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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요한일.이.삼서

요한 일서 1장 1절-4절, 영원한 사귐

by Message.K 2023. 4. 15.

신약성경 요한1서 1장 1-4절의 본문을 토대로 '영원한 사귐'이라는 주제로 과거에 설교한 내용을 포스팅하고자 합니다. 요한일서의 중심은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 그리스도와의 교제라고 하는데요. 이 영원한 사귐에 대한 주제를 한번 볼까요? 

 

요한일서 1장1-4절, 영원한 사귐
요한일서 1장1-4절, 영원한 사귐

 

Prologue...

  요한일서는 그리스도인 독자들에게 보내어진 편지로서 지극히 실천적인 문제를 다루고 있다. 본 서신은 거짓 가르침의 위험성에 대해 경고하고 있다. 또한 신자들이 하나님께 순종하는 삶을 살고 그들의 형제, 자매를 사랑할 것을 권면하고 있다. 그 중심을 이루는 주제는 하나님 아버지 그리고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의 교제이다(1:3). 요한일서의 중심은 바로 하나님과의 영원한 사귐, 그 사귐을 바탕으로 한 형제, 자매간의 영원한 사귐에 대한 것이다. 저는 요한일서를 같이 나누면서 우리 안에 하나님과 예수님과 성령님으로 인한 성도들 간의 교제가 더욱 풍성하여지기를 소망한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어떤 사귐을 가지고 있는가?

  여러분은 지금 누구를 사귀고 있는가? -선한 영향력을 주는 사람 VS 백해무익한 사람

  사귀고 싶어 하는, 매력지수가 높은 사람 VS 사귀기를 꺼려하는, 기피하는 블랙리스트? 만나면 만날수록 좋은 사람 VS 이름만 들어도 혀를 내두르는 사람?

  사귐이란 단어: 특별히 남녀 관계, 애정관계를 그리는데 쓰인다. 하지만 이 사귐은 모든 사람들과의 만남과 관계에 사용되기도 한다.

  사귐? 발전적인 사귐인가? 퇴보적인 사귐인가?

  우리 주변을 한 번 돌아볼 필요가 있겠다.

 

  하지만 본문에서의 사귐, 교제는 ‘코이노니아’로서 ‘나누다’란 동사에서 파생된 의미이다. ‘친교’, ‘교제’, 주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도간의 교제나 예수 그리스도를 매개(체)로 한 성도와 하나님 사이의 신령한 교제를 가리킨다.

 

(요일 1:3)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너희에게도 전함은 너희로 우리와 사귐이 있게 하려 함이니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함이라

 

  요한일서의 저자인 요한은 이 편지를 받는 독자들에게 ‘영원한 사귐’이 얼마나 기쁨을 주는 일인지를 일깨우기 위해서 이 편지를 적었다. 그래서 1:4에 보면

(4)우리가 이것을 씀은 우리의 기쁨이 충만케 하려 함이로라

  

하나님 안에서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하는 영원한 사귐이 어떠한 것인지, 그 사귐으로 인한 삶의 감화력이 어떤지를 알게 하기 위해서 이 글을 적었다. 그렇다면?

 

 

 

사도 요한이 요한일서를 쓴 목적은?

다음의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영원한 사귐으로 인해...

  • (요일 1:4)우리가 이것을 씀은 ①우리의 기쁨이 충만케 하려 함이로라
  • (요일 2:1)나의 자녀들아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씀은 ②너희로 죄를 범치 않게 하려 함이라 만일 누가 죄를 범하면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
  • (요일 5:13)내가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믿는 너희에게 이것을 쓴 것은 ③너희로 하여금 너희에게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하려 함이라
  • (13)I write this to you who believe in the Son of God, so that you may know you have eternal life.

 

요한복음의 기록 목적과 대동소이하다.

(요 20:31)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그렇다. 성경의 기록목적이 그러하듯이 이 성경, 이 요한일서는 이 책을 읽고 보고 듣고 느끼는 자들이 영생을 얻기를 바라는 의도이며 목적이다. 영원한 사귐은 고로 영원한 생명을 전제로 한다는 말로 표현할 수도 있겠다.

  더 나아가 요한 일서가 기록될 당시에는 잘못된 이단들이 판을 치고 있을 때였다. 요한은 이러한 잘못된 사상과 이단적인 가르침에 대해 진리를 밝힐 필요가 있었다. 검은색이 얼마나 검은지는, 흰색을 보면 알 수 있다. 백색이 얼마나 밝고 깨끗한지를 알려면 흑색을 보면 알 수 있다. 사도 요한 당시에 유행했던 이단적인 사조, 경향이 있었다.

