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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베드로전.후서

베드로전서 5장 1-11절, 목적의 하나됨-하나님의 양무리를 치라

by Message.K 2023. 4.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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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약성경 베드로전서 5장 1-11절을 바탕으로 교사헌신예배 때에 과거에 설교한 내용을 포스팅합니다. 설교제목은 '목적의 하나됨- 하나님의 양무리를 치라'는 주제였습니다. 교회가 사람을 길러야 한다는 취지로 설교했는데요. 한번 볼까요?

 

 

베드로전서 5장 1-11절, 하나님의 양무리를 치라
베드로전서 5장 1-11절, 하나님의 양무리를 치라

 

생각의 변화-늑대이야기

여러분은 늑대에 대해 어떻게 생각합니까? ‘늑대’라는 단어를 듣자마자 음흉한 남자를 떠올렸다면 이 글을 한 번 나눠봅시다.

 

 

늑대는 평생 한 마리의 암컷과 사랑을 한다.
늑대는 자신의 암컷을 위해
목숨까지 바쳐 싸우는 유일한 포유류다.
 
늑대는 자신의 새끼를 위해
목숨까지 바쳐 싸우는 유일한 포유류다.
늑대는 사냥을 하면
암컷과 새끼에게 먼저 음식을 양보한다.
 
늑대는 제일 약한 상대가 아닌
제일 강한 상대를 선택해 사냥한다.
 
늑대는 독립한 후에도
종종 부모를 찾아와 인사를 한다.
 
늑대는 인간이 먼저 그들을 괴롭혀도
인간을 먼저 공격하지 않는다.
 
늑대와 남자는 엄연히 다르다.
남자를 늑대같다고 칭찬하지 마라.
남자들이 늑대만큼만 살아간다면
여자는 울 일이 없을 것이다.

 

 

 

 

 

어떻습니까? 여러분의 늑대에 대한 생각이 바뀌었습니까? ‘늑대같다’라는 말이 얼마나 부정적으로 사용되어 왔는데, 지금 이 내용을 알게 된 순간 다소의 생각의 변화가 일어났을 것입니다. 변화는 중요합니다.

 

 

 

교회에서 강조하는 것이 교회에는 없습니다!

저명한 한 장로님과 국내외 강사들이 함께 식사를 나눈 적이 있습니다. 한국교회의 미래와 다음 세대에 대한 고민을 나눈 적이 있습니다.

 

“목사님, 세상은 참 빠르게 변하는데 교회가 적절한 대응을 하지 못하는 것 같아요. 특히 다음 세대 아이들에게 더 그런 것 같아요.”

“장로님, 교회는 그 어디에서보다 변화를 강조하는데 왜 변화되지 못하는 것일까요?”

“목사님, 그거 아세요?”

“......”

“교회에서 가장 강조하는 것이 교회에는 없습니다.”

 

 교회에서 강조하는 것이 교회에는 없습니다. 교회학교의 부흥을 외치는 교회에 부흥이 없다는 지적입니다. 교사의 사랑을 강조하는 교회에 사랑이 없습니다. 말씀과 비전을 강조하는 교회에 아이들을 붙잡고 살아야 할 말씀과 비전이 없을 때가 많습니다.

 

 

 

 

변화는 ‘사람의 마음을 얻는 것으로부터’

  왜 그런가? 생떽쥐빼리의 ‘어린 왕자’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이 뭔지 아니?”

“흠, 글쎄요. 돈 버는 일? 밥 먹는 일?”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이은 사람이 사람의 마음을 얻는 일이란다.”

 

 

 그렇습니다. 세상에서 제일 어려운 일은 사람의 마음을 얻는 일입니다. 변화는 사람이 사람의 마음을 얻을 때 일어나는 스파클입니다. 교사는 학생, 제자들의 마음을 얻어야 합니다. 리더는 조원들의 마음을 얻어야 합니다. 구역장은 구역원들의 마음을 얻어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은 교사헌신예배입니다. 교사들이 아이들의 마음을 얻지 못하고서 ‘변화’를 기대할 수 없습니다. 기독교교육은 아이들의 머리를 지식으로 채워주는 것이 아닙니다. 아이들의 가슴에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새겨주는 머리의 작업이 아닌, ‘가슴의 작업’이기에 더 마음을 얻어야 하는 것입니다.

