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성경 유다서 1장 1절의 본문을 가지고 예수님의 형제였던 유다의 이야기를 하면서 '유다의 자기 소개서'라는 주제로 설교한 내용을 포스팅하고자 합니다.
본서는 당시 편지 쓰는 관례에 따라 문안 인사로 시작한다. 당시 편지 예법은 첫째, 편지를 보내는 발신인의 이름과 신분, 둘째, 편지를 받는 수신인의 이름 그리고 문안 인사가 뒤따랐다.
예수 그리스도의 종...종이란 헬라어 doulos로 노예를 뜻했다. 구약에서는 종이란 타이틀이 아브라함(창26:24), 모세(수1:2), 다윗(시78:70)과 같은 이들에게 붙여진 영예로운 칭호로 쓰였으나, 여기서 종이란 말은 전적 헌신을 표시한다. 즉, 주인의 수하에 놓인 자를 뜻한다. 유다는 권위를 나타내는 사도란 칭호를 쓰지 않고 도리어 자신을 그리스도의 권위 아래 놓인 종으로 부르고 있다.
야고보의 형제...이 편지의 저자는 자신을 야고보의 형제, 유다라고 자신의 신분을 밝히고 있다. 이러한 소개는 특이한 표현으로 보통 누구의 아들로 소개하는 경우는 많았지만, 누구의 형제라고 소개하는 경우는 드물었다. 아마도 자신의 이름보다 야고보의 이름이 더 잘 알려졌기 때문에 그렇게 소개한 것 같다. 그렇다면 야고보는 예루살렘교회 지도자로 예수님의 동생(갈 1:19)으로 보여진다. 따라서 이 편지의 저자 유다는 예수님의 다른 동생으로 야고보와 마찬가지로 예수께서 부활하신 후에 신자가 되었다(행 1:14). 처음에는 예수를 그리스도로 보지 않았다. 하지만, 유다는 혈연과 지연에 얽매이지 않았다.예/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종 야고보(약 1:1)
은혜를 알고, 은혜를 받은, 은혜를 갈구하는 자는 인간적인 정. 혈연. 지연. 학연. 지식에 얽매이지 않는다. 연연하지 않는다. 그것은 얄팍한 말 그대로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상술일 뿐이다. 은혜를 아는 사람, 하나님의 사랑에 깊숙이 들어가 있는 사람은 하나님안에서 모든 문제와 고민을 풀어헤친다. ‘하나님 안에서’ 자신의 자리매김을, 자신의 삶을 영위해 나간다. 야고보와 유다를 보라!
인류 역사상 가장 고귀한 그리스도, 가장 탁월한 성인 예수 그리스도의 육신의 형제였다. 어릴적부터 30세까지 그리스도를 육적으로 보고 만지고 듣고 느낀 그들이었다. 그러나, 그런 인간애, 휴머니티, 정, 사사로운 감정에 얽매이지 않았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는가? 제자훈련 중 제자들의 어머니들은 자식을 그리스가 무언가 왕위를 확보할 때 한 자리 내달라고 한 장면을 기억하는가? 예수님 시대에도 치맛바람은 있었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가 섬김을 위해 오신 것을 알았기에-물론 부활 후지만- 또한 그 옛날 주님께서 인간적인 기대(치맛바람)을 극도로 싫어하셨기에 주님의 의도는 세상을 위해 죽는 십자가의 섬김이었지, 정치적으로, 권력 명예욕으로 한 자리를 하는 그런 차원의 ‘부림’이 아니었다.(↔섬김)
더 나아가 두 형제는 무엇보다 하나님의 은혜. 사랑의 깊이, 넓이, 길이, 높이를 체험한 자들이었다. 그들은 진정한 인류의 구세주. 주 이신 십자가의 그리스도를 보았다. 목격자요, 증인이었다. 그리스도의 종이었다. 그러기에 여기서 ‘그리스도의 형제’라고 할 수 있었다. 말 그대로 유다는 친형제다. 그러나 그는 육안에 갇히지 않게 되었다. 왜 그러한가? 부활의 첫 열매되신 그리스도를 보았기 때문이다.