 

 

 

 

요한일서 쓰일 당시 배경...그 시대 가장 인기 있는, 영향력을 미쳤던 이단(사상)?

(요일 2:22)거짓말 하는 자가 누구뇨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부인하는 자가 아니뇨 아버지와 아들을 부인하는 그가 적그리스도니

 

①영지주의자-가현설: 예수님께서 단지 육체적인 몸을 가진 것처럼 보였을 뿐이란 신념. 예수님의 성육신을 거부하는 무리들이었다. 사도요한은 요한복음에서도 ‘말씀이 육신이 된’ 예수 그리스도를 강력하게 주장하였다.

 

(요 1:14)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이것은 바로 그 당시의 유행했던 이단사상이었던 영지주의(gnosticism)에 대항한 요한의 발언, 그들의 육신은 악하고, 영혼은 선하다는 이원론dualism을 가지고 있었기에 예수님께서 악한 육신의 옷을 입었다는 것을 받아 들일수가 없었던 것이다.

 

 

②케린투스-예수가 단지 인간이었는데, 그가 세례를 받을 때 신적 신분을 가지신 그리스도께서 그에게 내려 왔으며 또한 그가 십자가에 달리기 전에 그를 떠나갔다고 가르쳤다. 예수님의 신성이 임시적임을 강조했다.

이러한 배경을 가지고 있다.

  

 

 

 사도요한은 이러한 이단적이고 잘못된, 적그리스도의 가르침에 대항하여 참된 진리의 말씀을 그리스도인들에게 들려주기를 원했다. 그리스도인은 말 그대로 ‘그리스도의 사람들’이다. 그리스도의 사람들은 ‘그리스도’가 누구인지를 제대로 알아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그리스도인’이 과연 무얼 하는 사람이고 세상에서 어떠한 역할을 하는지도 제대로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사도요한은 「그리스도인들의 ‘그리스도’」가 과연 누구신지에 대해 오늘 본문에서 확실히 말해주고 있다.

 

  사도요한은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한 영원한 사귐의 주인공들은 이단적인 가르침이 팽배한 세상 가운데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를 이야기하기 전에, 본론을 이야기하기 전에, 먼저 서문에 해당하는 1:1-4의 말씀을 적고 있다1).

 

  사도 요한은 이단적인 가르침에 대항하여 그는 그의 별명 ‘우뢰의 아들’처럼 단호하고 명확하게 말하고 있다. 그 사랑의 사도 요한은 예수님의 성육신과 예수님의 그리스도 되심,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에 정면도전하는 무리들에게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신지를 처음 문장으로 드러내고 있다.

 

 

다같이 읽어보자.

 

[요일 1:1-요일 1:2]
(1)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주목하고 우리 손으로 만진 바라
(2)이 생명이 나타내신바 된지라 이 영원한 생명을 우리가 보았고 증거하여 너희에게 전하노니 이는 아버지와 함께 계시다가 우리에게 나타내신바 된 자니라
번역하면
[현대인의성경]요일 1:1
세상이 창조되기 전부터 계신 생명의 말씀이신 그리스도에 대하여 우리는
들었고 우리 눈으로 똑똑히 보았으며 손으로 직접 만져 보았습니다.
[현대인의성경]요일 1:2
이 생명이 세상에 나타나셨습니다. 우리는 영원한 생명이 되시는 그리스도를
직접 보았으므로 그분을 여러분에게 증거하며 전합니다. 그분은 아버지와 함께 계시다가 우리에게 나타나셨습니다.

 

 

  사도 요한은 여기에서 ‘태초부터 있던 생명의 말씀’, 이것을 그리스도에 빗대고 있다. 왜냐하면 그 당시 교회를 위협을 가하고 있는 적그리스도들이 <예수님은 그리스도이시다>는 사실을 부인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요한은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을 말씀으로 표현하였다. 여기서도 요한은 예수님을 ‘생명의 말씀, 그것도 태초부터 있던 생명의 말씀’으로 이야기하고 있다.

 

 

 

  이 문장이 왜 중요한가? 적그리스도인 케린투스의 이론에 따르면 예수님은 세례 받을 때부터 십자가 달리실 때까지 몇 년 동안만 예수가 그리스도이셨다가 다시 평범한 청년으로 돌아왔다는 말을 뒤집어엎는 말이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잠시 이 땅에 깜짝 등장한 분이 아니라 ‘태초부터 있던’, ‘처음부터 있던’ 분이셨음을 강조하고 있다. 우리가 믿는 예수님은 성부, 성자, 성부 하나님의 창조사역에도 관여하신, 말 그대로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이셨다. 이러한 생명의 말씀이 2절엔 ‘나타내신바 되었다’고 말한다. 사도 요한은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을 2절에서는 ‘이 영원한 생명’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그렇다. 이 생명은 태초부터 있던 말씀이었고 시간적으로 제한받지 않는 생명이었다. 생명의 말씀이었다.

