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에는 '우리가 기도해야 하는 이유'라는 주제로 포스팅하고자 했지만, 글을 써가면서 그것보다는 '하나님은 결코 우리를 버리시지 않으신다'는 주제가 더 옳을 것 같다. 히브리서 13장 5절을 결론적인 메시지로 하고 개인적인 경험으로 글을 시작해보고자 한다.
하나님이 살아계시긴 한가?
편의점에 우연히 동네소식을 듣게 되었다. 편의점 주인장의 말을 들어보니 어제 담배를 사러 왔던 그 손님, 그 사람이 죽었다. 아내 없이 아이들을 남겨두고서 말이다. 몸도 불편한 가운데 감당해야 할 생계의 짐들이 너무나 컸다고 추측해 본다. 마음이 아뜩했다. 한번 뿐인 인생인데, 자녀들을 남겨두고서 스스로 목숨을 포기한 그 아버지의 마음이 얼마나 숨이 막혔을까? 안타깝다!
우리가 사는 세상에는 이런 일들이 황망할 정도로 많이 일어난다. 좀 멀리 있는 이야기를 해 보자면, 러시아와 전쟁을 치르고 있는 우크라이나의 그리스도인들은 정말 이런 질문을 할 것이다.
하나님이 살아계시긴 한가?
탐심은 우상숭배
개척을 하면서 기도를 배웠는데, 그 기도는 '달라give me'는 기도가 아니었다. 우리가 하나님께 기도제목을 가지고 기도하는 것에 대부분은 우리의 욕심에서 출발한다. 하나님은 우리의 요구와 형편과 처지를 무엇보다도 잘 아신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고 했다. 이것은 우리의 행동 반경 뿐만 아니라 기도의 영역에서도 마찬가지이다. 그리스도인이, 교회가 먼저 하나님의 원하시는 의, 하나님의 원하시는 뜻을 추구해야 한다. 그것이 개인의 욕구나 교회의 욕구나 욕망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진짜 원하시는 것 말이다. 매일 기도를 하지만, 내가 무엇을 하고 있나 싶은 때가 있나? 상황과 환경과 현실은 변하지 않고 탄식만 한숨만 나올 때가 종종 있다. 그래도 나는 '달라'는 기도는 내려놓았다. 무엇을 해 달라, 무엇을 이뤄달라는 기도의 저변에는 인간의 탐심이 숨어 있어서 종종 사달이 난다. '탐심은 우상숭배'라고 했다.
'달라'는 기도가 얼마나 위험한지 아는가?
몇년 전에 나는 총체적인 파산을 경험했다. 정말 죽고 싶었다. 그래도 어머니의 기도가 있어, 궁극적으론 하나님의 은혜로 버티니 지금 이렇게 글을 적을 수 있겠다. 나는 파산 이전에 하나님께 내 욕심에서 출발한 기도를 많이 했다. 사람이 시험에 빠진다는 것이 그런 경우인 듯 싶다. 매일 성전에서 성경을 읽고 기도를 했다. 구체적인 이유는 밝힐 순 없지만. 매일 성전에서 기도하고 찬양하고 말씀을 봤다. 하지만 그때 내가 꿈꾸었던 그 돈은 내 돈이 아니었다. 그 모든 것이 얼마나 헛된 것인지를 파산을 경험하고 나서야 알게 되었다. 아무리 찬양하고 기도하고 성경을 본다고 해도 거기에 '탐심'이 끼이면 사달이 난다는 것을 그때 알았다.
영적인 것이 충만하다고 해서 무조건 승승장구하는 것은 아니다. 영적인 것이 충만할지라도 인간의 욕심이 들어가면 문제가 생길 수 있다. 기라성 같은 영적 거인들이 왜 욕심과 탐심의 피날레를 장식하면서 쓸쓸하게 퇴장하는가? 그들이 기도하지 않아서, 성경을 보지 않아서, 찬양을 하지 않아서. 아니다. 그들의 영적 생활은 누구보다도 탁월하고 초월적이었다. 그러나, 아무리 많은 시간의 영적 활동이 있어도 인간의 욕심을 제어하지 못하면 거기에 반드시 사탄이 역사한다.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40일 금식기도하신 이후에 마귀가 등장했다. 예수님을 시험했다. 예수님께서 금식기도를 하셨는데, 왜 사탄이 역사하는가? 아니다. 금식기도하셨기 때문에, 영적으로 더 충만하기 때문에 사탄이 더 기승을 부린 것을 기억해야 한다.
