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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베드로전.후서

베드로전서 3:18-22, 예수님의 승리한 대속역사

by Message.K 2022. 2.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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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포스팅은 베드로전서 3:18-22을 본문으로 하여 <예수님의 승리한 대속역사>라는 주제로 설교한 내용입니다.


 

 

베드로는 2:9에서 새 이스라엘의 사명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그 이후로부터 그리스도인의 생활에 임하는 자세를 이야기한다. 거기서 계속 등장하는 핵심단어는 선하게, 선한행실을 가지라는 것이다. 간간히 계속 선함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다. 벧전 2:12a,12b,15,18,20,3:6,11,13,16,17절에서 계속 언급하고 있다. 하늘의소망을 두고 살아가는 흩어진나그네인인 그리스도인의 삶에 선한 행실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그 가운데 8절부터 시작된 선을 위한 고난, 즉 선을 행하다가 받는 고난에 대한 이야길 22절까지 해주고 있다. 우리가 선을 행하다가 당하는 고난에 대해 베드로는 오늘 18-22절에서 예수님의 고난의 이야길 가져오고 있다. 이 이야기는 단순히 베드로가 옆에서 제자로서 지켜봤던 예수님의 고난 가운데서도 선한 행실을 모본으로 가져올려고하는 차원이 아니다. 여기선 예수님의 대속사역이 얼마나 탁월한지를 보여준다. 그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18-21절의 난해한 구절을 해석해야한다.

 

 

 

특별히 19절에ㅡ"옥에 있는 영들에게 선포하"셨다는 내용인데, 이 옥에있는 영을 해석할때,

 

1)죽은 영,

2)사단,

3)둘 다를 뜻한다,

 

 

김병국 박사는 20절과 관련하여 죽은 자들의 영들이라고 보는 것이 제일 낫겠다고 한다. 19절을 가지고 카톨릭에선 지옥강하설을 주장한다. 사도신경에 나오는 장사되시고 지옥에 내려가셨다는 표현을 '지옥강하설'로 이야기한다. 그런 예수님께서 지옥의 죽은자들에게 복음을 전하러 가셨단 말인가? 인간의 죽은이후는 명약관화한 천국/지옥인데 재교육하기 위해 지옥에 가셨다는 말은 말이 되지 않는다. 그리고 여기에 나타나는 그들은 그리스도이전 시대의 모든 죽은자들을 설명하는 대목이 아니다. 단지 노아시대의 불순종만 다뤘다는 것이다.

 또 하나는, 전파하셨다는 헬라어 동사가 복음을 전하다의 유앙겔리조가 아니라 케루쏘(to shout) 라는 점이다. 중립적으로 어떤 정보의 메시지를 알린다는 의미이다. 좀 더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예수님이 죽은 자의 영들에게 십자가 사건을 알리신으로써 그들에 대한 심판이 확정되었음을 통고하셨다.

 

 

 

 

과거에는 구원받기가 무척 힘들었다. 심령의 완악해진 자연적 상태에서 구원을 얻는다는 것이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나 예수님으로 인해 상황이 변했다. 노아 시대는 노아가족 겨우 8명이 구원받았다. 지금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때문에 수많은 사람들이 성령의 감동을 받아 구원을 받는다. 본 단락에서 가장 강조하는 것은 구원에 있어서 과거의 상황과 현재의 상황이 크게 달라졌음을 드러내는 것이다.

 

 

 

노아시대가 거론되는 것은 노아시대가 특별해서가 아니고 죄악된 시대의 표본으로 제시되고있는 것이다. 노아의 시대ㅡ120년동안 기다리셨던 하나님이시지만, 고작 구원받은 무리는 8명에 불과했다. 그러나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여 주신다(18절). 그래서 얼마나 많은 자들이 구원을 얻었는지를 보라!

 

 

죄악의 시대는 동일하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때문에 노아의 시대 와는 완전히 다른 시대가 되었다. 그것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것이 "물"이다.

 

 

 

노아시대의 물은? 죽음의 도구, 심판의 도구, 물로 구원얻은 자가 몇명뿐이니라는 말은 물이 구원이 도구가 아니라는 말이다. 20절의 물로 말미암아 는 홍수의 물을 통과하여 라고 해석하는것이 좋다. 물은 죽음의 도구였다.

 

 

 

물은 세례라...세례는 한 사람의 과거생활과의 완전한 단절을 뜻함. 홍수가 옛 죄된 세상을 쓸어버리셨듯이, 세례도 한 사람이 자신의 과거의 죄된 삶으로부터 벗어나 그리스도 안에서의 새로운 삶에로의 돌입을 의미한다. 베드로는 독자들에게 공중 앞에서 그리스도에 대한 입장을 밝힘으로써 사태의 추세에 그들 자신을 맡기는 용기를 가지라고 권면하였다. 공중 앞에서의 세례의식이 박해를 모면하기 위해 선한 양신을 져버리는 유혹으로부터 그들을 구원해줄것이다. 1세기,그리스도인들에게ㅡ세례는 그가 그 결과들에 상관치않고 그리스도께 헌신함으로 그만을 따를 것이라는 사실을 의미하였다.

베드로는 세례를 향해 "하나님을 향해 선한 양심의 간구"라고 했다.

 

 

그러나,지금은 정반대, 물은 죽음의 상징이 아니라 생명의 상징이 되었다.

 

21절을 읽으라!

 

결국 본문으로 인해 노아시대와 현재를 대조하면서 현재 우리가그리스도의 희생으로 누리는 축복이 얼마나 큰지를 보여준다. 20절의 노아 시대 사람들이 언급된 것은 그들처럼 마음을 완악하게 하지 말라는 경계의 의미가 담겨 있다.

 

 

 

 

결론이다.

 성도여러분,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더 큰 축복을 거머쥐게 되었다. 예수님을 통해 우린 심판이 아닌 구원의 은혜를 받게 되었음에 감사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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