 

 

  현대는 ‘건강’에 대해 굉장히 신경을 쓰는 분위기이다. 모두 다 WELL BEING을 추구하는 시대가 되었다. 예전에는 ‘보릿고개’라고 해서 다들 먹고 살기에만 바빴고 입에 풀칠하기만 해도 굉장한 것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삶의 질’을 따지는 웰빙시대가 도래했다. 예전에는 달라붙은 뱃가죽을 늘여 살이 쪄 보이게 하는 시대였다면, 지금은 탱탱하게 부른 뱃살에 탄력과 왕자를 그리기 위해 오히려 다이어트를 하는 시대가 되었다. 이렇게 사람들마다 건강과 웰빙과 더 나은 삶의 질을 추구하고자 노력하지만 모든 인생의 시계는 100년 안에 결판이 난다.

  사람들은 나름대로 ‘생명’에 대해서 신경을 쓰고 생명의 질을 고민하지만 생명의 길이는 언제나 정해져 있다는 것이다. 어쩔 수 없는 노릇이다. 참으로 인생의 한계이기도 하다. 그러한 우리에게 사도요한은 ‘태초부터 있던 생명의 말씀인 영원한 생명’을 이야기하고 있다.

 

 

 

  길가다가 우연찮게 사람의 발에 밟혀 죽는 하찮은 벌레에서부터 고귀한 사람의 생명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은 생명이다. 하지만 그 생명들은 끝이 있다. 하지만 끝이 없는 생명이 있다. 영원부터 영원까지 변치 않는 생명, 그 생명이 나타내신바 되었다(2절). 이것은 바로 예수님의 육신을 입는 사건을 말한다.

  영원한 생명이시오, 말씀이신 예수님을 사도 요한은 직접 체험하였다. 그것도 가까이서 목도하고 그 분의 제자로서 삶을 같이 했던 것이다. 요한은 “우뢰의 아들”(마가복음 3:17)로 알려졌지만, 후에는 “예수께서 사랑하시는 제자”라고 불리게 되었다. 그러기에 그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주목하고 우리 손으로 만진 바라’라고 말할 수 있다. 왜냐하면 요한은 사도였기 때문이다. 사도는 이러한 그리스도의 생애와 십자가 죽음과 부활의 증인이다. 그러기에 그는 2절에서 ‘이 영원한 생명을 우리가 보았고 증거 하여 너희에게 전하노니’라고 말한다.

 

3가지의 동사-보다/, 증거하다/, 전한다--->

 

 

  살인사건이 났다고 하자. 목격자는 그 살인 사건을 목격한 사람이 목격자이다. 법정에서 증인은 바로 그러한 역할을 한다. ‘보지 않으면 증거 할 수 없고, 전할 수 없다’ 사도 요한은 자신이 본 그대로를 여기에서 이야기하고 있다. 자신이 보았던 것, 경험하였던 것을 증거하고 전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그 당시 철학자들이나 적그리스도의 이단아들이 가르치던 그런 헛된 신이나 신념이나 이론이 아니었다. 말 그대로 요한이 ‘들었고 보았고 만졌던 복음’이었다. 그것은 어떤 머리 좋은 사람이 만들어낸 신기루와 같은 이념이나 이론이 아니었다.

실제로 벌어진 역사적인 사건이었다.

                 그리스도는 십자가에서 죽으셨다!

                 그리스도는 죽으시고 3일 만에 부활하셨다!

                

왔노라, 보았노라, 이겼노라(veni, vidi, vici)2)

(세상에) 왔노라! (죽음을 맛)보았노라!

(사망의 권세를) 이겼노라!

 

  예수 그리스도는 태초부터 있던 생명의 말씀이었고 이 생명의 말씀은 영원한 생명! 그리고 ‘이는 아버지와 함께 계시다가 우리에게 나타내신바 된 자(2절)’이시다.

  이 영원한 생명은 우리와 동떨어져 있는 어떤 것이 아니다. 영원한 생명과 우리 인간은 ‘죄’라는 벽으로 말미암아 영원한 괴리, 뭉갤 수 없는 철의 장벽이 세워지게 되었다. 하지만 이것은 영원한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 땅에 오심과 그의 십자가 사역과 부활로 말미암아, 복음으로 말미암아 시간의 한계를 초월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영원한 생명은 우리 안에 ‘사귐’으로(3절) 나타난다. 그 사귐은 이 영원하신 하나님 아버지와 영원한 생명 되신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사귐이라고 저자는 말하고 있다. 요한이 염두에 둔 목표는 너희(독자들)로 우리(즉, 사도들)와 사귐이 있게 하려 함이었다.

