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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이사야

이사야 6장 1-13절,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by Message.K 2022. 1.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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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DEX


왕의 출현(6:1-2)
선포(6:3-5)
치료: 정화(6:6-7)
왕의 출현(6:8)과 선포(6:9-12)
치료: 정화(6:13)




오늘 본문은 이사야의 소명장면입니다.
학자들 간에 왜 이사야의 소명장면이 6장에서야 등장하는가? 하는 논의가 있어왔습니다. 1장에 소명이 들어가고. 그 다음부터 사역이야기가 나와야 하는 것이 보편적인데, 왜 이사야의 소명이 6장에서야 나오는가 하는 질문입니다. 1-5장까지 하나님의 헌신적인 돌보심이 나타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 돌아오지 않고 죄만 짓는 유다는 완고하고, 고집불통이고, 성난 망아지 같아 보입니다.

 

그런 유다를 생각 하면 하나님께서 왜 6장에서야 이사야에게 이런 소명을 주시는가? 그래서 송병현 교수는 이사야가 이런 소명을 받는 데에 대한 동기부여가 필요하다고 했습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가 사역을 할 때, 다음세대나 기성세대에게 복음을 증거 할 때 대상자들이 복음을 듣지 않고, 거부할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그냥 신사적으로 정중하게 거절하기도 하지만, 때론 욕을 하기도 하고, 심지어는 손찌검을 하기도 할 때가 있습니다.

정말 내가 이렇게까지 푸대접을 받으면서 복음을 전해야 하는가?

내가 이렇게 최선을 다해 사역하고 섬기고 봉사하는데, 사람들이 인정해주지 않고 오히려 사람들의 말과 행동으로 내가 시험을 당할 때 내가 왜 사서 이런 고생을 하는가? 하는 절망감이 몰려올 때가 있습니다.

예수 믿기 전 보다 믿고난 후에가 더 복잡하고 고민스런 생각들이 뭉게구름처럼 다가올 때 내가 왜 여기에 있는가? 라는 자괴감 섟인 고민이 머리를 쳐들 때가 있습니다.

그때 우리가 기억해야 하는 것은 소명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사야를 불러주신 것처럼, 여러분도 하나님께서 부르셨다는 사실입니다.

 

 

로마서 11장 29절에서 바울은 하나님의 은사와 부르심에는 후회하심이 없다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구원을 위해 부르시고, 그 다음 사역을 위해, 소명을 위해 부르셨습니다. 그리고서 하나님은 여러분의 모습을 보면서 한 번도 후회하시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내 너를 떠나지도 않으리라 내 너를 버리지도 않으리라 약속하셨던 주님’이십니다. 삶은 힘들고, 상황은 열악하고, 환경은 우리를 옥죄어오고, 사람들은 여러분을 몰라주지만, 주님의 가슴에 새겨진 여러분의 이름이 있기에, 우리가 이 곳에, 이 복음의 현장에 있는 것을 잊지 마시길 바랍니다. 이사야가 바로 그러했습니다. 소명이 있기에 우리가 당하는 모든 고난과 환난도 넉넉히 이기는 줄 믿습니다.

 

 

 

왕의 출현(6:1-2)

이사야가 환상을 보게 된 시기는 웃시야 왕이 죽던 해였습니다. 웃시야 왕은 세상적으로 굉장한 성공을 구가했습니다. 국제적으로 나라의 위상을 높인 인물입니다. 내부적으로는 국가가 엄청나게 경제적으로 부흥했던 훌륭한 정치인이었습니다. 그는 신앙적으로도 훌륭한 왕이었습니다. 하지만, 그가 많은 축복과 번영을 누리게 되었을 때, 스스로 교만하여져서 자신을 파멸로 몰고 갑니다.

대하 26:16

그가 강성하여지매 그의 마음이 교만하여 악을 행하여 그의 하나님 여호와께 범죄하되 곧 여호와의 성전에 들어가서 향단에 분향하려 한지라

 

웃시아는 결국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문둥병을 앓다가 비참한 죽음을 맞이합니다. 그의 인생은 비참하게 용두사미로 끝이 났습니다. 웃시야의 죄는 제사장의 사역에 자신이 개입한 것입니다. 그로 인해 그는 불쌍하고도 처참하게 문둥병으로 격리되어 있다가 외롭게 죽어갔습니다. 교만은 패망의 선봉입니다. 여러분의 모든 주도권을 하나님께 내어드리시길 바랍니다.

