, 오히려 손해만 볼 뿐이다. 믿음으로 살면 뭐하냐? 사람들이 알아주지도 않고 오히려 욕만 얻어 먹는데’ 라고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상황 가운데서 우리는 과연 ‘믿는 도리의 소망’을 왜 붙잡아야 하는가? 변하지 않는 상황, 흔들리기 시작하는 믿음, 뜻대로 되지 않는 환경, 쪼들려가는 가계의 경제, 힘들어져 가기만 하는 직업의 현장, 날로 쇠약해져가는 건강, 제대로 되지 않는 자식교육, 더 나빠질 것도 없는 상태, 도무지 희망이 보이지 않는 현실 가운데서 우리가 ‘믿는 도리의 소망이신 그리스도, 예수님’을 왜 붙잡아야 하는가? 소망을 붙잡을 수 있는 근거는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약속하신 이는 미쁘시다”는 것이다.

 

 

약속하신 분은 인간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이시다. 그 하나님는 선하시고 미쁘시다는 것이다.

 He is faithful. 그는 신실하시다. 그는 진실하시고 신실하시다. 그는 미쁘시다. 그 미쁘신 분이 나를 포기하겠는가? 그 분이 나를 ‘고아’처럼 내버려 두시겠는가? 결코 그렇지 않다.

 

 

(히 13:5)돈을 사랑치 말고 있는 바를 족한 줄로 알라 그가 친히 말씀하시기를

내가 과연 너희를 버리지 아니하고 과연 너희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여러분들은 신앙의 낭떠러지에 다다랐다고 생각할 때 무엇을 하는가?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삶의 위기가 찾아 왔을 때 과연 우리는 무엇을 하는가? 그 때 조차도 우리는 ‘약속하신 하나님은 미쁘시다’는 사실을 ‘움직이지 말고 붙들어야 할’ 것이다. 히브리서 기자는 이러한 소망을 혼자서, 개인적으로 붙잡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믿는 도리의 소망을 움직이지 말고 굳게 잡아”라고 말하고 있다. 함께 이 소망을 붙잡자고 말하고 있다. 우리는 다 연약한 인간이기 때문에, 늘 죄를 안고, 늘 죄와 뒹굴며, 늘 죄와 벗하며 살기를 즐겨 하는 인간이기 때문에 이 소망을 함께 움직이지 말고, 함께 붙잡자고 말하고 있다.

두 번째는, 소망을 함께 붙잡자 이다.

 

 

 

 

3. 모여서 함께 돌보자(24-25절)

  히 10:24-25은 그리스도인 공동체 생활 또는 모임과 관련해서 가장 중요한 말씀중의 한 부분이다.

 

그리스도인의 모임에 임하는 자세는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기 위해서’이다. 그 목적은 서로를 돌아보기 위해서이다. 우리가 모일 때 금기시해야 할 것은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행하는 것’이다. 모임 폐기론자들처럼 행동하는 것을 금기시해야 한다. ‘오늘날과 같은 다원주의적이고 개인주의적이고 자기 밖에 모르는 세상에 굳이 모일 필요가 있는가? 자기 일만 알아서 하고 챙기면 되지 굳이 모일 필요가 있는가?’ 라고 하면서 모임을 방해하고 훼방하는 것은, 공동체를 깨는 것이고 교회를 무너지게 하는 것이다. 공동체 내에서도 이러한 파괴적인 행위가 있을 수 있다.

그렇다면 또한 왜 이렇게 우리는 모이기에 힘써야 하는가? 그것은 바로 ‘그날이 가까워 오기 때문’이다.

종말이 가까워지고 주님의 재림이 가까웠기 때문이다.