 

 

 

  2:12-14을 염두에 볼 때 요한일서를 받는 편지독자들은 진정한 그리스도인이었다. 하지만 그리스도인 되는 것과 ‘사귐’이라는 단어는 똑같은 의미로 해석될 수는 없는 것이다. 이 편지를 받는 사람들은 이미 구원받은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그들이 요한일서를 필요로 하였던 것은 그들이 사도요한이 속해 있던 사도적 집단과 실제적인 친교를 즐기기 위해서였다. 궁극적으로 사도적 사귐은 아버지와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함이다. 이것은 아버지 하나님과 그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바탕으로 한 그리스도인들의 아름다운 교제, 사귐을 말한다. 우리는 우리의 영원한 생명의 젖줄이신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끊임없는 영양분을 공급받아야 할 뿐만 아니라 우리 신앙공동체, 교회 내에서도 이러한 영적 자양분들을 계속적으로 나눔으로써 교제해야 건강한 공동체를 세워갈 수 있다. 영적인 공급과 영적인 수요가 균형 있게 만들어져 가야 교회가 교회다워진다.

 

 

  아마도 적그리스도, 거짓 선생들은 요한일서의 독자들이 영원한 생명을 소유하였다는 사실을 부인하였던 것 같다. 예수님이 영원한 생명이라는 것을 그들은 부인하였다. 그러기에 신자들 또한 죽으면 흙으로 없어져 먼지가 되어버리는 허무한 인생이다. 그러므로 적그리스도의 무리들은 그리스도인이 영생을 소유한 것을 거부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런 것에 대항하여 사도 요한은 태초부터 있던 생명의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 영원한 생명으로 우리에게 나타나신 예수 그리스도! 이에 대한 진리, 참 진리를 이야기하고 수신자들과 함께 교제하기를, 사귐을 가지기를 원한다. 요한의 목표는 그의 독자들에게 그들 신앙의 기본적 진리들을 재확증해 줌으로써 그들이 소유한 하나님과의 사귐을 지속시켜 주려는 것이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여러분에게 영원한 생명으로 오심을 믿는가? 그 영원한 생명은 예수님 혼자서만 소유하신 것이 아니다. 죄로 인해 무너졌던 그 생명, 죄로 인해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었던, 죽음을 가질 수밖에 없는 생명에 영원이란 시간을 더하시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셨다. 그 영원한 생명은 온 민족과 온 인류에게 나눠주시기 위해 주님이 오셨다. 그 영원한 생명은 영원한 사귐을 통해서 말이다. 그것은 마치 겉으로 보기엔 전선은 아무 변화도 없이 있는 듯 하지만 그 전선, 전깃줄 안에는 전류가 흘러 온 인류를 밝히듯이, 우리 안에 역사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영생은 바로 이러한 놀라운 기쁨으로 다가오고 있다. 사도요한은 이러한 기쁨이 충만하기를, 영원한 사귐이 충만하기를 기대하고 말씀을 적고 있다.

 

 

  우리 교회 모든 성도 여러분, 여러분들이 바로 그 영원한 사귐의 주인공이길 소망한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긍휼히 여기시고 불쌍히 여기셔서 돌아보시듯이 우리 또한 성도들을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돌아보아 태초부터 있던 영원한 생명이신 그리스도를 같이 보고 증거하며 나누는 남은 생애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소원한다. 그러할 때 성경기자는 이렇게 고백할 것이다.

 

“내가 내 자녀들이 진리 안에서 행한다 함을 듣는 것보다 더 즐거움이 없도다”

 

-이 마음이 바로 사랑의 사도 요한의 마음이 아니었을까 한다. 우리 교회를 향해 사도 요한의 이러한 칭찬이, 이러한 고백이 있기를 소망한다.

  

 

 


각주

1) 요한일서만큼 구조와 개요를 정하는 것이 어려운 본문도 없다고 성경학자들은 말한다.

2) 이탈리아의 장군 카이사르가 한말이다. 로마 출생으로 로마 공화정 말기때 정치가이며 장군이다.

   소아시아 젤라에서 미트리다테스 대왕의 아들 파르나케스를 격파하고 한 말이다.

 

 

신약성경 요한일서 1장 1-4절의 본문을 토대로 '영원한 사귐'이란 주제로 설교한 내용을 공유했는데요. 당대의 수많은 이단들에 대항한 온전한 기독론을 토대로 그리스도인과 그리스도와의 영원한 교제에 대한 이야기를 중심으로 설교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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