 

웃시야와 같은 오랫동안 안정적인 통치와 번영을 안겨준 위대한 정치인이 죽는다는 것은 온 나라에 큰 불안감을 안겨주었습니다. 백성들이 앞으로 나라가 어떻게 될 것인가 걱정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나같이 혼란스러운 상황 가운데 하나님께서 이사야에게 임했던 하나님의 말씀이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시국이 어렵습니다. 가정경제가 바닥을 치고 있습니다. 자녀들이 고삐풀린 망아지처럼 날뛰고 있습니다. 배우자와 부모님은 내 마음 같지 않습니다. 모든 것들이 어수선한 상황입니다. 이러한 형편 가운데 여러분 곁에서 가장 큰 위로와 확신을 주는 이는 누구이십니까? 유다의 왕이 죽었습니다. 하지만 오늘 본문에 높이 들린 보좌에 앉으신 이가 누구이십니까?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의 모습은 이사야에게 유다의 진짜 왕이 누구인지를 확인시켜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권위를 위임받아 백성을 다스리는 왕이 죽었습니다. 백성들이 극도의 불안과 슬픔을 느끼고 있습니다. 그런 가운데 선지자의 소명은 그들에게 참 왕이시며, 영원하신 왕은 바로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상기시켜줍니다. 이것이 선지자의 모든 불안을 해소시켜 주고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상황과 우리의 형편이 처참하고 외롭고 슬프고 힘들다고 하더라도 우리를 다스리시는 왕이 누구인가? 높이 들린 보좌에 앉으신 우리의 왕, 인생의 왕은 누구인가를 기억하시길 바랍니다.

 

다윗은 고백했습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The Lord is my shepherd. I shall not be in want.

 

높이 들린 보좌에 앉으신 분은 대통령도, 배우자도, 나와 친분이 있는 권력가나 백을 가지신 이가 아니라 바로 주님, 하나님이십니다. 그분이 우리와 영원토록 함께 하시기에 부족함이, 결핍됨이 없는 것입니다. 여호와가 여러분의 목자가 되시기에 그 높이 들린 보좌에 앉으셔서 지금도 세상을 통치하고, 우리 가정을 통치하고, 여러분의 인생을 통치하시기에 위로를 받으시길 바랍니다.

 

 

 

본문에서 하나님께서 입으신 옷이 얼마나 길었던지 그 옷자락이 성전을 가득 채웠다고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가장 화려하고 우아한 왕복을 입으신 왕으로 나타나셨다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최고로 존귀하신 왕이 오셨음을 암시합니다(하나님에게 무슨 옷이 필요하겠습니까마는 사람들은 육안으로 확인해야 믿는 특징이 있기에 친히 이렇게 하나님의 모습이 비쳐지지 않았을까요?). 이사야가 환상을 본 장소가 학자들 사이에 하늘이었다 아니면 성전이었다는 견해로 나눠집니다. 날개를 단 스랍들이 법궤의 뚜껑인 속죄소의 모습을 닮은 것을 고려한다면, 성전으로 보는 것이 더 타당합니다. 하나님이 여러분 우편에 계심을 기억하십시오.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인생의 주인이심을 재점검하시길 바랍니다.

 

 

 

2절에서 6개의 날개를 가진 스랍들이 하나님을 섬기고 있습니다. 6개의 날개중에 두 개는 자기 얼굴을 가렸습니다. 그리고 두 개는 발을 가렸다고 했습니다. 어떤 이들은 발을 ‘성기’라고 표현하기도 합니다. 중요한 것은 스랍들이 6개의 날개 중에서 두 개는 얼굴을, 2개는 신체의 부끄러운 부분을 가렸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얼마나 거룩하신 분이신지 천사들마저도 차마 직접 하나님의 얼굴을 뵐 수 없기에 날개 두 개로 얼굴을 가렸습니다. 날개 여섯 개 중에서 2개만을 하나님을 섬기는 활동에 사용하고 있습니다. 나머지 4개는 자신들의 부끄러운 부분을 가리는데 사용했다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이 얼마나 거룩하신 분이신지. 그 바로 옆에 시중드는 스랍들도 자신의 치부와 부끄러움을 가리는데 날개 4개를 사용했던 것일까요? 영적으로 해석해보자면, 우리는 과연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면서 얼마나 우리의 죄악과 치부를 돌보는데 최선을 다하고 있는가 질문해볼 수 있겠습니다. 스랍들은 6날개 중에 4개를 자신의 연약하고 부끄러운 것에 드렸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풍성한 사역과 놀라운 열매,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성과와 효과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경건하게 살아가는 그 삶을 더 원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6개의 날개로 얼마나 자신을 하나님께 순종하고 회개하고 거룩하게 하는데 사용하고 있습니까? 새가족 축제에 많은 불신자들이 회심하여 돌아오는 것도 중요합니다.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우리가 이 축제의 비전에 순종하면서, 불신자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가운데, 우리가 얼마나 초라하고 볼품없고 허물과 죄를 죽어 마땅한 존재인지를 더 깊이 돌아보는 거룩하고 경건한 다듬질하는 시간이 되기를 소원합니다.