 

 기독교교육은 영혼의 변화, 영혼의 구원이 그 목적이기 때문에 더 마음을 얻어야 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것입니다. 그것, ‘달라질 것’이라는 것, ‘변화change’입니다. 변화! 교육의 목표, 특별히 기독교 교육의 목표는 ‘변화’입니다. 교사 여러분들이 추구하는 최종적인 목표는 바로 ‘변화’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하지만 오늘날 교회에서 아이들은 잘 변하지 않습니다. 그러니깐 오히려 견디다 못해 교사들이 변합니다. 기다리다 못해 망부석이 되어버린 교사들의 현실입니다.

 

 

 

 

 이런 측면에서 오늘 베드로전후서는 기독교 인물중에 가장 큰 변화를 경험한 인물 중에 한 사람이 쓴 성경입니다. 변화에 대해서 이야기할 사람 손 좀 들어보시오! 라고 하면 주저없이 손을 들 사람이 바로 ‘베드로’가 아닙니까? 그 양반은 성격 자체가 다혈질이라서 더 덤벙대며 손을 들 수도 있겠지만, 쩝!

 

 

 

무식해서, 너무나 용감한

베드로가 동료 그리스도인들, 특히 지도자들에게 주고 있는 권면과 가르침이 무엇인지 열거해보라.

1.베드로와 같은 장로들이었다. 베드로는 그들에게 충고하며 권면하고 있다. 예수님의 수제자로서, 사도로서 그가 경험하였던 신앙의 이력을 토대로 장로들, 교회의 지도자들에게 권하고 싶다. 오늘 저는 특별히, 오늘 헌신예배의 주인공, 교사들에게 리더들에게 던지고 싶습니다.

 

 

하나님의 양 무리를 치라(우리의 현재)

2-4절: 장로들에게 이야기하면서 목회(목양)에 대해서 가르치고 있다. 양무리를 친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어린양을 먹이라, 양을 먹이고 치라는 말씀을 통해 부여받은 메시지이다. 예수님에게 부활하신 후에 베드로에게 부여하신 말씀이다. 그때 베드로는 정신이 없는 상황이었다.

베드로는 지금 예수님을 반갑게 맞이하긴 하였지만 예수님을 볼 낯(면목)이 없었다.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이 다가오자 제자들은 다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질, 줄행랑을 치고 말았다(마 26:56). 그래도 베드로는 그나마 나았다. 멀찍이 예수님의 결말을 보려고(마 26:57) 따라갔던 것이다. 그러나 그는 끝내 예수님을 거부했다. 그러나 그는 그 전에 예수님 앞에 머라고 했는가?

 

 

(31)때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오늘 밤에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 기록된바 내가 목자를 치리니 양의 떼가 흩어지리라 하였느니라(32)그러나 내가 살아난 후에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리라(33)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다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언제든지 버리지 않겠나이다(34)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밤 닭 울기 전에 네가 세번 나를 부인하리라(35)베드로가 가로되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 하고 모든 제자도 이와 같이 말하니라 [마 26:31-마 26:35]

베드로는 이렇게 엄포성의 발언을 했지만 그는 결국 예수님을 배신하고 말았다.

 

 

 

 

① 한 여종의 말: “너도 갈릴리 사람 예수와 함께 있었도다”----> 모든 사람 앞에서 부인하여 ‘나는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지 못하겠노라’
② 다른 여종의 말: “이 사람은 나사렛 예수와 함께 있었도다”--->맹세하고 또 부인하여 ‘나는 그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점점 베드로의 부인의 강도는 더해지고 있다. 모든 사람 앞에서 부인하것도 대단한데, 이제는 맹세까지 하면서 부인하고 있다. 인간의 나약함이 절로 드러나는 대목이다)
③ 곁에 섰던 사람들: “너도 진실로 그 도당이라 네 말소리가 너를 표명한다”--->저주하여 맹세하여 ‘나는 그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