믿음은 이처럼 모든 인간적인 것들을 초월하였다.
그리스도는 모든 인간적인 구속을 초월하였다.
그리스도는 인류의 모든 편견과 아첨을 뛰어넘었다.
말죽통에서 어떻게 그리스도가 나실수 있단 말인가?
나사렛에서 어떻게 메시야가 날 수 있단 말인가?
갈릴리에서 어떻게 구세주가 날 수 있단 말인가?
야고보와 유다가 생각했을 것이다.
예수 형님이 어떻게 그리스도가 될 수 있는가?
온 몸으로 부대끼며 장난치고, 한 이불 속에서 자라고, 같이 먹고, 뒹굴고, 같이 아버지 요셉의 목공일을 도왔던 형 예수가 어떻게 하나님의 아들 일 수 있는가? 어떻게 그게 가능한가?
수 많은 이적과 기적과 기사, 병고침, 귀신고침, 자연 만물을 다스림, 설교사역을 보여줬지만 유다와 야고보는 불신했다. 믿지 않았다.
그리스도의 부활이 있기까지, 부활 후 성령님이 오시기 전에 그들은 그리스도를 믿지 않았다. 아직까지 예수는 단지 그들의 맏형 일뿐, 좀 특이하고 괴상망측한 큰 형일뿐, 괜히 나서다가 괜히 광대처럼 미친 연기. 쇼. 웅변을 하다가 가장 참옥한 십자가 처형을 당한 비극적인 친형에 불과했다. 그러나 주께서 부활한 장면을 목도한 후, 그드렝게 성령이 임한 후 변하였다. Born again...다시 태어났다. 다시 출생하였다. 그리하여 변하게 되었다.
그리스도의 형제→그리스도의 종,
예수의 형제→그리스도의 노예
그리스도 예수와 유다 자신은 엄청난 갭을 느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아들과 자신은 초라하고 연약한 인간의 아들인 것을 인식했다. 그러기에 소개에서도 자신을 직시한 겸허함, 겸손한 모습을 보여준다. 이런 모습이 바로 ‘은혜를 안 자’. ‘은혜를 체험한. 사모하는 자’의 모습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인류의 모든 편견과 아집을 부순다. 때려 뭉갠다.
인류의 모든 인간적인 것을 초토화시킨다.
세상의 모든 허황된 타락한 물욕적인, 출세지향주의적인 기준들을 전복시킨다.
주님의 십자가는 여러분의 생각. 기대. 바램. 기준. 라이프스타일. 시각. 편견. 단점. 장점. 성격. 가치기준. 지향점 등을 바꾸신다.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 될 때까지...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여러분의 시각을, 여러분의 생각을. 세상적으로 오염된 가치관, 성격, 편견, 말, 언어생활, 우선순위, 사고방식을 변케하신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여러분의 몸짓, 행동, 행위를. 천박하고도 저급한 직장생활에서의 비리, 관계, 습관, 부부간의 사소한 죄악, 자식을 대하는 태도, 교회생활, 직장생활, 학교생활을 갈무리하신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그의 부활은 여러분의 총체적인 죄악된 삶과 관계를 다시 그리스도의 제자로서의 삶과 관계로 탈바꿈시킨다. 그리스도의 종/그리스도의 아들. 딸/자녀
하나님의 아버지/성부→부르심을 입은 여러분!
주 예수 그리스도/성자→하나님 아버지 안에서 사랑을 얻은 여러분!
보혜사 성령 하나님/성령→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지키심을 입은 여러분!
하나님...계획하심 Masterplan
예수님...중재하심 Meditator
성령님...보혜사의 도우심Helping
야고보와 유다를 새롭게 하셨다. 이후로 영원토록 여러분들을 새롭게 하실 것이다. 그 하나님 아버지, 그 예수 그리스도, 그 성령께 간구하라!!!
오늘은 유다서 1장 1절의 본문을 가지고 '유다의 자기 소개서'란 주제로 설교하였던 내용을 포스팅하면서 예수의 친형제였던 그가 어떻게 친형인 예수를 그리스도를 받아들이면서 '그리스도의 종(노예)'로 표현하였는지에 대해 해석해 보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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