 

 

 

 

선포(6:3-5)

스랍들이 입을 떼자마자 그들이 이야기한 말은 바로 ‘거룩하다’를 세 번 반복하는 것이었습니다. 스랍들의 날개들도 그것을 대변해주지만, 그들의 입술은 더 하나님의 거룩하심, 깨끗하심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천사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무엇이라고 부르고 있습니까?

 

‘만군의 여호와여 그의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

 

라고 선포합니다. 만군의 여호와라는 성호는 하나님이 전쟁에 능숙하심을 강조하는 말입니다. 그 누구도, 그 어떤 인물도, 그 어떤 군대도 하나님을 대적할 수 없다는 말을 상징하는 말입니다. 여호와가 이스라엘 뿐만 아니라 온 열방의 주님이심을 선포하는 의미입니다. 그 만군의 여호와의 영광이 가득 찼습니다. 1-4절에서 세 차례나 채운다란 말이 나옵니다.

 

-옷자락이 성전을 가득 채웠고,

-하나님의 영광이 온 땅을 가득 채웠고,

-거룩한 연기가 성전을 가득 채웠다고 합니다.

 

그러나 2장에서 유다와 유다 사람들을 가득 채운 것은 바로 그들의 죄악이었습니다. 만군의 여호와의 영광의 가득참과 대조적인 인간의 죄악의 실상을 보여줍니다.

 

4절에 ...터가 요동하며 성전에 연기가 충만했다는 것은 시내 산의 임재를 상기시켜줍니다(출 19장)

16절.셋째 날 아침에 우레와 번개와 빽빽한 구름이 산 위에 있고 나팔 소리가 매우 크게 들리니 진중에 있는 모든 백성이 다 떨더라

17.모세가 하나님을 맞으려고 백성을 거느리고 진에서 나오매 그들이 산 기슭에 서 있는데

18.시내 산에 연기가 자욱하니 여호와께서 불 가운데서 거기 강림하심이라 그 연기가 옹기 가마 연기 같이 떠오르고 온 산이 크게 진동하며

19.나팔 소리가 점점 커질 때에 모세가 말한즉 하나님이 음성으로 대답하시더라

 

 

성도 여러분, 우리가 믿는 하나님의 이름이 무엇이라고 스랍들은 이야기합니까? ‘만군의 여호와’입니다. 기도원에서 누군가 기도했다고 합니다. 기도제목은 없고, 시종일관 ‘만군의 여호와여’라고만 연거푸 외쳤다고 합니다. 아무것도 구체적으로 구하지는 않았지만, 그 이름에 능력이 있어 그분의 기도가 다 응답되었다고 합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만군의 여호와이십니다. 대적할 자 없고, 두려울 것이 없고, 당해낼 자 없는 영원한 승리자이신 하나님의 이름이십니다.

우리는 무엇을 두려워하고 있습니까? 우리는 무엇을 염려하고 절망하고 아파하고 있습니까? 만군의 여호와의 능력을 더욱 의지하시길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한번 능력을 발하시면, 한번만 터치하시면 우리의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것입니다. 지금은 우리가 그분을 잠잠히 바라면서 기다려야 하는 것입니다. 참고 인내하며 기다리는 것입니다. 만군의 여호와의 능력을 믿고 의지하시길 바랍니다. 필요 없고 쓸데없고 허무한 인생을 의지하지 말고 만군의 여호와를 더욱 신뢰하시길 바랍니다.

