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자료는 바이블렉스에서 찾은 자료 입니다. 참고하세요
xevno"(3581, 크세노스)
낯설은, 외국의, 낯선 사람, 외국인.
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
형용사 크세노스(Homer 이래)는 기본어이며,
(a) 형용사로는 '낯설은' strange, '외국의' foreign,
(b) 명사로는 '낯선 사람' stranger, '외국의' alien를 의미한다.
「참고: (a) 원시 사회에서 낯선 사람은 원래 적으로 보았다. 이는 그가 어떤 사람인지를 잘 알지 못하므로 나쁜 사람으로 인식하였기 때문이다. 상호간의 두려움과 상호간의 저항이 이방인에 대한 태도이자 그의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지닌 태도의 특색이다. 낯선 나그네들은 종종 법의 보호에서 벗어나 있었고, 죽임을 당하거나 주술적 관습의 위협을 받아 내쫓기었다.
후기에 원래 공포에서 발전한 낯선 나그네들과의 관계 유형이 생겨났다. 이 낯선 나그네는 신들이 보낸 사자(messenger)로 생각되었다. 신들에 대한 두려움으로 인하여 나그네들은 도움의 손길과 환대를 받았다. 이리하여 낯선 나그네들은 종교와 법의 보호를 받게 되었다.
(b) 헬라인들에 있어서 낯선 사람이나 외국인은 본래부터 그들의 공동체가 크든 작든 자신들의 공동체에 소속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호머 시대의 낯선 사람과 거지는 제우스(Zeus) 신으로부터 온 것이다(Od., 6, 207 이하). 그러므로 사람들은 그들을 존경심을 가지고 대해야 한다. 헬라인들은 낯선 나그네들이 아무런 권리도 없는 것으로 취급당하거나 헬라 사람들의 마음대로 나그네들을 대할 때, 야만성을 나타내는 표시로 간주하였다. 특히 아테네 사람들은 낯선 나그네들에 대하여 개방적 태도를 보였다(참조: Soph., OC).
그러나 종교면에서는 이방 지역에서 온 물건들의 사용을 보편적으로 회피하였으며, 낯선 나그네들은 헬라인들이 드리는 제사에 참예하는 것이 배제되었다. 스파르타(Sparta)는 주전 600년 이후의 시기에 시행된 엄격한 개혁과 아울러, 그것과 밀접한 연관을 맺었던, 낯선 나그네에 대한 규제의 결과로 낯선 나그네에 대해 특히 적대적이었다. 그렇지 않은 경우에, 낯선 나그네들은 제우스 히케시오스(Zeus hikesios), 즉 간구자들의 보호자인 제우스(Zeus)와 또한 디오스쿠리(Dioscuri)의 보호 하에 있었다. 이방인에게 상해를 입힌 사람은 누구든지 에리네스(Erinyes)의 진노를 받아야 했다. 이와 정반대의 경우도 사실이었다. 신들을 존귀하게 여기는 사람들은 역시 낯선 나그네들을 소중히 여긴다. 그래서 성전과 제단은 거기에로 피난을 원하거나 제사장들의 보호를 구하는 낯선 나그네를 위한 수용소의 역할을 한다. 낯선 나그네를위한 첫번째 수용소는 4세기에 성소의 뜰의 인근에서 생겨났다. 예배자들은 멀리서 두루 찾아왔으며, 그래서 숙식이 제공될 필요가 있었다.」
2. 신약성경의 용법.
형용사 크세노스는 신약성경에서 14회 나오며, 다음과 같이 사용되었다.
(a) 마 25장의 위대한 최후의 심판에 대한 강화에서 외인(나그네)에 대한 환대(마 25:35; 마 25:38; 마 25:43 이하)는 심판의 기준이 되는 친절한 행동들 가운데 포함되어 있다. 그러나 낯선 종교에 대한 두려움이 신약성경에 나타난다. 외인("나그네")들은 이방인들이요 부정한 자들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부정한 장소에 매장된다: "의논한 후 이것으로 토기장이의 밭을 사서 나그네의 묘지를 삼았으니"(마 27:7). 그러나 모든 낯선 자들로부터의 구별이 구약 성경에서만 발견되는 것은 아니다. 사실상 그것은 모든 종교에서 기본적인 것이었다(행 17:18; 참조: 행 17:20: 헬라인들; 그러나 여기서 크세노스는 비난의 뜻을 가지고 있기 보다는 단순히 아덴 사람들의 관심을 나타내는 것 같다.).
(b) 히 13:9, "여러가지 다른 교훈에 끌리지 말라 마음은 은혜로써 굳게 함이 아름답고 식물로써 할 것이 아니니 식물로 말미암아 행한 자는 유익을 얻지 못하였느니라". 우리는 이상한 (다른) 것을 경계해야 한다(기독교와 유대교의 소원함을 나타냄). 하나님과 맺은 언약의 관계가 그들에게만 유효하므로 따라서 자신들과 이방 나라들 사이에 벽을 세우고 외인들을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된 상태에 놓아둔(엡 2:12) 이스라엘 백성들과 대조하여, 이제는 그리스도교로부터 아무도 제외되지 않는다(엡 2:19). 교회 안에는 새로운 백성만이 있으며, 그들은 모두 함께 하나님의 집에 거할 권리를 가지며 "하나님의 권속들"이다. 하나님과 인류 사이의 벽이 제거되리라는 약속을 그리스도 이전의 신자들은 얻지 못했으나(히 11:13), 지금은 이 약속이 성취되었다(히 11:15 이하). 하지만 이 세상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여전히 이방이다(참조: 벧전 4:12). 행 17:21의 크세노스는 대조의 방식으로 중립적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거기서 외국인들이 ... 말하고").
(c) 주목할 것은 위에서 언급한 두 구절, 엡 2:19과 히 11:13에서 크세노스는 "외인"이라는 의미의 다른 동의어(ajnativqhmi, 394와 parepivdhmo", 3927)와 함께 나오며, 따라서 오히려 '손님'으로 번역하는 것이 더 바람직하다. 각 경우에 '외국인 손님, 외인인 손님'(foreign guest)이라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창 23:4 등의 유사한 문맥 참조).
롬 16:23에서만 '친구'라는 의미의 크세노스가 나온다: "나와 온 교회 식주인 가이오도 너희에게 문안하고 이 성의 재무 에라스도와 형제 구아도도 너희에게 문안하느니라".
여기서는 "식주인"(host)을 의미할 수 있다. 가이오는 초기 기독교 선교 사역이 이것 없이는 불가능했을지도 모를 어떤 미덕으로 바울 뿐만 아니라 모든 교회의 다른 그리스도인 여행자들을 대접하였음이 분명하다. 이런 이유에서 롬 16:23이 그 교회의 모임이 가이오집에서 열렸음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보는 것은 타당성이 적다(J. H. Friedrich).
(참조: Walter Bauer; J. H. Thayer; H. Friedrich).
728x90
반응형
'리뷰 및 문서 > 문서'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트레스 이기기 (0) | 2022.02.16 |
---|---|
잠언 8장 36절, 자살 충동의 극복 (0) | 2022.02.16 |
잠언 18장 24절, 좋은 친구 사귀기 (0) | 2022.02.16 |
바울 관계 연표 (0) | 2022.02.06 |
이스라엘 역사 가운데 제사장 사상의 발전 과정 (0) | 2021.10.19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