 

  성경 상에 가장 많은 실수를 한 사람 Top 10, Best 10을 꽂으라면 베드로가 단연 들어갈 정도로 베드로는 우리에게 많은 결점과 핸디캡을 노출시켰다. 그래서 더 많은 성도들에게 베드로는 친근한 인물로 다가오는 지도 모른다. 그런 실수와 배신의 경력을 가진 베드로! 그의 이력서에는 언제나 예수님의 제자라는 타이틀이 붙겠지만 그 밑에는 희미하게 배신자라는 낙인이 찍혀 있는 것이다. 그것이 비록 사람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다 할지라도 베드로의 양심, 마음에 만큼 깊숙이 박혀 있는 것이다. 하지만 주님께서는 베드로에게 베드로가 처음 예수님으로부터 제자로 부르심을 받았던 그 장소에서 부활 후에 낙심하고 패배자의 삶을 사는 그에게 다시 요 21장에서는 만나주신다. 그리고 그 장소에서 다시금 새로운 사명을 부여하시는 예수님이시다!

 

  사랑하는 교사 여러분, 리더 여러분, 직분자, 성도 여러분!

  우리가 다시 일어서는 자리는 성공과 화려함과 탁월함과 번성함의 자리가 아니라 바로 실패의 자리라는 것을 명심하라! 베드로가 다시 사명을 부여받은 자리가 바로 실패의 자리였습니다.,

 

  교사 여러분, 축구 경기로 치면 교사 여러분은 이제 전반전을 뛰고, 후반전을 뛰기 위해 지금 7,8월의 수련회, 성경학교, 휴가 등의 하프타임입니다. 지금 이 하프타임에 여러분을 다시 일으켜 세우십시오. 전반전은 죽을 쑤었지만, 그래도 후반전이 남아 있습니다. 전반전에는 농땡이를 쳤지만, 성실하지 못했지만, 다시금 마음을 다잡고 후반전을 잘 하면 됩니다. 기억하십시오. 우리가 다시 일어나야 하는 자리는 실패의 자리입니다. 전반전을 열심히 최선을 다했습니까? 후반전도 더 열심히 뛰시길 소망합니다. 여러분의 최선을 하나님께서 최고로 준비해주실 것입니다.

 

‘내가 쓰러진 그 곳에서 주는 나를 강하게 하네’

  주님께서는 그 베드로에게 메시지를 주셨습니다. 희망없는 베드로에게 희망을 주셨다. 네가 다시 할 수 있다는 말씀을 주셨습니다.

 

내 어린 양을 먹이라

내 어린양을 치라

내 어린양을 먹이라

하나님의 양무리를 치라!

 그것이 베드로를 향한 메시지였고 그 메시지는 이제 후배 장로들에게 울려 퍼지고 있다. 양 무리를 치라! 하나님의 양을 치라!

 

 

 

양에겐 세 가지의 특징이 인간의 실존과 닮았습니다.

첫 번째로, 양은 방향감각이 없습니다. 양은 가만히 놔두면 저절로 길을 잃는 내츄럴 길치, 길치본색입니다. 필연적으로 멸망의 길로, 필연적으로 절망의 구덩이에, 필연적으로 가시덤불에 들어가는 것이 바로 양입니다. 방향 감각이 없어서 절대로 혼자서는 푸른 초장과 쉴만한 물가를 찾아낼 수 없습니다.

  양에게는 교사보다 목자가 필요합니다. 교사가 양에게 길을 안내해주며 가르친다고 해도 아무 도움이 되지 못합니다. 가르침만으로 사람이 변하지 않습니다. 교사 여러분, 목자가 되지 않으시겠습니까?

 

 두 번째로, 양은 더러움을 잘 탑니다. 양은 혼자서는 절대 깨끗해질 수 없는 존재입니다. 인간은 죄로 인해 더럽혀진 존재입니다. 스스로 절대 깨끗해질 수 없습니다. 교사가 더러워지지 말라고 해도 양은 자신을 깨끗하게 할 수 없습니다. 누군가가 당겨줘야 합니다. 그런데 목자는 잘 닦아줍니다. 더러워진 양을 나무라는 것이 아니라 깨끗하게 씻겨 줍니다.