 

 

 

그때에 5절에서 이사야는 하나님을 대면하게 된 반응을 보여줍니다.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나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주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

 

라고 고백합니다.

 

 

하나님을 처음 만나는 사람들은 모두 다 제일 먼저 자신의 죄를 돌아보게 됩니다. 그 죄 때문에 망하게 된 인생의 현실을 보게 됩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여러분의 죄로 말미암아 죽을 수밖에 없었던 영적 현실을 인정하십니까? 하나님을 만난 사람들은 모두 다가 자신의 죄의 삯이 영원한 사망이며, 지옥의 심판이 자신의 영원한 보금자리인 것을 시인했습니다. 하나님은 거룩하신 분이십니다. 그 분 앞에 우리의 모든 죄는 마땅히 토해내져야 하며, 우리가 복음전할 대상자들의 무수한 죄도 거룩하신 만군의 여호와 앞에서 치료해야 할 치부임을 기억하시길 바랍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마가복음 2:17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여러분 주위에 있는 수많은 죄인들과 병든 자들은 의사가 필요합니다. 그리스도가 필요합니다. 생명되신 주님, 만군의 여호와가 필요합니다. 여러분 주위의 사람들에게 죄가 얼마나 많은 것에 집중하는 것이 아니라 만군의 여호와의 능력에 집중하시길 바랍니다.

만군의 여호와 앞에서 자신이 죄인임을 고백하고 굴복하는 자만이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받을 수 있습니다. 여러분에게 하나님을 만난 흔적이 있습니까? 여러분은 그리스도와 함께 죽은 자인 것을 기억하십시오! 죄와 함께 그리스도와 십자가에 못박혀 죽은 인생임을 기억하고 감사하십시오!

 

 

 

 

치료: 정화(6:6-7)

이사야가 자신은 죄로 인해 죽게 되었다고 고백합니다. 그리고서 좌절합니다. 스랍들이 불로 선지자의 입술을 지집니다(6절). 이 불은 제단에서 가져온 것입니다. 그 불은 인간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불을 의미합니다. 선지자의 입술을 지지는 것은 그가 선지자의 사역을 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그의 입술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데 부족함이 없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그렇다면 왜 유독 입술을 성화시켰을까요? 입은 말씀을 전하는데 가장 필요한 도구입니다. 동시에 가장 쉽게 죄를 지을 수 있는 기관입니다. 만일 우리가 말의 실수가 없다면, 죄의 상당부분이 해결될 것입니다. 그 불이 입술을 지짐으로 인해 선지자의 죄가 사해졌습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이 복음을 증거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입술을 지져주시는 역사가 있기를 원합니다. 한 입으로 저주와 찬송을 자주 일삼는 우리의 부정한 입술, 더러운 입술, 남말 하기를 좋아하고 가십거리를 만들거나 다른 이들의 가슴에 상처를 내는 것을 너무나 밥먹듯이 잘 하는 우리의 더러운 입술의 죄악을 제하여 주시옵소서! 그리고 이제 나로 입을 벌려 복음의 비밀을 담대히 알리게 하옵소서 기도하는 우리가 되길 소원합니다. 복음을 전하기 전에 여러분의 죄가 정결하게 제하여지는 역사를 경험하시길 바랍니다.

 

 

 

 

왕의 출현(6:8)과 선포(6:9-12)

이사야는 감격했습니다. 용서의 은혜, 사죄의 은총을 경험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누구를 보낼까?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까?”

 

그러자 이사야가 고백합니다.

 

내가 여기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대체로 선지자가 하나님께 소명을 받으면 뒤로 물러서기 마련입니다. 모세도 그러했고, 예레미야, 에스겔도 그러했습니다. 하지만 이사야는 적극적으로 나아갑니다. 선지자는 자신의 받은 용서의 은혜와 사랑이 너무나 크기에 그의 백성 모두에게 이러한 하나님의 사랑이 전가되기를 바라는 마음에 그와 같은 반응을 내렸을 것입니다. 이사야는 지금 자신이 성공적으로 유다 백성들을 주께로 인도할 자신감과 용기가 충만했기 때문에 이러한 말을 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어떤 학자들은 이사야의 사역이 실패했기 때문에 9-12절까지 자신이 합리화하고 있다고까지 합니다. 말씀이 잘못된 것이 아니라 말씀을 받는 사람들의 마음이 완악해져서 그렇다고 말입니다. 9-12절에서는 하나님이 죄인들이 회개하고 돌아올까봐 걱정하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왜 그렇습니까? 1-5장까지 하나님이 이스라엘에 수많은 회개의 기회를 주셨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돌아오지 않았기 때문에 하나님의 거룩한 분노가 여기에 나타나 있는 것입니다.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며,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이 백성의 마음을 둔하게 하며,