24절 초두에 ‘서로 돌아보아’는 영어성경에 의하면  ‘Let Us Consider~’로 되어 있어서 우리는 그리스도인의 모임에 임할 때 맹목적으로, 아무 생각 없이 임하는 것이 아니라 무엇을 생각하면서 임해야 할 것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즉 그리스도인이 모일 때는 서로 어떻게 사랑을 할 것이며 어떻게 선행을 격려할 지에 대해서 노심초사 고민하고 연구하는 자세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ASV]히 10:24

and let us consider one another to provoke unto love and good works;

[NASB]히 10:24

and let us consider how to stimulate one another to love and good deeds,

[RSV]히 10:24

and let us consider how to stir up one another to love and good works,

 

 

  여러분들은 동료 그리스도인들과의 만남, 성도들과의 만남을 풍요롭게 하기 위하여 어떤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가? 우리는 또한 신자들의 풍성한 나눔을 위해서 어떠한 노력을 기울일 수 있을까? 교제의 풍성함을 위해서 ‘식탁 공동체’를 만들 수도 있을 것이고 ‘말씀묵상을 나누는 것’을 제안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아니면 찬양을 드리는 것, 찬송을 부르는 것으로 세속화된 우리의 마음을 부드럽게 하여 모임을 더욱더 윤택하게 할 수 있을 것이다. 성도들간의 교제, 공동체의 풍성한 만남을 위해서 우리는 심사숙고해야 함을 히브리서 기자는 말해주고 있다. 우리가 교회에 나아 올 때, 예배를 드리거나 전도회의 각종 행사에 참여하거나 기관별로, 교육부서별로, 교사모임이나 각종 신자들의 모임, 구역모임과 회의에 참석할 때 아무 생각 없이 무의식적으로 나와선 아니 된다. 물론 이 보다 더 악한 것은 ‘모임이기 폐하는’ 행동일 것이다. 우리는 신자들의 모임에 참여적인 자세를 가져야 할 뿐만 아니라 생각하면서 모여야 한다는 것이다‘사랑과 선행으로 서로를 격려하기 위해서’, ‘서로를 돌아보고 자극하고 도전을 주고 믿음을 고무시키기 위해서’ 모여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세상의 공동체와 교회가 다른 점>이라는 것이다.

 

 

 

 또한 ‘그 날’(딤후 3:1-5)이 가까움을 볼수록 우리는 더욱 잘 모여야 한다. 서로의 얼굴을 보고 대면함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위로를 받을 수 있고 힘을 공급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out of sight, out of mind’라는 말이 있다. ‘안 보면 잊혀진다’는 말이다. 성도들은 계속 모이기를 힘쓰고 얼굴 보기를 즐겨 해야 기도라도 한 번 더 하게 되고, 중보도 하게 되고, 말씀으로 서로를 격려하고, 도전을 주기도 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지나치게 이기적이고 자기 중심적인 세상의 영향 탓에 어떤 모임이나 공동체에 들어가면 뭔가 받을 것이 없는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언젠가 야구경기장에 갔을 때 야구경기를 관람하는 것뿐만 아니라 상품(경품)을 타는 것에도 관심을 가진 적이 있다. 그처럼 사람들은 누구나가 다 어떤 모임에 참여하거나 회집으로 모이게 되면 뭔가 어떤 유익이 내게 없을까 하는 생각에 사로잡힐 때가 많다. 그런 생각에 사로잡힌 나머지 공동체에 뭔가 기여할 생각은 전혀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공동체를 위해 헌신할 생각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교회 공동체도 마찬가지이다. 그래서 ‘주 예수께서 친히 말씀하신 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행 20:35) 하셨다.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유익과 이익을 챙기시기 위하여 이 땅에 오셨다면 그는 자신의 몸을 사리면서 결코 십자가 같은 저주스런 사형틀을 지시진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자신의 몸을 아끼시지 않고 다 쏟아 부으셨다. 온 인류를 향하여 하나도 남김 없이 베풀어주셨다.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위대함이다. 우리는 그의 자녀들이다. 우리는 작은 예수이다. 예수 2세들이다. 그의 추종자들이며 제자들이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모범을 쫓아 ‘모여서 함께 돌보는’ 공동체가 되어야 할 것이다.  

 

 

1. 하나님께 함께 나아가는 우리가 되자(19-22절)!

2. 소망을 함께 붙잡는 우리가 되자(23절)!

3. 모여서 함께 돌보는 우리가 되자(24-25절)!

 

 


 

 

[1] (9:24)그리스도께서는 참 것의 그림자인 손으로 만든 성소에 들어가지 아니하시고 오직 참 하늘에 들어가사 이제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 앞에 나타나시고

[2] (겔 36:35)사람이 이르기를 이 땅이 황무하더니 이제는 에덴 동산 같이 되었고 황량하고 적막하고 무너진 성읍들에 성벽과 거민이 있다 하리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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