 

  세 번째로, 양은 자신을 보호할 수 있는 어떤 장비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동물은 자신을 보호하기 휘애 날카로운 이빨, 뿔, 독 등을 가지고 있습니다. 연약한 동물도 자신을 보호할 보호색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양은 자신을 보호할 만한 어떤 것도 갖고 있지 않습니다. 교사가 양에게 스스로 자신을 잘 지키라고 해도 양에겐 도움이 되지 못합니다. 양을 지켜줘야 합니다. 목자가 사자와 곰의 발톱에서 양을 지키듯이 지켜야 합니다. 그런데 일주일간 양에게 문자 한 번, 카톡 한 번, 전화 한 번 하지 못한 채 주일을 맞이하는 교사가 많습니다. 이런 양의 특징으로 인해 양은 목자를 만나지 못하면 불행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인들을 향하여 자기가 어떻게 그들을 섬겼는지를 두 가지로 표현하고 있다. ‘유모’와 ‘아비’이다(살전 2:7,11).

 

2:7 우리는 그리스도의 사도로서 마땅히 권위를 주장할 수 있으나 도리어 너희 가운데서 유순한 자가 되어 유모가 자기 자녀를 기름과 같이 하였으니

 

2:11 너희도 아는 바와 같이 우리가 너희 각 사람에게 아버지가 자기 자녀에게 하듯 권면하고 위로하고 경계하노니

 

 

여러분, 유모가 어떻게 아이를 기르는가? 엄마보다는 덜하지만 그래도 최선을 다해서 귀찮더라도 더 신경쓰면서 엄마의 마음을 아이를 돌보는 것이 유모이다.

  아비는 어떤가? 제가 아버지가 되어보니깐 하나님의 마음이 이런 마음이겠구나 하는 생각이 조금 들었다. 아버지가 아들을 향해, 자식을 향해 바라보는 그 무엇, 그 뿌듯함, 그 설레는 감정과 감흥을 무엇과 바꿀 수 있겠는가? 그 아버지가 아이를 돌보는 마음!

 

 

 한 기자가 마더 테레사(Mother Teresa)수녀님에게 물었습니다.

 

“어떻게 그렇게 많은 사람을 사랑으로 변화시킬 수 있었습니까?”

“글쎄요. 나는 단지 한번에 한 사람을 사랑했을 뿐입니다.”

 

 

마더 테레사도 아마 유모처럼, 아비처럼 사람들을 사랑하지 않았을까 합니다.

 

  사랑하는 교사 여러분! 부모님 여러분! 직분자 여러분!

  우리는 얼마나 섬세하게, 유순1)하게(바울의 표현대로:) 영혼들을 돌아보며 양을 치는가? 한 사람을 사랑하더라도 깊게, 단번에, 한번에 한 사람을 진정성을 가지고 사랑하시길 소원합니다.

 

 

  영국의 설교의 황태자인, 찰스 스펄젼은 설교만 잘 한 것이 아니라 얼마나 영혼을 뜨겁게 사랑했는지 그의 삶을 조망해보면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얼마나 영혼을 뜨겁게 사랑하였는가!!!

일주일에 쓴 500통의 편지나-그의 펜의 잉크는 마를 날이 없었다고 한다- 31명의 사람과의 계속적인 상담과 심방, 당시에 음향시설도 없었는데 마이크도 없이 23,654명-그 당시 최대로 모인 수치-이 둘러싼 공간에서 한 사람의 육성으로 설교했다는 것은 그의 목소리와 열정이 어느 정도인지, 그 설교 후에 그는 기력이 쇠하여 사흘 동안 일어나지 못했다는 일화는 우리의 가슴에 도전을 준다.