-그들의 귀가 막히고, -

그들이 눈이 감기게 하라...그들이 다시 돌아와 고침을 받을까(염려한다)고 하십니다.

11-12절에서는 이사야가 어느때까지입니까라고 했을 때, 여호와 하나님은 심판을 완전히 이룰 때까지라고 하십니다.

전혀 기대하지 못한 소명을 받은 이사야였습니다. 그는 ‘내가 여기 있습니다. 나를 보내어주십시오’라고 했지만, 하나님의 선포된 말씀에 또 다시 이사야는 충격을 받습니다. 언제까지 이런 사역을 해야 합니까? 라고 합니다. 11절에 ‘유다의 모든 주민들이 사라져 없어져버릴 때까지’라고 합니다. (아무도) 없을때까지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의 심판이 계속될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기대했던 이스라엘에 영광이 없고 완전 텅 비어 있는 상태, 하나님의 영광으로 채워지지 않은 이스라엘 땅이 완전히 비게 될 것을 선언하십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 왜 분노하십니까? 하나님께서 분노하시면 다 사라져버릴 것들이 충만하고 가득한 이스라엘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으로 가득찬 이사야의 소명이었지만, 이스라엘은, 그 나라는 지금 죄와 허물로 가득차 있었던 것입니다. 여러분의 삶은 지금 무엇으로 가득차 있습니까? 하나님의 심판이 임하면 없어질 것들로 가득차 있지는 않습니까?

 

 

성도 여러분, 이사야는 나라 백성들이 듣기 싫은 소리만 했습니다. 회개와 심판의 메시지에 이스라엘은 진절머리를 내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사야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했고 소명에 ‘주여 나를 보내소서 내가 여기 있나이다’라고 고백했습니다. 순종했던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하나님의 부르심에 어떻게 반응하고 있습니까? 설사 우리가 복음을 전하는 대상자들이 이사야시대처럼 거부하고 거절하고 하나님의 복음에 전혀 미동도 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그 소명에 반응하시길 소원합니다.

 

 

 

 

치료: 정화(6:13)

하나님은 이사야의 소명의 마지막 장면에서 소망의 그루터기에 대해, 거룩한 씨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다행히 인구의 1/10을 남겨두실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들 중에 남은 자들은 또 한번 태워진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그 극소수중에서도 그루터기는 남아있다고 하십니다.

 

“...밤나무와 상수리나무가 베임을 당하여도 그 그루터기는 남아 있는 것 같이 거룩한 씨가 이 땅의 그루터기니라”

 

고 하십니다. 단순히 밑동이 잘려진 거목에서 자라는 연약한 ‘순’이 새로운 백성(남은 자)을 형성할 것이라고 예언하십니다.

 

 

우리가 새가족축제를 앞두고 복음을 전하는 것이 이사야의 소명과도 비슷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복음듣기를 싫어합니다. 눈에 보이는 것에 만족해하고, 눈에 보이는 것으로 모든 것을 판단합니다. 굳이 교회가지 않아도, 편안하고 안락한 삶에 만족해하는 세상을 살고 있습니다. 한국교회 교인수가 점점 줄어들고 있습니다. 다음세대는 급격하게 줄어들고 있는 현실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복음에 반응하는, 높이 들린 보좌에 앉으신 만군의 여호와의 말씀에 반응하는 한 사람, 이사야와 같은 거룩한 씨, 그분의 나라를 구성할 거룩한 씨를 지금도 준비하고 계심을 기억하시길 바랍니다. 여러분이 입을 벌려 복음을 전할 때 수많은 반대와 핍박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사람들 중에 하나님의 거룩한 씨로 다시 순이 돋아날 영혼이 있음을 기대하며 복음을 전합시다!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이사야의 고백이 여러분의 고백, 우리의 고백이 되길 소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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