고통의 시간을 통해 우리의 믿음이 얼마나 보잘 것 없는 지를 돌아보게 한다
사람이 너무 큰 충격을 받거나 큰 실패를 경험하면 마음이 다치고 늙는다. 큰 불행과 아픔을 경험하면 몰락할 수 있다. 그때 멘탈을 잘 잡아야 한다. 그 멘탈을 잡지 못하면 생사의 경계도 넘는다.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넘게 된다. 살면서 너무 큰 불행을 겪지 않으면 좋겠다. 하지만 큰 불행과 실패를 경험해 보는 것이 영적으로 유익한 점은 있다. 나의 자녀들이 아버지가 겪었던 아픔과 실패를 겪지 않았으면 좋겠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더 깊이 알아가는 데 고통의 시간hard time만큼 좋은 것은 없기에 이 모든 것도 하나님의 주권 속에 있는 것이다. 큰 아픔과 고통의 나락으로 떨어져 보니 나의 믿음이 얼마나 껍데기였는가를 알게 된다. 사람들 앞에서 허세를 부렸던 것 같은 민망함이 앞선다.
하나님, 돈 좀 주세요
각설하고, 나는 무엇을 달라고 기도하는 경우가 드물다. 하지만 최근에 가계가 너무 빠듯해서 한 마디 했다.
"하나님, 돈이 너무 없습니다. 돈 좀 주세요!"
라고 했다.
권사님에게 갑자기 전화가 걸려오다
그리고서 시간이 몇일 지났던가?
보이스피싱 당할 뻔한 권사님이 전화가 왔다. 나는 그 권사님에게 큰 신세를 지고 있다. 그런데, 그 권사님은 개척할 때부터 후원을 하고 계신다. 그 권사님 남편이 암 수술을 받았는데 회복중이라고서 안부를 전하면서 이번에 암수술로 인해 보험금이 나왔다고 했다. 게중에 일부를 보내겠다고 했다. 눈물이 터졌다.
몇년 전부터 전기요금이 계속 연체가 되고 있다. 한국전력공사에서 우리 상황을 알고는 3달치 밀리면 전기를 해제시켜야 하는데, 1달치만 겨우겨우 매달 말일에 내고 넘어가고 넘어가고 그렇게 생활했다. 구질구질하다. 너무 부끄럽다. 전기요금이 몇 만원이 아니고 몇 십만원씩 나오니깐 감당이 불감당이다. 그런데, 몇년 만에 그 전기세를 다 낼 수 있게 되었다. 권사님 덕분에. 하나님의 은혜로. 밀려 있던 공과금까지 다 해결하고도 남는 돈이었다. 그래도 너무 감사했다. 아이들에게 치킨 사주는 것도 쉽지 않지만 그래도 광야생활 가운데 하나님이 살아계시니 내가 죽지 않고 살아갈 수 있다.
하나님은 돈 달라고 기도하면 잘 주시는 분이 아니시다
다들 잘 아시겠지만, 하나님이 돈 달라고 하면 돈을 잘 주시는 분인가? 물론 초신자일 때는 간증과 증거가 필요하니깐 들어주시지만, 돈 달라고 기도하면 하나님께선 잘 주시지 않는다. 돈이 정말 필요할 때 주시는 것이다. 내가 돈을 달라고 할땐 주시지 않고 그냥 한 마디 툭 던진 그 말에 반응하시는 하나님을 우리는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하나님은 우리의 필요를 이미 다 알고 계시는 분이시다. 나의 형편과 처지, '나 염려하지 않아도 내 쓸 것 아시는' 분이 바로 하나님이시다. 그 분이 왜 우리가 돈을 달라고 하면 바로 주시지 않을까? 그 돈이 지금 내게 유익하지 않기 때문에 바로 주시지 않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내가 한 마디 툭 던진 말에 반응하셨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를 허투루 듣지 않으신다. 우리의 일상의 한 마디 한 마디를 절대 놓치시는 분이 아니시다. 그게 너무 힘이 되었다.
하나님이 살아 계시구나!