 그렇다고 저희 교역자들에게 찰스 스펄젼처럼 각 개인별로 편지를 왜 써주질 않느냐?고 이 설교가 끝난 후에 따지시면 곤란합니다. 지금 시대와 그 시대 사이에는 분명한 차이와 시대적인 격차가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정말 중요한 것은 찰스 스펄젼의 ‘영혼을 사랑하는 열정’입니다. 그 설교 황태자를 우리가 따라갈 순 없지만, ‘열정’만큼은 우리가 가져갔음 합니다. 저도 전에 사역을 하면서 부서애들에게, 일주일동안 편지를 한 번은 한 50통 정도 적은 적이 있습니다. 근데 진짜 손가락이 부서지는 줄 알았습니다. 그렇게 편지를 쓸 때, 아내가 질투의 화살을 보내면서 화를 냈습니다. ‘자기한테는 편지도 안 적어주면서 대학생들한테 무슨 편지를 그렇게 적어 주냐고?, 평소에 잘하라구’. 질투 비슷한 핀잔을 들었습니다. 스펄젼의 열정만이 그걸 가능케 했을 것입니다.

 

 

 

 

 강단에서는 거침없는 메신저였지만, 일상가운데서는 한없이 유순하게 영혼들을 돌아보았던, 성도들을 케어하였던 설교의 황태자였다. 목자였습니다. 유모와 같이, 아비와 같이 성도들을 돌아보았던 신실한 목자였습니다.

  교사 여러분, 양들을 목자와 같이, 유모와 아비와 같이 돌아보시길 바랍니다.

 

마태복음 9:36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시니 이는 그들이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기진함이라

 

  목자이신 예수님께서 무리를 보셨는데, 그 무리의 상태는 ‘고생하며 기진하고 있었다’라고 합니다. ‘고생’은 추운 겨울에 나무껍질이 완전히 벗겨진 나무나 고기나 동강이 나서 잘려진 상태를 의미합니다. 정육점에 걸린 고기처럼 어떤 회생이 기미도, 어떤 희망도 없이 생명력이 완전히 끊어져 동강이 난 상태를 말합니다.

기진함 = 유리함

 이런 목자 없는 양을 향해 예수님께서 불쌍히 여기신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불쌍히’는 헬라어로 ‘스플랑크니조마이’라는 단어로 ‘몸 안의 내장’이란 뜻입니다.

 

‘몸 안의 내장’

 

내장이 뒤틀려 아무리 약을 먹어도 데굴데굴 구르는 듯한 느낌! 세상이 무너져도 까딱하지 않으시는 주님, 풍랑 이는 바다에서도 잠을 청하시던 그 주님께서 영혼들을 바라보시면서 내장이 뒤틀리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의 마음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구약에서 비슷한 단어는 히브리어로 ‘라카밈’이 있습니다. ‘긍휼’이라는 뜻인데, 원래 의미는 ‘여인의 자궁’을 뜻합니다. 긍휼은 여인이 출산할 때 자궁이 흔들리는 고통을 느낀다는 의미입니다. 주님이 그런 견디기 힘든 고통을 느끼고 계십니다.

 

  제가 대학부와 청년부를 맡으면서 생각하지 못한 애들의 상처와 형편을 들으면서 참 가슴이 아플 때가 있습니다. 기도제목 리스트를 넘기다가 거기서 더 이상 넘어가질 않습니다. 그 느낌이 주님의 스플랑크니조마이의 1/100정도 안되겠습니까?

 

 저는, 아니 우리 청년.대학부는 교회가 있는 이 동네가 하나님의 부흥의 땅이 되도록 기도하고 있습니다. 우리교회가 물댄 동산과 같은 수원지가 되도록 그렇게 기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노아의 방주와 같은 교회가 서 있는 이 땅이 잘 되게 해달라고 기도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단순히 대형마트가 들어서고, 백화점이 들어서고, 아파트단지가 들어서는 그런 유형의 발전보다 먼저 하나님의 복이 이 교회주변이 잘 되어야 하지 않겠나 저는 그런 생각을 해봅니다. 교회가 서 있음으로 해서 그 동네가 하나님의 복을 받는 것은 당연한 현상이기에 저는 그렇게 기도하면서 확신하고 있습니다.

  

  교사 여러분!

  잘 가르치는 교사, 아이들을 마음을 얻어, 그들을 변화시키는 목자의 심정을 가진 교사에게는 내장이 뒤틀리는 고통이 있습니다. 그 고통으로 하나님께 나아갈 때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여러분의 양떼를 위로해주실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아이들을 우리의 일과 직업과 분주한 일들로 인해 돌아보지 못한 부분이 있다면 주님 앞에 회개하자. 우리의 시간, 물질, 열정, 에너지가 어디로 향해 가 있는가? 세상 사람들과 똑같은 곳에 우선순위를 두고 살고 있진 않는가?

  

  양무리를 치는 것, 목양은 사람들을 돌아보고 그들의 성장과 성숙을 도모하는 것이다. 우리가 아기를 육적으로 키우듯이, 사람들을 영적으로 키워가는 것이 바로 목양이며 양을 치는 것이다. 양무리를 치는 자의 자세에 대해서 베드로는 말하는 데 자원함volunteership을 무엇보다도 앞세우고 있다.

 

 

 

   양무리를 치는 것에 있어서도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자원함, 기꺼이 함이다! 직업정신이 투철한 것은 물론 좋은 것이지만 하나님의 양 무리를 칠 때 직업의식에 의해서나 아니면 삯군처럼 행동해선 아니 된다. 삯군은 본문에서처럼‘억지로 하며, 더러운 이를 위하여 탐하는’자이기 때문이다. 봉급 받는 사람들이나 알바생들은 솔직히 꾼처럼 행동할 때가 있다. 그들의 일은 자기의 일이 아니라 주인의 일이기 때문에 자기 것으로 생각하지 않고 일을 한다는 말씀입니다.

  삯군으로 알바생처럼 일합니다.

  최선을 다하기보다, 임시적인 목적을 위해 잠시 일합니다.

  영혼사역에 있어 더러운 이득이 앞서면, 돈이나 물질이 먼저 앞서게 되면 ‘타락’하게 됩니다.

 

  여러분들은 어떤가? (저도 젊을 때 보다는 순수함이 많이 없어졌다. 속된 말로 ‘저도 많이 타락했다!’) 우리의 섬김과 직분을 감당하는 것이 돈으로 환산할 수 있는가? 만약 그렇게 된다면 그 가치가 얼마일까? 돈으로 환산하는 것이 오히려 더 비참하진 않을까? 하나님께서 만약 우리의 섬김과 가르침과 양육을 돈을 환산하기 위해서 돈다발을 들고서 ‘얼마주까이?’라고 할 때, 오히려 우리는 그렇게 하시려는 하나님을 말려야 하지 않겠는가? 우리가 더 비참해진다, 그렇지 않은가?

 그렇다. 우리에게 자원하는 심령이 없으면 그렇게 비참한 몰골로 변해가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베드로가 이야기하는 것은 바로 ‘자원하는 마음’, ‘본이 되는 마음’이다. 돈 받기 위해 일하는 사람처럼 그렇게 살지 말라는 것이다. 그러할 때 4절의 영광이 선물로 주어진다고 말한다. 장로는 이 시대에 리더들이다. 장로는 교회의 지도자이며, 공동체의 리더, 탑리더들이다. 양무리의 본이 되라! 제자들의, 학생들의 본이 되시길 소망한다.

 

 4절: 그리하면 목자장이 나타나실 때에 시들지 아니하는 영광의 관을 얻으리라

 

  영광의 관이 선물로 주어진다고 말합니다. 장로는 이 시대에 리더들입니다. 장로는 교회의 지도자이며, 공동체의 리더, 탑리더들입니다. 교육부서의 선두주자로서 서 계신 교사 여러분, 양무리의 본이 되십시오. 여러분의 아이들은 여러분을 보고 배웁니다. 아이들은 가르침보다 여러분의 삶을 보고 더 많은 것을 배웁니다. 입으로 가르치는 것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여러분의 삶에서 나오는 내용물입니다. 부디, 제자들의, 학생들의 본이 되시길 소망합니다.