사람은 외모를 보지만 하나님은 중심을 보신다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께서 돈이 아쉽겠는가? 헌금을 많이 한다고 그 사람을 대단하게 여기실까? '사람은 외모를 보지만 하나님은 중심을 보신다'고 하셨다. 돈이 많다는 것, 부자라는 것은 외모이다. 결혼정보회사에서 가장 많이 보는 배우자의 조건 중에 하나가 바로 능력이고, 연봉이다. 그 연봉으로 인한 경제적인 안정감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런 거 안 보신다. 하나님에겐 돈이 필요치 않다. 그분은 말씀으로 모든 것을 창조하시고 말씀으로 역사하시는 분이시다.
단지 하나님은 그 사람의 '중심'을 보신다. 중심을 보시고 그 중심에 합당한 그릇이 되면 돈도 주실 것이다. 그런데, 돈을 안 주실 수도 있다. 돈이란 것은 굉장히 리스키risky한 요물이다. 사람을 살리기도 하고 죽이기도 한다.
오늘의 은혜, 하루의 은혜, 일용할 은혜에 감사할 뿐이다
문득 유튜브 강의를 듣다가 앞으로 내 목표와 비전을 글로 적으라는 말에 적어보았다. 솔직히 나는 목사라서 돈에 대해 이야기를 잘 안했는데, 이번에는 돈에 대해서도 적었다. 물론 하나님께서 허락하셔야 하는 부분이다. 솔직히 생활비에 조금이라도 보탬이 될까 싶어 티스토리에 글을 올리고 있는데, 쉽지 않다. 정말 수익을 생각하면 헛웃음이 나온다. 그때 권사님의 전화가 걸려왔던 것이다. 오늘의 은혜, 일용할 은혜에 감사할 뿐이다.
하나님은 결코 우리를 버리시지 않으신다
그리고 떠오른 말씀이다.
히브리서 13:5
"돈을 사랑하지 말고 있는 바를 족한 줄로 알라 그가 친히 말씀하시기를 내가 결코 너희를 버리지 아니하고 너희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이 구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내가 결코 너희를 버리지 아니하고 너희를 떠나지 아니하리라'고 하셨는데, 그 앞에 왜 '돈' 이야기를 하셨을까? '돈을 사랑하지 말고 있는 바를 족한 줄로 알라'고 하셨다. 돈의 힘, 돈의 존재감, 돈의 위력을 미리 이야기하신 것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돈이 없으면, 너무 가난하고 결핍되면 수치심이 느껴진다. 경제적으로 너무 열악하면 정말 자본주의 사회에서 이방인 취급당할 수 밖에 없고 자존감도 낮아진다. 하지만 우리가 기억해야 할 말씀이다.
"내가 결코 너희를 버리지 아니하고 너희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그리스도인은 축복의 통로, 돈의 통로
돈을 흘러가는 것이다. 내게로 왔다가 다른 이에게 흘러가게끔 해야 한다. 돈을 흘러가게 하는 축복의 통로가 되어야 한다. 우리는 죽으면 이 땅의 모든 것을 다 내려놓고 가야 한다.
2021년 비트코인이 엄청난 상승세를 달리고 있을 때 비트코인 최대 보유자로 알려진 억만장자 미르체아 포페스쿠(당시 41세)가 해변의 변사체로 발견되었다. 그때 그가 보유한 비트코인의 개수는 100만개가 넘었다. 당시 그의 자산은 10억 달러(약 1조 1315억원)이었다. 그는 2011년부터 비트코인을 모았다고 한다. 선견지명이 있는 친구였다. 그런데 그 친구가 6월의 어느 날, 수영하러 갔다가 조류에 휩쓸려 익사할 줄 누가 알았는가? 1조원이 넘는 비트코인은 이제 어떻게 될 것인가? 지갑주소도 모를 것이고 비번도 모를 것이다. 그 비트코인이 주인을 잃어버린 셈이다. 우리의 일생 가운데 손에 쥐여진 돈이 포페스쿠처럼 증발되거나 휘발되어선 아니 될 것이다.
우리의 소유로 인해 죽어가는 한 사람을 살릴 수 있다면, 불행과 고통 속에서 신음하는 한 사람을 구원할 수 있다면, 도와줄 수 있다면 그것만큼 가치있는 것이 어디 있을까? 세상의 수많은 사람들의 눈물과 아픔을 외면하지 않고 지구의 한 모퉁이를 조금이라도 밝게 하고 떠나가야 할 책임이 그리스도인에게 있다. 다시 한번, 하나님 감사합니다. 그리고 권사님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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