 

 

 

  그렇다면, 목자장은 누구? 양 떼의 수가 많고 목자들의 수가 많게 되면 다른 목자들을 관리하고 인도하는 책임을 맡을 목자장이 필요했다. 목자장은 자신의 뜻대로 목자들을 선택하고 지도하면서 절대적인 지배권을 행사한다. 바로는 요셉에게 요셉의 형들과 식구들 중에서 가장 능한 사람들을 골라 가축들을 돌보는 ‘주관자’로 삼으라고 말했다(창 47:6).

 

  오늘날 기독교 성직자들, 동역자들은 목자들이다. 그러나 그들 모두를 지휘하는 목자장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예수님을 그들을 감독하시고, 그들을 돌보시고, 그들의 사역에 대해 보상하거나 벌을 주기도 하신다.2) 목자장이신 주님께서 다시 오셔서 우리에게 시들지 않는 면류관, 영광의 관을 주실 것이다.

  

 

 

  교회는 사람을 길러야 합니다

  어느 코미디언이 “내가 일주일만 젊었어도...”라고 우스갯소리를 할 때, 김동호 목사님은 “일주일만 늙었으면...”이라고 진심어린 말을 했습니다. 왜냐하면 자신이 꿈꿨던 비전이 어떻게 성취되는지, 자기의 목표가 어떻게 만들어져 가는지 더 빨리 보고 싶은 마음 때문에 ‘일주일만이라도 더 빨리 늙었음 좋겠다’고 고백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교사 여러분,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여러분이 돌보는 양떼들, 여러분이 담당하고 있는 영혼들이 장차 어떤 인물로, 어떤 영적 거목으로 자랄지, 그래서 ‘내가 일주일만 더 늙었음 좋겠다’고 고백하는 비전메이커가 되었음 좋겠습니다.

  알렉산더 대왕은 어릴 적 세계적인 스승을 만났기에, 그는 B.C 333년에 이수스전투를 시작으로 마케도니아 왕국을 건설하며 세계를 제패할 수 있습니다. 그에겐 서양사의 기둥,서양철학의 기둥이라고도 할 수 있는 아리스토텔레스가 바로 그의 스승이었습니다.3) 위대한 신앙인은 위대한 시스템이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위대한 스승으로부터 출발합니다!

  교사들이여, 여러분이 바로 이 다음세대의 영적 멘토, 영적 리더, 영적인 아리스토텔레스인 목자가 되시길 소원합니다.

  학생들이여, 이 교회에서 여러분의 영적인 멘토, 영적인 아리스토텔레스를 만나십시오!

  

 

 

  교사들이여, 양을 치고, 양 무리를 본이 되는 이 목적으로 하나되길 소원합니다. 하나님의 사람으로 다음 세대를 세우는 이 목적에 우리가 하나되어 함께 나아갔음 합니다.

 

  지금보다 5년, 10년, 20년 후에 더 좋아지는 교회가 되는 것, 그것이 바로 우리 교회의 비전이라고 확신합니다. 여러분 모두가 이러한 비전의 사람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1) 성질(性質)이 부드럽고 온순(溫純)함. 공손(恭遜)함

2) BIG 굿모닝성경-신약, 382.

3) 알렉산드로스는 13살 때부터 약 3년간 철학자 아리스토테레스에게 배우면서 그리스 문화의 세례를 받았다. 마케도니아는 혈통상 그리스에 속하면서도 문화나 기풍 면에서는 그리스와 차이가 있었고, 그리스인들은 마케도니아인들을 멸시하곤 했다. 알렉산드로스가 예술가, 지리학자, 측량기사, 수로학자, 동식물학자 등을 원정길에 데리고 간 것도 스승의 영향으로 볼 수 있다. 원정길에서 수집한 자료가 스승에게 전해졌음은 물론이다(네이버캐스트).

 

 

 

베드로전서 5장 1-11절의 본문을 기초하여 '목적의 하나됨-하나님의 양무리를 치라'라는 주제로 교사헌신예배에 설교한 내용을 포스팅했는데요. 변화가 가장 필요한 교회, 사람이 얻는 일이 제일 어렵긴 하지만 교회가 이 사람을 키우는 일에 올인해야한다는 이야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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